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마틴 해리스가 몰몬경 번역본 116쪽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교리와 성약 3:6~8, 12~13 참조) 조셉은 한동안 번역할 특권을 잃었으며 자신의 불순종으로 비탄에 잠겼다.1 그가 겸손해져서 주님께 용서를 구했을 때 구주께서는 조셉에게 다음과 같은 확신을 심어 주셨다. “기억하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니 …… 너는 아직도 택함을 받고 있나니, 다시 그 일에 부름을 받느니라.”(교리와 성약 3:10) 제일회장단 제2보좌인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그분은 삶과 [자비에 관한] 가르침에서 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악한 자, 저속한 자,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해를 입히려 한 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2 경전에서 우리는 자비로움이 구주의 신성한 성품 중 하나임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셨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7),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누가복음 6:36). 자비는 연민으로 정의되며 동정, 친절, 용서, 사랑의 감정과 행동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이 뜻하지 않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종종 자비를 베풀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한 자비를 보여 주셨다. 그분은 “사람들의 혼란, 곤혹스러움, 불행을 보면 언제나 마음 아파하시며 그들을 바라보셨다. ……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힘 없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실 때면 그분의 마음은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해졌다.”4 신약전서에 기록된 다음 원리들은 구주께서 어떻게 자비를 베푸시며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지 않으심으로써 자비를 보이셨다. 배반당하기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에서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함께 들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을 때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는 아니지요”(마태복음 26:21~22) 하고 여쭈었다.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한복음 13:27)고 대답하셨다. 그 후 겟세마네 동산 입구에서 예수님과 유다는 다시 마주쳤다. 유다는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마태복음 26:49)라며 구주께 입맞춤을 했고 예수님은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누가복음 22:48)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대답이 유다를 그가 한 행동의 결과에서 구제해 주신 것은 아니었으나 그를 비난하지 않으신 채 대신 옳고 그름에 관한 유다의 분별력에 호소하셨다. 로마 병사들의 손에 투옥되고, 매를 맞고, 채찍질당하고, 예루살렘 성내를 강제로 걸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마침내 거기서 못박히는 시간을 견디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한 이들을 자비롭게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간청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비난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비를 보이셨다. 성역 초반에 예수님은 여행 길에, 사마리아의 한 우물가에서 잠시 쉬며 원기를 되찾고자 발걸음을 멈추셨다. 한 여인이 물을 길어 가고자 우물가로 다가오자, 구주께서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여인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아니[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을 거신 것에 놀랐다. 주님은 사람들이 그녀를 업신여겼던 그 전통을 무시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복음의 생수에 대해 가르치셨고 이렇게 간증하셨다. “네게 말하는 내가 [메시야]라”(요한복음 4:3~39 참조). 베뢰아에서 베푼 성역 막바지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시던 길에 여리고 성을 지나게 되셨다. 키가 작고 부유한 삭개오는 구주가 지나가실 때 그분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발견하시고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은 그 결정에 대해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며 불평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의 선량함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누가복음 19:1~10 참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용서받을 기회를 많이 주심으로써 자비를 베푸셨다. 성역 초기에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 있는 회당으로 가셨다. 그곳은 그분이 여러 차례 예배를 드렸던 회당이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사야가 메시야에 대해 예언한 부분을 읽어 주셨다. 그런 후 그들에게 자신이 그 메시야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크게 화가 나서”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 산 낭떠러지[에서] …… 밀쳐 떨어뜨리고자 [했다.]”(누가복음 4:16~30 참조)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그분을 적대시하게 되었다. 얼마 후,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다시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들은 또다시 그분에게 화를 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해하도록 두 차례나 노력하셨다.(마태복음 13:54~57 참조) 유대인 지도자들은 구주의 가장 큰 적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에 위협이 되었던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여러 번 촉구하셨다. 경전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특히 이 지도자들에게 적어도 열 번의 중요한 설교를 하시며 그들의 죄를 밝히시고 회개하도록 권하셨다. 예수님은 반감을 피함으로써 자비를 베푸셨다. 예루살렘은 구주께서 결국 고통을 당하고 돌아가신 곳이다. 그분은 그 도시와 예루살렘 백성에 대해 분개하고 화를 내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종종 그들의 사악함과 회개하지 않는 태도를 가슴 아파하셨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며칠 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그분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이 환호를 보내고, 옷을 벗어 그분 앞에 깔며 하나님을 찬양했다.(누가복음 19:28~38 참조)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충절이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분은 지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에 예루살렘을 내려다보고 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태복음 23:37; 또한 누가복음 19:41~44 참조) 불과 며칠 후, 군중은 예수님을 등졌고 그분을 죽이라고 아우성쳤다. 구주께서 십자가형을 당하시러 끌려가셨을 때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누가복음 23:27~28)고 말씀하셨다. 대중 앞에서 굴욕을 당하시고 예루살렘 백성의 손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음에도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분노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려는 것 때문에 슬퍼하셨다.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도움으로써 자비를 베푸셨다. 어느 여행 길에서 예수님은 나인 성을 향하시다가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것을 보셨는데, “[죽은]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다.]”(누가복음 7:12)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그의 저서 예수 그리스도에서 잇따라 일어난 기적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님은 이제 남편과 아들을 다 잃게 되어 슬픔에 잠긴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그녀의 슬픔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울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죽은 자가 누워 있는 관에 손을 대시니 …… 그는 시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때 그 죽은 자는 만민의 주 되시는 그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다. 예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그 청년을 그의 어머니에게 되돌려 보내셨다.”5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는가 하면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기도 했다. 그분은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낫게 하시고 말 더듬는 사람과 나병환자 열 명을 고쳐 주셨다. 그들은 모두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구주께서는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을 보여 주셨다. 우리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많이 줌으로써, 증오하지 않음으로써,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자비를 베풀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진 많은 자비를 인식하고 기억할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법을 더 많이 배우게 될 것이다.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은 이렇게 권고했다. “우리의 완고함과 비통함, 분노로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을 더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는 이미 슬픔과 고통이 충분히 있습니다. …… 우리는 불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 그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6 부활하신 주님은 미대륙의 니파이인들을 방문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떠날 시간이 되자 예수님은] 그 눈을 들어 무리를 다시 둘러보시고, 그들이 눈물을 머금은 …… 것을 보시더라. 이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보라, 나의 심정은 너희에 대한 측은함으로 가득하도다. 너희 가운데 병든 자가 있느냐? 그들을 이리로 데려오라. …… 내가 그들을 고쳐 주리라. 이는 내가 너희를 측은히 여김이요, 나의 심정이 자비로 충만함이라.”(제3니파이 17:5~7; 강조체 추가) 그분의 자비는 무한하다. 우리가 그분께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를 자비라는 신성한 은사로 축복하실 것이다.(모로나이서 10:32 참조) ◼ 랜디 엘 데이벨(2013-9) 글쓴이는 미국 뉴욕에 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