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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선교사업

동구권과 러시아에서의 선교사업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9.

구 소련을 비롯한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구 공산권 국가들과 그리스에는 동서양 이데올로기의 냉전 기간 동안 기독교의 선교가 차단되어 있었으며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 나라에 살고 있는 후기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이 지역을 항상 주시하면서 가능한 손길과 교섭을 끊이지 않았다.

 

교회 부회장들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도들이 직접 방문하여 교섭을 하는등 적극적인 진출 노력을 경주한 결과 1980년대 후반에 대부분의 국가에서 종교에 대한 제한을 해제하고 선교를 허락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선교사가 파견되어 집회장소를 재건하고 필요한 자료를 인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면 공식적인 선교사업이 시작되기 전 동구권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활동을 살펴보자.

교회는 동구권의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기 훨씬 전부터 복음 전파를 위한 계획을 착실하게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교회는 정기적으로 해외 순회공연을 행하는 브리검 영 대학교의 민속음악단과 민속무용단들을 활용하였다.

 

이 팀들의 공연은 단순히 종교적인 이유라면 입국을 거절하는 공산국가로 하여금 교회지도자들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이들 문화사절단을 따라 공식적으로 이들 국가를 방문하였다.

 

가장 먼저 공연이 이루어진 국가는 폴란드로서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다섯개의 민속음악단 또는 민속무용단이 파견되어 공연을 하였다. 그 첫해인 1977년 8월 스펜서 다블류 킴볼(Spencer W. Kimball) 회장은 직접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폴란드를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다.

 

1979년에 브리감 영 대학의 ‘아메리칸 포크댄스’ 민속무용단은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와 소련을 순회하면서 수십만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였다. 특히 루마니아에서는 독립기념일 하루에 90분씩의 공연장면이 국영 텔레비전에 세차례나 방영되었다.

 

소련의 중앙 텔레비전 방송은 공연장면을 전국의 11개 시간대 전부를 활용하여 1억5천만명의 시청자에게 방영하였다. 몰몬 젊은이들은 공연을 통하여 동구권 국가를 폭풍처럼 휩쓸었다. 1981년에 부대관장 고든 비 힝클리(Gordon B. Hinkely)장로는 ‘영 앰배서더(Young Ambassador)’라 불리는 브리검 영 대학 민속음악무용단을 따라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와 유고의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그리고 소련의 모스크바, 키에프, 레닌그라드를 방문하였다. 그는 몰몬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났다.

 

공연은 30분짜리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 영 콤뮤니스트 라디오(Young Communist)와 라디오 모스크바(Radio Moscow)를 통해서도 방송되었다. 영자지 소비에트 라이프(Soviet Life)는 민속음악무용단과 브리검 영 대학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썼다. 브리검 영 대학의 역사학 교수로서 이 여행을 기획하였던 다글라스 토블러(Douglas Tobler)는 “학생들은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들 나라를 준비시키는 침례자 요한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썼다.

 

1985년 11월 10일 에즈라 태프트 벤슨(Ezra Taft Benson) 사도는 교회의 13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취임 후 열린 첫번째 고위 지도자 회의에서 벤슨 회장은 유명한 심장외과 의사인 럿셀 엠 넬슨(Russel M. Nelson) 사도에게 동유럽의 교회활동을 총괄하는 사도로서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때까지 사회주의 국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는 교회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있는 비엔나 선교부에 소속된 몇몇 헌신적인 부부 선교사들이 사회주의 국가에서 어렵게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한쌍은 폴란드에서, 또 한쌍은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왕래하면서, 두쌍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리고 다른 두쌍은 그리스에서 전도하고 있을 뿐 소련에서는 한 사람의 선교사도 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에는 몰몬 신자들이 각각 수천명씩 살고 있었으나 선교사는 입국할 수도 없고 예배를 포함하는 교회의 모든 활동은 정부의 종교억제 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경찰은 물론 대중이나 심지어 가족이 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만 예배를 보아야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교회는 폴란드, 동독(1990년 10월 3일 이후에는 서독과 합쳐졌으므로 동부독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하는 중부 유럽과 러시아를 비롯하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그리고 그리스를 포함하는 동부유럽에 극적으로 진출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교회발전은 동독의 프라이버그 성전 헌납이 계기가 되었다. 1985년 6월 29일 성전헌납식에서 부대관장 고든 비 힝클리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다.


  “이날이 당신 교회의 역사에서 오래 기억되는 날이 되기를 비옵니다. 감사와 기쁨의 날로 기억되기를 원하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기쁨을 갖게 되는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기를 비옵니다.” 


square11_bronze.gif 동부독일에서의 교회 성장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독정권이 수립되었을 때에 그 땅에는 아직도 수천명의 후기성도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1946년에는 동독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1947년 드레스덴에서 개최된 개척자의 날 1백주년 기념식에는 약 5천명의 성도들이 참석하였으며 1955년에는 드레스덴 교회 창립 1백주년 기념예배가 거행되었다.

 

1969년 6월 15일 토마스 에스 몬슨(Thomas S. Monson) 사도는 전(全) 동독지역의 선교책임을 맡은 드레스덴 선교부를 설치하였으며 동독성도가 선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82년에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동독 프라이버그에 교구가 설치되었고 1984년에는 라이프치히 교구가 설치되었으며 1985년 6월 28일에는 프라이버그 성전이 헌납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기독교회가 공산주의 국가에서 예배를 볼 수 있는 건물을 짓는 첫번째 기록이 되었다.

 

1988년 10월 교회는 몬슨 부대관장은 동독의 국가평의회 의장, 종교성 장관 등 최고위 지도자들과 회담을 갖고 동독내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허용하도록 요청하였으며 또한 동독의 후기성도들이 해외에서 선교활동을 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 자리에서 쿠르트 레플러(Kurt Loeffler) 종교성 장관은 후기성도 선교사들이 자기 본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좋은 평을 얻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선교사들이 법을 지키고 가정의 중요성을 믿는 충실한 시민이며 열심히 일하는 근로윤리를 갖고 있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므로 자기 정부는 그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종교성 장관은 선교사 입국과 동독 선교사의 해외 선교 두가지를 모두 허용하였다.

 

몬슨 제일회장단 회장은 드레스덴 교구 건물의 헌납식에 참석했는데 바로 전날에 있었던 오픈 하우스 모임에는 3만명의 이웃 주민들이 방문하였다.

 

1989년 3월부터 드레스덴 선교부 산하에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으며 1년 반이 지났을 때 이 지역에서는 약1천1백명의 개종자가 생겼다. 또한 동독 선교사 10명이 영국,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그리고 칠레에서 전도하도록 파견되었다.

19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지고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의 통일이 선포되었다.  1991년 7월에는 드레스덴 선교부가 나뉘어져 베를린에 새로운 선교부가 설치되었다.


square11_bronze.gif 폴란드에서의 교회 발전


1986년 5월 31일 제일회장단 보좌 회장 토마스 에스 몬슨은 종교성 장관이하 종교 행정을 관장하는 폴란드의 정부 고위관리들을 만나 선교활동과 교회건물확보를 요청하였고 이 요구는 쉽게 받아들여졌다.

 

1989년 6월 15일 바르샤바에서는 폴란드 최초의 후기성도 교회 건물에 대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모임에는 교회의 사도인 럿셀 엠 넬슨이 참석하였고 폴란드 정부에서는 바르샤바의 볼라시(市) 시장인 안드레제 오스트로프스키와 비(非)카톨릭 담당 종교국장인 그르제고르즈 리들레브스키, 전임 종교국장 타데우스 두스키크가 참석하여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을 환영하는 연설을 행하였다.

기공식이 끝난 다음날 교회 지도자들은 종교성 장관 블라디슬라바 로랑을 예방하였으며 그 자리에서 종교성 장관은 새로이 제정된 양심과 신앙의 자유에 관한 법률안을 보여주었다. 1990년 7월 1일에는 폴란드 선교부가 바르샤바에 설치되었고 첫번째 선교사들이 부름을 받아 선교사업을 개시하였다. 이후 교회와 폴란드 정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square11_bronze.gif 불가리아에서의 시작


사회주의 독재정권이 아직도 위세를 떨치고 있는 불가리아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제삼의 유력자를 중개인으로 하여 불가리아 정부 관리들을 면담할 약속을 한 넬슨 사도와 유럽지역 회장인 한스 링거 장로는 1988년 10월 30일 밤늦게 소피아 공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공항에는 안내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사회주의 국가의 정부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약속을 문서로 확인해 주는 일이 없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갔으나 내리고 나니 다른 호텔이었다. 길을 잘못 든 것을 안  두 사람은 무거운 가방을 들고 눈보라 속을 걸어서 예약된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날 영어를 할 줄 하는 호텔의 교환수는 만나야 할 고위관리의 이름과 사무실이 모두 틀리다고 알려 주었다. 이런 때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기도는 기적과 같이 응답되었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두 사람은 종교성 장관인 치아코 체코프를 만났다. 그는 방금 소피아로 돌아왔으나 태도는 냉랭했다. 그는 넬슨 사도가 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아무 약속도 되어 있지 않았다. 통역을 통해서 그는, “뭐 넬슨? 링거? 몰몬이라고?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라고 빈정거렸다.

 

그러자 넬슨 사도는,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요. 우리도 당신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소. 피차 마찬가지니까 서로 가깝게 지냅시다.”라고 말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한바탕 웃고는 이내 우호적인 분위기가 되어 면담이 진행되었다

 

1990년 2월 넬슨 사도는 다시금 소피아에 돌아와 불가리아를 새로운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으며 체코프 이하 정부관리들과 언론 관계자들을 만났다. 불가리아인들은 시급한 당면과제로 영어를 가르칠 자원봉사자들을 요청하였으며 교회는 가장 우수한 영어 선생들을 자원봉사 희망자들 중에 선발하여 불가리아로 파견하였다.

 

1991년 7월 불가리아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이것은 베를린, 체코, 헝가리, 폴란드에 이어 동구권 국가에 열린 다섯번째 선교부로서 선교부장에는 불가리아계 미국인 치과의사인 키릴 키리아코프(Kiril Kiriakov)가 임명되었다. 선교부가 개설되었을 때는 이미 불가리아 정부의 승인을 얻어 인접국가에서 온 남자 선교사 10명, 네명의 여자 선교사 그리고 두쌍의 부부선교사가 활약하고 있었고 50명의 개종자가 있었다.

 

1991년 7월 10일에 불가리아 정부는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교회는 불가리아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square11_bronze.gif 헝가리에서의 선교사업


1982년 중부와 동부유럽을 순방하면서 사람들을 열광케 하였던 몰몬태버나클 합창단의 공연실황이 헝가리에서도 국영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방영되었다 극히 좋은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 방송국은 미국에 2주일 동안 제작진을 파견하여 교회현황을 소개하는 4부의 미니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1985년 11월과 12월에 걸쳐 전국에 방영된 이 기획물은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더 많은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구가 교회의 선교사업 관리국에 빗발쳤다. 어디에 편지를 보내야 좋을지 모르는 많은 시청자들은 ‘미국 몰몬교’, ‘유타 선교센터’라고 주소를 적어 보내기도 하였다.

 

1987년 4월 19일 부활절에 교회는 넬슨 사도를 부다페스트에 파견하여 헝가리를 새로운 전도지역으로 헌납하고 그 국민을 위한 축복기도를 행하였다. 이틀 후 넬슨 사도는 종교활동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가진 종무위원회(Council of Religious Affairs)의 위원장인 임레 미크로스(Imre Miklos) 박사를 면담하였다. 교회 활동을 주의 깊게 청문한 미크로스 박사는 예정시간보다 배 이상의 시간을 내어주는 등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고 이후 교회의 좋은 친구가 되고 대변자가 되었다.

 

1988년 6월 미크로스 위원장은 교회 활동을 법적으로 승인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넬슨 사도에게 전달하였는데 이 자리에는 벌써 수백명의 개종한 헝가리인 후기성도를 이끄는 지도자들인 게데온 케레스티(Gedeon Kereszti) 박사와 페테르 파울 바르가(Peter Paul Varga) 박사가 동행하였다.

 

1990년 7월 1일에는 부다페스트에 헝가리 선교부가 설치되어 헝가리인들에게 본격적인 전도가 시작되었다. 1989년 10월에는 연례 유럽지역 선교부장 회의가 부다페스트에서 열렸는데 이 때 헝가리 국회는 헝가리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함으로써 국체를 민주국가로 바꾸었다.



square11_bronze.gif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알바니아에서의 선교활동 개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종교활동에 대하여 엄한 감시를 해왔으나 1990년 2월 21일에 교회의 예배와 전도활동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며 1990년 7월 1일에 교회는 50년 동안 공산주의 아래에서 전도가 금지되었던 체코 선교부의 문을 다시 열고 공식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독재정권이 무너진지 5주 후 1990년 2월 9일 넬슨사도가 루마니아를 선교지역으로 헌납하였으며 이내 헝가리 선교부 산하의 선교사들이 루마니아에 들어와 선교사업을 시작하였고 많은 개종자들을 내고 있다. 한편 교회는 루마니아 정부의 요청으로 부쿠레슈티의 3만명이 넘는 고아들에 대한 자선 구호 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양의 물자를 루마니아로 보내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에도 비슷한 시기에 선교사가 파견되고 교회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몬슨 사도는 1985년 10월 31일 유고슬라비아를 전도지역으로 헌납하였다. 넬슨 사도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종교담당 정부 관리들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유고의 스포츠 영웅으로서 브리검 영 대학 농구팀의 스타인 크레스미르 코시크(Kresmir Cosic)가 동행하였다. 교회는 유고정부의 승인을 얻어 자그레브와 여러 주요 도시에서 예배활동을 시작하였다.

 

선교사업은 그리스에서도 시작되어 1990년 7월 1일 아테네 선교부가 공식으로 설치되었으며 여러명의 현지인 선교사들도 배출되어 전도가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알바니아에서도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1992년 6월 네명의 복음 선교사가 수도 티라나에 도착하였고 한 쌍의 부부 선교사가 농업을 돕는 선교사가 되어 알바니아에 도착하였다. 1993년 4월 23일에는 댈린 오우크스 사도가 알바니아를 복음전도 지역으로 헌납하였다. 이 때는 55명의 알바니아인 성도들과 18명의 선교사가 참석하였다


square11_bronze.gif 러시아로의 진출


1987년 6월 교회의 넬슨 사도는 소련을 방문하여 종무위원회(Council of Religious a Affairs) 위원장을 면담한 후 러시아 정교, 개신교, 그리고 유태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만났다. 그는 수석 랍비인 아돌프 샤예비치(Adolph shayevich)로부터 모스크바의 유태교회당(Synagogue)에서 열리는 율법학자 모임에도 초청을 받았다.

 

넬슨 사도는 1989년 8월 모스크바를 다녀와서 자선가인 캘리포니아의 아만드 해머(Armand Hammer) 박사와 유타의 존 한츠맨(Jon Huntsman) 사장과 동행하여 1988년 12월의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아르메니아의 주민을 돕는 협약서에 서명을 한 후 종무위원회 위원장을 다시금 예방하고 교회활동의 공식적인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때 소련정부 지도자들은 공식적으로 교회활동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연방정부 차원이 아닌 지방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하고 지역마다 적어도 20명의 소련 신자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건을 알려주었다. 교회는 외국에 나가서 개종한 신자들을 쉽게 확보하였으며 러시아가 교회의 등록을 공식 발표하였을 때는 이미 소련내에 3백명의 소련인 후기성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들은 이 때에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레닌그라드의 한 부부는 1989년 7월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를 방문했다가 몰몬으로 개종하였고 스베틀라나라고 불리는 젊은 부인은 1989년 가을에 소련에서는 매우 비싸고 구하기 힘든 러시아 성경을 구하러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헬싱키에 갔다가 우연히 공원에서 러시아어 성경을 줍고 또 거기서 몰몬교회의 선교부장을 만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이 귀국하여 친구들에게 교회를 소개함으로써 여러명을 개종시키게 되었으며 정부의 승인조건을 쉽게 달성하게 된 것이다.

 

1990년 4월 에스토니아에서는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어 수도인 탈린에 최초의 교회가 설치되었다. 또한 에스토니아 탈린 출신의 자누스 실라(Janus Silla)는 개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소련인으로서는 최초로 선교사의 부름을 받고 미국으로 파송되어 전도를 하게 되었다.

 

1990년 4월 26일에는 레닌그라드에 교회 설립을 신청하여 1990년 9월 13일에 허가가 났다. 몇 달 후 레닌그라드에는 두번째 교회 설립이 승인되었다.

 

이러한 예는 다른 여러 도시에서도 반복되어 지금은 성 페테르스부르크에는 이미 7개의 교회가, 모스크바에는 4개, 비보르그에 1개,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1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1990년 하반기에 들어와 러시아 정부는 종교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종교의 자유의 원칙을 천명하고 교회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였다. 교회는 새로운 법률에 따라 1991년 3월에 교회 설립에 대한 승인을 신청하였다.

1991년 6월 24일 러시아 부통령 알렉산더 루츠코이(Alxander Rutskoi)는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몰몬 태버나클 합창단 공연이 끝난 후에 개최된 만찬회에서 교회의 러시아정부 등록을 인정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15개 공화국 중 두번째 공화국의 승인을 얻은 것이다. 러시아는 전체 과거 소련 국토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인구는 1억4천만명을 넘는다.

 

1988년 12월 아르메니아에는 거대한 지진이 발생하여 5만명의 사망자를 내고 50만명 이상이 집을 잃게 되었는데 교회는 필요한 물자를 기증하는 등 적극적인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유타주에 있는 한츠맨 화학회사(Huntsman Chemical Company)의 사장이며 몰몬신자인 존 한츠맨은 무너진 집을 지을 콘크리트 조립 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을 지어주고 교회는 이에 필요한 전문 기술자를 무료로 지원할 것을 아르메니아 정부에 약속하였다.

 

이러한 자선활동에 대해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총리인 블라디미르 수레노비치 마르카리안츠(Vladimir surenovich Markariants)는 교회와 자선가들에게 깊이 감사하면서 그 표시로 수도 예레반에 있는 4천평의 땅을 교회에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6월 24일에 연간 6천5백채의 아파트를 지을 자재를 생산하는 콘트리트 조립자재 공장이 준공되고 솔트 레이크 시티의 주택 기술자인 데이비드 호온(David Horne)이 교회의 요청으로 자기 시간과 기술을 바쳐 예레반에서 집짓는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1991년 9월에는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교회를 공식적으로 승인함으로써 구 소련의 4개 공화국이 교회를 승인하게 되었으며 1992년 2월에 모스크바, 성 페테르스부르크, 키에프의 세 지역에 선교부가 설치되어 선교사가 파견되고 복음전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1993년 5월에는 라트비아, 벨라루스(또는 백러시아), 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차례로 선교지역으로 헌납되었다. 구 소련내에 몰몬 신자수는 놀랍게 빨리 증가하고 있으며 교회에서 회원수 통계를 발간할 때는 이미 그 숫자는 낡은 것이 되고 마는 정도다. 구 소련 지역에는 1993년 3월 현재 6개의 선교부가 개설되었으며 동구권 지역에도 6개의 선교부가 개설되었다.

 

동구권과 러시아에서의 교회 발전 속도는 거의 ‘믿을 수 없는 정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는 교회의 첫번째 예언자인 조셉 스미스가 1백50년전 어떤 간증 모임에서 행한 예언적인 말이 지금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형제들, 저는 여러분의 오늘 저녁 간증을 듣고 크게 깨닫고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이 교회와 왕국의 운명에 대하여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는 어린 아기보다도 잘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이 교회는 북미와 남미를 가득 채우고 온 세계를 채우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