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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말씀·경전

로렌조 스노우의 주님의 사업에 대한 끊임없는 헌신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10.

로렌조 스노우는 거의 7년간 전임 선교사로 봉사한 후, 한동안 다른 봉사를 할 기회를 맞았다. 지역 학교 이사회에서 1843년 말과 1844년 초 겨울 동안 교사로 일하겠냐는 제의를 해 온 것이다. 그는 여러 학생들이 “교사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망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 그들을 존중하기로 했다. 누나인 엘리자는 이렇게 말했다. “로렌조는 학생들에게 말할 때, 그들을 가장 존경받을 만한 신사로 대했어요. …… 학생들에 대한 관심과 그들이 학업에 정진하도록 돕겠다는 소망으로, 그들 마음을 움직이려고 온 힘을 기울였죠. …… 이렇게 친절과 설득을 다하자 마음이 누그러진 학생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고, 끈기 있게 계속 노력한 결과 거칠고 버릇없는 학생들이 공손하게 바뀌기 시작했어요. 로렌조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훨씬 전부터 학생들은 놀라운 발전을 보이며 학구적인 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1844년에 로렌조 스노우는 새로운 교회 부름을 받았다. 오하이오로 가서 조셉 스미스를 미합중국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한 선거 운동을 감독하도록 지명 받았던 것이다. 선지자는 미합중국 정부가 후기 성도들을 대하는 방식에 실망하여 대통령 출마자들에게 교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라고 서한을 보냈다. 답장이 탐탁지 않자 조셉 스미스는 직접 대통령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십이사도 정원회는 로렌조 스노우와 몇몇 사람들에게 “대통령직에 출마한 조셉을 홍보하도록 오하이오 주 전체에 정치 단체를 조직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그 일을 통해 그들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성도들의 권리가 어떤 식으로 짓밟혔는지를 널리 알렸다. 로렌조는 “매우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선지자의 출마를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조셉 스미스가 나라를 성공과 번영으로 이끌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렌조 스노우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렇게 극단적인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서 내가 추진하던 일은 갑자기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선지자와 그의 형 하이럼이 학살되었다는 확인된 보도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나부로 돌아왔다.
이런 비극적인 시기를 겪으면서도 성도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후에 로렌조가 언급했듯이 “전능자의 인도로 왕국은 앞으로 나아갔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하고 서로를 강화했으며 자신들이 있는 도시에서 성전을 완공하고자 힘을 모아 일했다.
로렌조 스노우는 성도들과 함께 나부로 집합할 당시 결코 결혼하지 않고 남은 생애를 복음 전도에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누나인 엘리자는 후에 “로렌조는 시간과 재능, 그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이 성역에만 바치겠다는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가정을 꾸리면 주님의 일을 하는 “그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혼과 가족에 대한 로렌조의 시각은 1843년에 그가 미시시피 강둑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단 둘이 대화를 나누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선지자는 복수결혼에 관해 계시를 받았다고 간증했다. 조셉 스미스는 로렌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주님은 형제님이 해의 왕국의 결혼이라는 율법을 받아들이고 준수하도록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이 권고에 따라 로렌조는 결혼이 주님이 주신 계명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행복의 계획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1845년에 로렌조 스노우는 샬럿 스콰이어스, 메리 애덜린 고더드와 당시 교회에서 행하던 복수결혼을 했으며, 후에 다른 여성들과도 인봉되었다. 그가 부인들과 자녀들에게 한 헌신은 주님의 사업에 바친 헌신의 일부였다.
성도들은 나부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일을 계속했지만 박해 또한 끊이지 않았다. 1846년 2월, 추운 겨울에 성도들은 폭도들을 피해 집과 성전을 포기해야 했으며,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서쪽으로 오랜 여행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