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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회사·경전 안내 281

23세에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받았으며 히버 제이 그랜트 히버 제이 그랜트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제7대 회장이었다. 1856년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태어난 히버는 생후 며칠만에 아버지 제디다이아 그랜트(브리검 영의 보좌)를 여의고 어머니 레이철 리지웨이 아이빈스 그랜트의 손에서 자랐다. 히버는 23세에 스테이크 회장으로 부름받았으며, 2년 후에는 사도로 성임되었다. 사도직을 수행하던 36년 동안, 그는 북미 원주민 회원들과 함께 일하며 많은 이들을 신권 지도자로 성임했고, 일본에서 첫 선교부를 조직하고 감리했으며, 영국 및 유럽 선교부를 감리했다. 그가 사도직을 수행하면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는 1893년에 교회를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출을 얻으려고 하늘의 도움을 구했을 때이다. 일부다처제를 반대하는 법률과 잘못된 투.. 2020. 10. 28.
불만에 따른 항의의 표시로 후기 성도 사이에서 비롯된 종교적 반대 움직임 1837년에 커틀랜드 세이프티 소사이어티가 파산한 후,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에 있던 일단의 후기 성도들은 조셉 스미스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조셉을 통해 고대의 복음을 회복해 주셨다는 것을 여전히 믿고 있었지만, 더는 조셉을 지도자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불만에 따른 항의의 표시로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개신교의 전통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를 따로 설립했다. 조셉 스미스의 생애 동안, 몰몬경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조셉을 계속 지도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몇몇 소규모 무리들은 교회를 떠나 자신들만의 집단을 이루었다. 1844년, 조셉 스미스가 사망한 후에 후기 성도 대부분은 십이사도를 지도자로 지지했으나,.. 2020. 10. 28.
혼즈밀 대학살 혼즈밀 대학살 제이콥 혼(영어 단어 Hawn은 때로 Haun으로 표기되기도 함)은 미주리주 북서부의 숄 크리크 강변에 처음 정착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방앗간(영어로 mill)을 짓고, 그 정착촌을 혼즈밀(Hawn’s Mill: 혼의 방앗간)이라고 불렀다. 위치상으로는 파웨스트에 있는 후기 성도 중심지에서 도보로 하루 거리였다. 혼은 교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1830년대 말에 자신의 방앗간 부근에 정착한 후기 성도 무리에게 호의적이었다. 폭력이 점점 더 거세지면서 초기 성도들이 미주리주 밖으로 쫓겨나던 무렵인 1838년 10월 30일, 불한당 같은 민병대가 혼즈밀에서 성도들을 습격했다. 여자와 아이들 대부분은 정착촌에서 빠져나와 숲에 몸을 숨겼지만, 일단의 후기 성도 남자들과 소년들은 대장간에서 숨을.. 2020. 10. 28.
협동회사(“협동교단”) 협동회사(“협동교단”) 협동 회사는 1832년부터 1834년까지 교회 기금의 지출을 감독하던 관리 조직이었다. 1832년 3월, 주님께서는 조셉 스미스에게 교회의 “저술 및 상업 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오하이오주와 미주리주에서 이 조직을 설립하라고 명하셨다. 조셉은 이를 위한 목적으로 1832년 4월에 미주리에서 대제사 평의회를 열었다. 조셉은 이 평의회에서 그와 시드니 리그돈, 뉴얼 케이 휘트니, 에드워드 파트리지, 시드니 길버트, 존 휘트머, 올리버 카우드리, 윌리엄 더블유 펠프스, 마틴 해리스가 이 회사의 구성원이 될 것이라는 또 다른 계시를 받았다. 그 계시에 따르면, 이들은 모인 기금의 일부를 자신의 필요 사항을 위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남은 기금은 교회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했다. 그들은 이 .. 2020. 1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