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 1백60여년의 역사를 세가지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제1기는 1830년 교회 설립에서부터 1900년까지의 19세기 시대인데 이 시기는 미국 문명과 문화의 본류에서 소외된 문자 그대로 고난과 시련과 박해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동부의 뉴잉글랜드 지방으로부터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와 미주리주로 쫓기고 다시금 일리노이주 나부로 밀리고, 종국에는 그곳에서 강제로 추방되어 록키 산맥 한가운데인 유타로까지 쫓겨가는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옛날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모세, 다윗 또는 선지자 사무엘의 아버지인 엘가나의 시대에 일부다처가 불가피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고립된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 숫자가 차이가 남에 따라 일부다처가 불가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외부세계는 이와 같은 후기성도사회에 대하여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편견과 오해와 왜곡을 증폭시켰던 시대였다. 그러나 1890년에는 일부다처제의 종결이 선포되었고 교회 지도자들은일부다처제를 실질적으로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들에 대하여는 파문조치를 취하였다. 제2기는 1900년에서부터 1950년까지로서 후기성도가 미국 문화와 문명의 본류에 동화되고 수용되는 시대다. 이 때는 19세기와 같은 적대감이 누그러지고 정직, 도덕성, 근면, 성실 등 후기성도의 좋은 점이 드러나는 시기가 된다. 제3기는 1950년 이후 현재에 이르는 시기로, 교회가 미국 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으로 눈부시게 성장, 발전하는 시대로서 몰몬이 미국 사회가 본 받아야 할 '수퍼 아메리칸'으로 등장하는 시기다. 제3기에 들어와서는 몰몬은 단순히 건전한 가치관을 가지고 미국의 서부지역에서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또 하나의 기독교 종파가 되는 단계를 뛰어넘어 세계적인 종교를 지향하고 있다.
그 회원들은 이제는 국가경제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고 최고 경영층이나, 힘을 가진 국회의원, 준입법 준사법적인 행정위원회 위원, 고위 행정부관리, 군의 최고지휘자로까지 활약하고 있다. 신앙심이 강한 이 신자들은 현재의 미국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구원자적인 위치에 있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과거 후기성도들은 미국의 연방정부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기까지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수없이 많은 후기성도들이 정부와 민간기업 그리고 군의 가장 높은 직책에 진출해 있다. 유타 최대의 신문인 데저렛 뉴스(Deseret News)사가 발행한 1983년판 교회연감에 의하면 1982년 10월 당시까지 미국 정부의 최고위 직책에까지 올라간 몰몬 신자의 수는 장관이 7명, 연방 상원의원이 12명, 연방 하원의원이 33명이었다. 1992년 11월에 실시된 103차 연방상원과 하원의원 선거에서는 다음과 같이 3명의 후기성도 상원의원과 10명의 후기성도 하원의원이 당선되었는데 인구비례로 보아서 후기성도들이 많이 진출하였다.
연방 상원의원 + 해리 레이드(Harry M. Reid) 네바다주 민주당 + 오린 해치(Orrin G. Hatch) 유타주 공화당 + 로버트 베네트(Robert F. Bennett) 유타주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 + 하워드 맥키언(Howard P. Mckeon)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 왈리 허어저(Wally Herger)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 존 두리틀(John T. Doolittle)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 로날드 패커드(Ronald Packard) 캘리포니아주 공화당 + 에니 팔레오마배가(Eni F. H. Faleomavaega) 미 사모아 민주당 + 마이클 크레이포(Michael D. Crapo) 아이다호주 공화당 + 딕크 스웨트(Dick Swett) 뉴햄프셔주 민주당 + 어네스트 아이스투크(Ernest J. Istook) 오클라호마주 공화당 + 제임스 헨슨(James V. Hansen) 유타주 공화당 + 빌 모튼(Bill Morton) 유타주 민주당
총인구에 대한 몰몬신자의 비율이 미국보다 큰 뉴질랜드에서도 국회의원인 벤 카우치(Ben Couch)와 같은 후기성도는 1983년 경찰 및 마오리 담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최근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영국이나 중남미 국가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정부 고위직에 진출하는 영향력 있는 몰몬신자가 늘어나고 있다. 1990년 영국에서는 테리 루티(Terry Rooney)라는 몰몬신자가 처음으로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과테말라의 라파엘 가스띠요(Rafael Castillo)와 같은 몰몬신자는 유엔 대사를 지내고 국회의원이 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하였다. 우루과이의 국회의원으로 후기성도인 루이스 알베르또 페리초(Luis Alberto Ferrizo)와 같은 사람은 2백50명의 신학연구원 학생들을 대통령에게 안내하여 "각하는 자주 우루과이의 장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우루과이의 장래가 달린 젊은이들을 보아 주십시오"라고 소개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다. 세인트 빈센트의 독립 영웅이며 초대 총리였던 에버니저 테오도어 조슈어(Ebeneezer Theodore Joshua)는 독실한 후기성도로서 그 땅에 세워진 교회의 첫번째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애국심이 강하고 정직하고 열심히 일하는 특성으로 인하여 많은 후기성도들이 행정부의 영향력 있는 실무부서에서 일하고 있는데 레이건과 부시 등의 공화당 행정부에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몰몬신자들이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에서 일하였다. 수도인 워싱턴 지역에는 몰몬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신자가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제는 미시시피 동쪽의 동부지역에서 후기성도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지역이 되었다. 1992년 5월 16일자 워싱턴 포스트지는 두 페이지 전면에 걸친 종교 특집란에서 워싱턴 지역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보도하면서 회원수는 1980년의 1만6천명에서 1991년에는 2만6천7백명으로 늘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후기일성도가 높은 명성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으로는 먼저 정치분야를 들 수 있다. 1900년대에 유타주가 주 승격을 한 후 리드 스무트(Reed Smoot)가 몰몬신자로서는 처음으로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에서 30년 동안 정치가로 명성을 날렸으며 당시 대통령인 캘빈 쿨릿지, 그리고 허버트 후버와 깊은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리드 스무트는 대공황 시대에 최초의 공황대책으로 제안된 유명한 스무트 할리 관세법안을 통과시킨 장본인이다.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실시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은 유타의 성공적인 은행가였던 마리너 에클스(Marriner Eccles)였다. 그는 독실한 몰몬신자로서 루스벨트 정부로 하여금 적자 재정을 무릅쓰고 투자를 확대하도록 권고하였으며 1934년에 연방 정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에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에 선임되어 17년 동안 이 직책을 수행하였다. 현재의 오린 해치(Orrin Hatch) 연방 상원의원은 품위있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서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상원에서 활약해 왔는데 내셔널 저널(National Journal)지는 그를 다섯 명의 가장 유능한 젊은 상원의원 중 하나로 선정하였고 1981년 유명한 칼럼리스트인 잭 앤더슨은 의정활동이 가장 뛰어난 10명의 상원의원 중 하나로 그를 지목하였다. 그는 소련과 동구권, 그리고 중국에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서 1970년대 후반부터 교회 대표가 각국의 지도자들을 접촉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상원의원으로서 처음으로 우주선을 탔던 제이콥 가안(Jacob Edwin Garn)도 역시 후기성도로서, 영향력 있는 여러 상임위원회의 위원장직을 맡아 왔다. 명망있는 신자들을 통하여 교회는 미국정부의 정책 형성과정에 점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는 직원 모집에서 후기성도들을 선호한다. 중앙정보국이 직원채용시 꼽는 기준은 외국어 구사 능력, 외국 문화에 대한 훈련, 그리고 외국에서의 거주 경험 등 세 가지인데 몰몬의 젊은이들은 이 기준을 완전히 충족시킨다. 게다가 이 젊은이들은 모든 고용주들이 좋아하는 품성을 갖고 있는데 술과 마약을 입에 대지 않고 정직하고 양심적이며 환경 적응력이 뛰어나고 윗사람의 권위에 복종하며 열심히 일하는 근로윤리(Hard Work Ethic)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한때 스페인이나 프랑스, 페루 같은 나라에서는 몰몬선교사들이 중앙정보국의 활동을 돕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중앙정보국이 해외 선교사를 비밀 정보원으로 쓰고 있지 않음을 명백하게 밝혔다. 연방수사국(FBI)에서도 직원채용시에 선교사를 마치고 돌아온 정직한 후기성도를 선호한다. 외국어와 관련된 연방수사국의 모든 부서는 그들을 채용하려고 갖가지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 미국에서 군은 전통적으로 존경 받는 집단의 하나다. 사관학교는 동부의 명문대학 수준으로 입학이 힘들며 상원의원의 추천을 받아야 입학이 가능하다. 대단히 많은 몰몬들이 장교로서 근무하였고 존경받는 유능한 장성들도 많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나토(NATO)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오우크스(Robert Oaks) 대장과 같은 사람은 독실한 후기성도로서 존경받는 유능한 군인이다. 브리감 영 대학은 미국에서 최대의 ROTC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입단식이나 장교 임관식에는 국방성의 고위인사를 연사로 초청한다. 사법부에서도 각급 법원에서 몰몬신자들이 활약하고 있는데 11개의 연방 고등법원 중 두 곳의 법원장직을 몰몬신자가 맡고 있다. 제9연방 고등법원(U.S. Court of Appeals) 원장직은 헌신적인 후기성도인 클리포드 왈라스(J. Clifford Wallace)가 맡고 있는데 캘리포니아, 네바다, 아리조나, 오레곤, 위싱턴, 아이다호, 몬타나, 알라스카, 하와이, 괌과 북마리아나제도 등 미국에서 가장 큰 지역을 관할하는 고등법원이다. 1991년 9월 제10 연방 고등법원의 판사 다섯명을 대표하는 법원장직에도 헌신적인 몰몬이 임명되었는데 브리감 영 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를 지낸 몬로 맥케이(Monroe McKay)가 그 사람이다. 몬로 맥케이는 양심의 문제에 대하여 정부가 관여하고 특히 큰 종교집단의 의견을 작은 종교집단에까지 강요하거나 확대 적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후기성도들이 과연 종교활동과 세상일을 어떻게 조화시키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 몬로 맥케이의 경우를 잠깐 살펴보기로 하자. 몬로 맥케이는 1991년 9월 16일에 임기 7년인 제10 연방고등법원 원장직에 임명되었다. 제10 연방공등법원은 유타, 와이오밍, 콜로라도, 뉴멕시코, 캔사스, 오클라호마등 중부의 여러 지역을 관할하는 법원이다. 그는 잘 알려진 법학자이며 유능한 연설가이자 글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다. 그는 유타주 헌츠빌이라는 산마을 동네에서 독실한 몰몬신자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데이비드 오 맥케이 대관장은 사촌이면서 같은 마을에서 이웃으로 매우 가깝게 지냈다. 몬로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비롯한 교회의 경전과 회장들의 가르침을 읽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그는 자유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유명한 변호사였던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의 자서전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교적 다수의 손에 의한 횡포를 깊이 느껴 보았고 권위와 권한을 가진 직책에 있으면서도 소수집단인 몰몬으로 하여금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릴 수 있게 하지 못하는 법률가들을 보면서 자라났다. 그래서 그는 법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부와 공공기관에 근무하면서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는 부모와 형제들에게 전적으로 공감하게 되었다. 그의 맏형 건(Gunn)은 브리감 영 대학의 경영학 석사과정을 개설한 사람이고 동생 배리(Barrie)는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는 1946년부터 2년간 해병대에서 근무한 후 남아프리카에서 2년간 선교사로서 봉사하였다. 1957년 브리감 영 대학을 졸업하고 명문인 시카고대학 법과대학원에 입학하여 1960년에 변호사 자격을 획득하였다. 그 후 그는 전통적인 몰몬 집안이 아닌 개종자 루시와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키웠다. 변호사가 된 후 그는 아리조나주의 피닉스시에서 개업을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또 한 사람의 독실한 몰몬 동창생이며 유능한 변호사인 렉스리(Rex Lee)와 깊은 교우 관계를 맺게 되었다. 두 사람은 브리감 영 대학교 1학년 시절에 처음 만났는데 렉스 리는 현재는 브리감 영 대학교 총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렉스 리는 대학교 재학중에 선교사를 나갔기 때문에 시카고대학 법과대학원은 두해 늦게 입학하였다. 1973년 렉스 리는 새로이 설립된 브리감 영 대학교의 법과대학원 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취임 즉시 오랜 친구인 몬로 맥케이를 교수로 추천하였다. 렉스 리는 그의 친구 몬로 맥케이가 높은 지적 수준과 더불어 법조인으로서의 전문적인 자질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시야가 넓고 도량이 큰 사람이라고 추천이유를 밝혔다.
" 나는 지금까지 그 사람보다 남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가장 훌륭한 법률회사의 파트너십(이사자격)을 중간에 버리고 평화봉사단에 봉사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간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뜻이 크고 관대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1966년에 그는 아프리카의 말라위로 가서 2년간 평화봉사단을 이끌었다. 렉스 리는 "그는 참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세주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전형적인 사람이다."라고 평가한다. 몬로 맥케이는 3년간 법과대학원에 근무한 후 1977년 지미 카터 대통령에 의해 연방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렉스 리 총장은 다음과 같이 그를 칭찬했다.
" 그는 대단히 신망있는 변호사였기 때문에 그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는 판사가 갖추어야 하는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다. 그는 공정하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모든 상황을 다 파악하기 전에 미리 결정을 내리는 일이 없고 자기 앞에서 있는 증인과 변호인을 분명하면서도 지극히 존중하는 태도로 대한다."
여가 시간에 그는 책을 읽고 가족과 함께 여러가지 재미있는 활동을 즐긴다. 그는 교회에서 주일학교의 교사를 맡고 있으면서 19세기의 박해시절에 교회에 개종해서 시련과 고난을 이겨낸 스코틀랜드 출신 선조들이 남긴 전설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훼손하지 않으려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고백한다. 교육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몰몬들 중에는 우수한 두뇌집단들이 많다. 스테레오를 발명한 하베이 플레처(Harvey Fletcher) 박사나 텔레비전을 발명한 필로 판즈워스(Philo Farnsworth) 등은 모두 유타주 출신으로서 독실한 후기성도였다. 1983년 5월 23일 레이건 대통령은 텔레비전에 나와 '별들의 전쟁(Star Wars)'으로 알려진, 미국과 동맹국을 적의 대규모 공격에서 보호할 거대한 규모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개발에 관해 연설한 적이 있다. 이 계획은 동서 냉전의 해소로 인해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레이건의 연설이 있자 국방기술연구팀(Defensive Technologies Study Team)이 구성되고 그 총책임자에는 제임스 플레처(James C. Fletcher)가 임명되었고 그 해 10월에는 연구개발계획이 입안되어 와인버거 국방 장관의 승인을 거쳐 대통령에게 제출되었다. 이 제임스 플레처는 닉슨 행정부 시절 항공우주국(NASA) 국장을 지낸 우주기술의 최고 전문가로서 스페이스 제네랄(Space General)사의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였고 피츠버그대학의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헌신적인 후기성도이다.
한국 화학계의 태두인 이태규 박사를 유타 대학에 초빙하고 공동연구를 통하여 이(李).아이링 이론을 발견하기도 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학자인 헨리 아이링(Henry Eyring)은 1973년 유타주 프로보시에 아이링 리서치 센터(Eyring Research Center)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최첨단 전자기술연구소로서 특히 미사일이나 우주선, 로켓의 유도 시스템에 관하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다. 당초 이 연구소는 비영리 기관으로 설립되었으나 정부의 연구 요청이 워낙 많아 교회 소유의 영리 법인으로 전환되었다. 이 회사는 브리감 영 대학교의 유능한 공학교수 12명이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선교 사업망을 갖고 있는 몰몬사회에는 전세계 언어 중 안 통하는 언어가 거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를 듣고 배울 기회가 있다. 브리감 영 대학의 언어학자들은 자동언어처리 시스템회사(Automated Language Processing Systems, Inc.)를 만들었는데 휴렛 패커드(Hewlett Packard)나 NCR과 같은 대기업으로부터 거액의 용역 위탁을 받아 세계 각국에 이 번역시스템을 설치하고 있다.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대기업이나 정부기관은 모두 이 회사의 주요 고객이 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몰몬들의 정치적, 사회적인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져 왔으나 레이건 대통령 때에 그 절정을 맞았다. 후기성도들은 록키산맥지역(Intermountain West)에서 최대의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국적인 정치 상황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여론조사 전문가인 리차드 워스린(Richard Wirthlin)은 레이건의 가장 가까운 보좌관으로서 레이건으로 하여금 여론을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국정을 이끌어 가도록 보좌했다. 유타주의 유명한 교육자인 벨(T.H. Bell)은 앞에서 말한 대로 레이건 내각의 교육부 장관을 맡았으며 렉스 리(Rex E. Lee)는 대법원을 상대로 행정부의 법률적인 이해를 다투는 법무차관(Solicitor General)에 임명되었다. 리차드 리차즈(Richard Richards)는 공화당 전국위원회(Republican National Committee) 의장을 맡았었고 마크 캐넌(Mark Cannon)은 대법원장 워렌 버거 밑에서 법원 행정처장을 맡았고 로버트 브로드벤트(Robert Broadbent)는 방대한 예산으로 서부의 수자원을 개발하는 총책임을 진 연방 개발위원회 위원장(Commissioner of Reclamation)직을 맡았다. 이제는 워싱턴의 모든 주요 기관의 영향력 있는 자리에 물몬신자들이 포진하게 된 것이다.
1991년 11월 20일자 L.A. 타임스는 로리 베크런드(Laurie Becklund) 기자가 쓴 기사에서 가정을 중시하고 그 가족을 사랑하는 또 한사람의 슈퍼 아메리칸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싣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은UC Berkely, UCLA, UC Irvine 등 9개의 주립대학으로 구성되는 미국 최대의 대학집단인데 64억 달러의 예산과 20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세계 최고수준의 연구소를 여러 개 갖고 있다. 9개 대학에는 대학마다 총장(Chancellor)이 있고 9개 대학의 위에는 총장의 총장인 대표총장(President)이 있다. 연봉 24만3천5백 달러를 받는 대표총장은 캘리포니아에서 최고의 급료를 받는 주정부 공무원이며 미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직책인데 1983년부터 독실한 몰몬신자인 데이비드 가드너(David Gardenr)가 이 직책을 맡아왔다. 그러나 그는 10년 임기가 다 끝나기 1년 전인 1992년 10월에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사임에 얽힌 이야기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서 실마리가 풀린다. 1958년에 결혼해서 32년간을 반려자로 함께 살아온 그의 아내 리비( Libby)는 1991년 2월, 55세의 나이에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죽은 후 대학을 방문한 독일수상 헬무트 콜을 환영하는 자리에 그는 아내 없이 혼자 헬무트 콜 부부를 맞았다. 1991년 11월에 그는 자기가 강력히 추진하여 설치하게 된 케크 망원경(Keck Telescope)이라 불리는 우주의 기원을 밝혀줄 강력한 천체 망원경시설 준공식에서 귀빈들과 그 부인들 가운데 혼자 서서 행사가 끝난 후 외롭게 호텔로 돌아와 독감에 걸린 몸으로 펜을 들어 다음과 같이 사임 편지를 썼다.
" 이 편지는 쉽게 쓴 것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은 감정을 몇마디 단어로 전해야 하는데, 이런 느낌이란 내가 남과 함께 나눌 수 있거나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훨씬 뛰어넘는 인생의 원리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아내가 죽은 후 날이 가면 갈수록 그녀가 없이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대표총장직을 수행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나는 사임하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순애의 사직서였다. 데이비드 가드너는32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가 없이는 도저히 총장의 임무를 원만히 수행할 수가 없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가드너 총장은 인간관계를 상쾌하게 유지하는 사람이었는데 가정적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총장공관 입주를 거절하고 자기 집에서 계속 살기를 희망했다. 사임을 발표한 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내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아내는 무척 현명한 사람이었고 실제적인 사람이었고 대단히 조직적이면서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특히 자기 생애를 가족과 함께하면서 둘이 함께 일하는데 바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네 딸을 키우면서 남편 옆에서 대학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많은 사회적인 활동이나 학문적인 행사에서 조용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으로 총장 부인의 역할을 다했다. 결혼 후 두 사람 사이에는 종교적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논쟁이나 다툼이 한번도 없었다고 총장은 고백하였다. 네 딸 중의 하나인 리사 가드너는 부모의 결혼생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 분의 결혼생활에는 특별한 것이 있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친구들의 부모에게서는 보기 어려운 그러한 결혼생활이었습니다."
유타대학 총장을 지내고 1983년 캘리포니아대학 대표총장으로 오기 전에 그는 새로운 직책에 대해 아내와 상의를 했고 그 때 두 사람은 직책을 같이 수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는 일요일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내와 네 딸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을 이사회에서 밝힌 후 총장에 취임하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드너 총장은 아내가 씻은 접시를 말려주면서 업무수행 과정에서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항상 부인과 상의해서 좋은 결론을 내고는 하였다. 가드너 총장은 그의 아내가 상류층 부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대학에 기부를 흔쾌하게 하는 부인들과도 매우 따뜻한 인간관계를 유지 해왔기 때문에 기부금은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