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9년 2월 12일, 로렌조 스노우는 십이사도 정원회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미 시작되어 진행 중인 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즉시 움직였다. 가는 길에 로렌조는 왜 십이사도 정원회가 자신을 불렀는지 궁금해했다. 혹시 잘못한 일이 있다고 누가 자신을 고발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으나 늘 맡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기에 이내 그 걱정을 떨쳐 버렸다. 그러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모임에 도착한 로렌조는 정원회 일원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라워했다. 그 모임에서 로렌조 스노우는 찰스 시 리치 장로, 프랭클린 디 리차즈 장로와 먼 사촌인 에라스터스 스노우 장로와 함께 사도로 성임되었다. 사도 직에 성임된 일은 뒤이은 로렌조 스노우의 삶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이름의 특별한 증인”(교리와 성약 107:23)으로서 그가 받은 이 부름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쳤다. 후에 그는 사도로서 느낀 책임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첫째,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예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한 지식을 지녀야 합니다. 둘째로, 사도는 성신을 약속할 수 있는 신성한 권세를 받아야만 합니다. 성신은 구주께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며, 그분의 뜻과 목적을 알려 주고, 진리로 이끌며, 다가올 일들을 보여 주십니다. 셋째로, 사도는 성스러운 복음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권능을 받으며, 그 권능은 하늘로부터 오는 증거를 통해 각 개인에게 확증됩니다. 제 설교를 듣고 의식을 받아 지금 이 분지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이 참됨을 증거할 수 있는 산 증인들입니다.” 스노우 장로는 부름을 통해 주어진 개인적인 책임 외에도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우리 십이사도는 의무를 수행하는 길에서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모든 것들을 내려놓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써 우리는 [제일]회장단이 하나이듯이 우리도 하나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과 그 아버지를 하나로 매어 주는 사랑의 원리로 함께 묶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로렌조 스노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름과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명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자 생애를 바쳤다. 그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봉사하라는 부름에 응했다.
이탈리아 선교부 1849년 10월 연차 대회 기간에 스노우 장로는 이탈리아에 선교부를 세우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 나라와 문화, 언어가 낯설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 부름을 받아들였다. 대회가 끝난 지 채 2주가 되기도 전에 스노우 장로는 자신이 없는 동안 남아 있을 식솔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대서양을 건널 배에 오르기 위해 미 동부로 여행하던 중에, 남겨진 가족과 자신이 섬겨야 할 사람들 양편으로 생각이 미쳤다. 그는 누나인 엘리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만감이 교차하더군. …… 강력한 자석과도 같이 우리를 끌어당기는 집과 고향에서 멀어지기 위해 우리는 더 서둘렀지. 하지만 우리가 종사하는 일이 어둠과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는 이들에게 빛을 전하는 사업임을 알고 있기에 가슴은 사랑으로 불타올랐고, 우리는 눈물을 닦을 수 있었어.” 1850년 7월, 스노우 장로와 동반자들은 이탈리아 제노바에 도착했다. 그들은 주님의 사업이 그곳에서 매우 더디게 진행될 것임을 느꼈다.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 드넓은 도시에 홀로 있는 나그네와 같다. 사랑하는 가족은 12,8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고, 주위에는 풍습이나 생활 방식이 낯선 사람들뿐이다.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고 의의 원리를 가르쳐 주려고 이곳에 왔건만 그 목적을 이룰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어두운 전망만이 가득할 뿐이다.” 자신이 부름을 받아 섬겨야 할 사람들이 “어리석음, …… 사악함, 심한 무지와 미신”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하며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이 백성들을 자비롭게 보아 주시기를 간구한다. 오 주여, 그들이 모두 멸망 당하지 않도록 동정심을 베풀어 주옵소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이 아버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또 아버지의 왕국을 세우기 위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알게 해 주옵소서. …… 이 백성 가운데 선택된 이가 없다면 누구에게 저를 보내셨나이까? 그들에게 저를 인도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스노우 장로는 이런 “선택된 사람들”을 “발도파”라고 불리는 교도 중에서 찾았다. 발도파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 바로 남쪽, 그리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국경 동쪽에 있는 피에몬테 지방 산골짜기에 살았다. 그들의 선조는 고대 사도들에게 있었던 권세를 믿었기에 그 당시의 종교에 가입하기보다는 고대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를 원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박해를 받고 여기저기로 쫓겨 다녀야 했었다. 스노우 장로는 브리검 영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도파는 “암흑과 잔혹함”으로 여러 세대 동안 고통을 받아 왔으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닷속의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기 바로 직전에 발도파는 “깊은 고요의 시기”를 만끽하기 시작했으며, 이탈리아 내 다른 어떤 사람들 못지않게 종교적 자유를 누리는 듯 보였다. 스노우 장로는 “그리하여 선교사가 임명되기 불과 얼마 전에 길이 열렸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어떤 지방도 이처럼 호의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 스노우 장로는 그 사람들에 관해 더 알아보려고 도서관에 가서 발도파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전했다. “신청서를 접수한 도서관 사서는 제가 문의한 내용을 담은 책이 있기는 한데, 바로 조금 전 대출이 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숙녀분이 그 책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사서는 ‘참 특별한 경우군요, 이 신사 분이 마침 이 책을 찾고 계셨는데.’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곧 발도파가 이탈리아 내에서 복음을 처음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스노우 장로와 동반자들은 발도파 사람들이 거주하는 피에몬테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먼저 우정을 쌓고 신뢰를 얻는, 조심스러운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 후 발도파 사람들과 훌륭한 관계를 맺었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근처 산으로 올라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후, 이탈리아 땅을 선교 지역으로 헌납하는 기도를 올렸다. 또한 주님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으며, 스노우 장로는 동반자들이 책임을 잘 수행하도록 신권 축복을 주었다. 그 산에서 경험한 일로 영감을 받아 스노우 장로는 그곳을 브리검 산이라 불렀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거의 두 달이 지났을 무렵, 한 사람이 교회에 가입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1850년 10월 27일, 선교사들은 드디어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침례와 확인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어 무척 기뻤다. 후에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보고했다. “이곳 일은 느려서 따분할 정도입니다. …… 그럼에도 교회는 세워졌습니다. 나무가 심어져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스노우 장로는 자신이 이탈리아에서 행하는 선교 사업의 성격을 알 수 있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그는 친구들과 낚시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큼직하고 멋진 물고기들이 저 멀리까지 수면 위에 올라와 가득한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 물가에 그물이나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였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정지해 있는 듯 보였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끊임없이 움직였습니다. 그 정지해 있는 듯한 사람들 중 한 명 곁을 지나치려는 순간, 물고기가 제 낚시에 걸렸습니다. 저는 타인의 구역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고기를 낚아 올리면 그 사람이 언짢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 낚싯줄을 당기며 물가로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낚싯줄을 당긴 저는 매우 놀라고 낙담했습니다. 제 포획물이 너무나 볼품없었기 때문입니다. 귀하고 멋져 보이는 고기들이 그토록 많이 널려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 조그만 고기가 걸려들었는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비범한 물고기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모든 실망감이 사라졌습니다.” 스노우 장로가 꾼 꿈은 예언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많은 개종자를 보지는 못했으며, 후에 다른 선교사가 말했듯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부자도 지위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스노우 장로와 동반자들은 선하고 신실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데려오는, 주님이 쓰시는 도구였다. 그 사람들은 “새롭고 끝없는 생명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 것에 감사를 표했다. 또한 스노우 장로가 발휘한 지도력의 결과로 몰몬경이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그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후, 스노우 장로와 동반자들의 노고 덕분에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에 대해 제임스 이 파우스트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 중 일부는 솔트레이크밸리에 온 첫 번째 손수레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 그들의 후손 중 많은 이들이 새로 회복된 교회라는 포도원에서 수고했으며, 오늘날에는 이 세계적인 교회에 뛰어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선조가 믿었듯이 사도들에게는 결코 녹슬지 않을 열쇠가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세우다 스노우 장로는 후에 또 다시 선교 사업에 나섰으며,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으로서 “교회의 제일회장단의 지시 아래 …… 교회를 세우며, 모든 나라에서 교회의 제반사를 조정하[는]”(교리와 성약 107:33) 일에 종사하며 자신의 부름을 영화롭게 했다. 1853년에 브리검 영 회장은 로렌조 스노우에게 유타 북부 박스엘더 카운티에 있는 정착지로 일단의 가족들을 인도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기존에 있던 정착지는 규모도 작고, 체계적이지 않았으며, 정체된 상태였다. 스노우 장로는 곧장 일에 착수하여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가르친 헌납의 법 원리에 따라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조직했다. 사람들은 번성하는 도시를 이룩했고, 스노우 장로는 영 회장을 기리기 위해 그 도시를 브리검시티라고 칭했다. 시민들은 함께 일하고 서로 돕는 가운데 학교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공장을 세웠으며, 관개 체계를 갖추고, 상업 조직을 조직하고 연극 모임까지 만들었다. 그들은 헌납의 법을 온전히 실행하지는 못했지만 그 원리에 따라 인도되었으며, 하나의 공동체가 협동과 근면을 통해 어떤 성취를 거둘 수 있는지를 보여 주었다. 스노우 회장의 딸인 레슬리는 이렇게 기록했다. “브리검시티에는 게으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활력과 번영이 넘치는 시기였는데, 정착지 역사상 이 도시에 필적할 만한 곳은 이 주에서는 없었을 것입니다.” 스노우 장로 가족은 여러 해 동안 브리검시티에서 살았다. 스노우 장로는 그곳 성도들을 감리하며 틈날 때마다 다른 곳에서 단기간으로 선교 사업을 했다. 1864년에 스노우 장로는 당시 또 한 명의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이었던 에즈라 티 벤슨 장로와 그 밖에 조셉 에프 스미스 장로, 앨마 스미스 장로, 윌리엄 더블유 클러프 장로를 대동하고 약 3개월의 단기 선교 사업을 하기 위해 하와이 제도로 떠났다. 1872~1873년에는 몇몇 사람과 함께 제일회장단 제1보좌인 조지 에이 스미스 회장을 보좌하며 이스라엘을 위시한 중동과 유럽 일부 지역을 9개월 동안 여행했다. 이 여행은 브리검 영 회장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는데, 영 회장은 그들의 의로운 영향력을 통해 다른 나라들도 회복된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를 소망했다. 1885년에 스노우 장로는 미합중국 북부와 와이오밍 주에 거주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방문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8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그는 그 지방에 선교부를 세웠으며, 침례와 확인을 받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교회 지도자들을 조직했다.
성전 사업 제7대 교회 회장인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은 로렌조 스노우 회장이 “그의 생애 중 여러 해를 성전에서 일하는 데 바쳤다.”고 말했다. 개종 초기부터 시작된 성전 사업에 대한 스노우 회장의 애정은 사도로 봉사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는 침례와 확인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커틀랜드 성전 모임에 참석했으며, 후에는 나부에 성전을 짓기 위한 헌금을 모으라는 부름에 열정적으로 임했다. 그는 나부 성전이 지어지자 의식 집행자로 봉사하며 성도들이 서부로 대장정을 떠날 때까지 엔다우먼트와 인봉 의식이 집행되도록 도왔다. 성전에 관한 로렌조 스노우의 책임은 사도로 부름 받으면서 계속되고, 더 확대되었다. 그는 유타 로건 성전 헌납식에서 말씀했으며, 윌포드 우드럽 회장이 유타 맨타이 성전을 헌납한 다음 날 열린 모임에서 헌납 기도문을 낭독하기도 했다. 솔트레이크 성전 맨 꼭대기 첨탑에 관석이 놓일 때에는 많은 성도들과 함께 호산나 외침을 인도했다. 솔트레이크 성전이 헌납되었을 때 그는 초대 성전 회장으로 부름 받아 봉사했다. 스노우 회장이 팔순을 맞은 날, 한 지방지는 이런 찬사가 담긴 기사를 실었다. “황혼을 넘긴 나이에도 스노우 회장은 지금까지 생애를 바쳐 온 위대한 대업을 수행하느라 여전히 바쁘고 열심히 일한다. 그는 성스러운 성전 경내에서 동료들과 더불어 자신을 바친 영광스러운 과업, 즉 죄와 죽음으로 고통받는 이 세상에 그토록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사람들을 보살피다 스노우 회장은 이곳 저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도 시간을 내어 개인과 가족들을 보살폈다. 한 예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 봉사하던 시절인 1891년 3월에 브리검시티에서 열린 어느 대회에서 말 씀을 전할 때 있었던 일화를 들 수 있다. 설교 도중 쪽지가 단상 위에 놓여졌다. 한 목격자에 의하면 스노우 회장은 “말씀을 멈추고 쪽지를 읽은 다음, 깊은 슬픔에 잠긴 누군가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이 그 쪽지에 담겨 있음을 성도들에게 설명했다.” 그런 뒤 스노우 회장은 양해를 구하고 연단을 내려갔다. 그것은 제이콥 젠슨이라는 브리검시티 주민이 보낸 쪽지였는데, 딸 엘라가 성홍열로 일주일 동안 발작을 일으키다가 그날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젠슨 형제는 단순히 스노우 회장에게 딸의 죽음을 알리고 장례를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려고 쪽지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스노우 회장은 말씀을 중단하고 감리하던 모임을 뒤로한 채 즉시 그 가족을 방문하길 원했다. 스노우 회장은 모임 장소를 떠나기 앞서 당시 박스엘더 스테이크 회장이던 루저 클로슨을 불러 함께 가자고 했다. 제이콥 젠슨은 스노우 회장과 클로슨 회장이 자신의 집에 도착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노우 회장님은 엘라의 침대 곁에 일이 분가량 서 계시더니 집에 성별된 기름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저는 무척 놀랐지만 예라고 대답하고 기름을 갖다 드렸습니다. 회장님은 클로슨 형제님께 기름병을 건네시더니 엘라를 위해 기름 부음 의식을 하도록 요청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스노우 회장님]은 기름 부음을 인봉하며 축복을 주셨습니다. 의식이 집행되는 동안 저는 그분이 말씀하신 언어에 특히 감동을 받았으며, 지금도 그것을 기억합니다. ‘엘라,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돌아와 깨어날지어다. 그대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도다. 그대가 위대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대의 생명이 보존될지니라.’ 회장님은 엘라가 살아남아 대가족을 양육할 것이며 부모와 친구들에게 큰 위안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직도 그 말씀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 …… 스노우 회장님은 축복을 마친 후 아내와 저를 향해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더는 슬퍼하거나 비통해하지 마십시오. 잘 될 겁니다. 클로슨 형제와 저는 바쁘기 때문에 더 머무르지 못하고 가야만 합니다. 허나 두 분은 조금만 참고 기다리십시오. 모든 게 잘 될 테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
스노우 회장님이 축복을 주신 후에도 엘라는 한 시간이 넘도록 그 상태로 누워 있었습니다. 사망한 지 세 시간이나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아내와 제가 침대 곁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이가 눈을 떴습니다. 엘라는 방안을 둘러본 후 앉아 있는 저희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누군가를 찾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디 계시죠? 그분이 어디 계시냐고요?’ 저희는 ‘누구 말이니? 어디에 누가 있다는 거니?’ 하고 물었고, 앨라는 ‘그야, 스노우 형제님이죠. 돌아오라고 절 부르셨잖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영의 세계에 간 엘라는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그곳에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엘라는 스노우 회장의 음성에 순종했다. 바로 그날부터 엘라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 주었다. 후에 엘라는 결혼하여 여덟 자녀를 두었으며 교회에서 충실히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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