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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신앙·간증

통가-하나님께 헌납된 땅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0.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가 미국 뉴욕 주에서 조직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드넓은 태평양의 한 섬나라 왕국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839년 통가의 국왕 조지 투포우 1세는 그의 나라와 백성과 후손을 하나님의 보호 아래 맡기기로 결의했다. “나의 유산은 하나님과 통가이다”라는 왕의 선언이 통가의 모토가 되었다. 이러한 유산이 있기에 통가에서 종교는 지대한 역할을 한다. 오늘날까지 모든 통가인은 안식일을 예배의 날로서 지킨다.

최초의 선교사들
사모아 선교부의 선교사였던 브리검 스무트 장로와 알바 버틀러 장로는 통가 제도에 회복된 복음을 전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891년, 통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조지 투포우 1세를 알현했으며, 왕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고무된 기대감으로, 더 많은 선교사가 통가 제도로 부름을 받아 열정적으로 복음 전파에 나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통가에서 교회의 성장은 하와이, 뉴질랜드, 사모아와 같은 다른 폴리네시아 섬들에서만큼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1897년, 선교사들은 사모아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통가에 있는 소수의 개종자들은 한동안 교회 지도자들 없이 지내게 되었다.기억된 백성“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인 내가 …… 바다의 섬들 위에 있는 자들을 기억한다는 것[을] …… 알지 못하느냐?”(니파이후서 29:7)
주님은 섬 왕국 통가의 성도들을 잊지 않으셨다. 1907년, 히버 제이 맥케이 장로와 더블유 오 페이서 장로가 바바우 네이아푸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지부와 작은 학교를 이끌기 시작했다. 머지 않아 선교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몇 년 동안 통가 제도 곳곳에 여러 개의 지부와 교회 학교가 설립되었다.
세계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교회는 통가에서 어느 정도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복음이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선교 사업이 꽃을 피우자 통가의 현지 회원들도 교회 지도자로 부름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기간처럼 외국인들이 통가를 떠나는 일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해서 번창할 수 있었다.
연대표
► 1839년: 조지 투포우 1세가 기독교에 문호를 개방함.
1891년: 최초의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통가에 파견됨.
1892년: 최초의 개종자인 알리파테가 침례와 확인을 받음.
1897년: 선교부가 폐쇄되고 선교사들이 사모아로 돌아옴.
◄ 1907년: 선교 사업이 재개되고 교회가 네이아푸에 학교를 개설함.이 학교가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기독교 문명”을 건설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치하했다. 학교가 설립된 이후로 수천 명에 달하는 리아호나 고등학교 졸업생이 선교사, 교회 지도자, 저명한 지역 사회 지도자로서 봉사했다.
오늘날 통가에는 교회가 후원하는 두 개의 고등학교, 즉 주요 섬인 통가타푸 섬의 리아호나 고등학교와 바바우 섬의 사이네하 고등학교가 있다. 아울러 통가타푸, 에우아, 하아파이에 있는 학교들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중학교도 교회의 후원을 받고 있다.
성취된 예언
데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과 부인 에머 레이 자매가 1955년에 통가를 방문했을 때, 성도들은 맥케이 회장 내외를 왕족처럼 대우했다. 교회 회장이 통가 제도를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통가타푸와 바바우를 방문하는 짧은 여정 중에 맥케이 회장 내외는 회원들과 여러 모임에 참석했으며, 통가 성도들이 음악과 춤을 공연하고 말씀을 전하고 연회를 베푸는 모습에서 성도들의 사랑과 헌신을 느꼈다. 맥케이 회장은 바바우의 성도들을 방문하는 동안 “이 섬들 중 한 곳에 성전이 세워져서 교회 회원들이 그곳에 가서 하나님의 성전이 주는 축복을 받는” 시현을 보았음을 알려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다. 한 회원은 통가인들이 보인 반응을 이렇게 기록했다. “모든 청중이 울음을 터트렸다.”
거의 30년 후인 1983년 8월, 당시 제일회장단 보좌인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이 통가 누쿠알로파 성전을 헌납했다.당시 십 대 소녀였던 나는 제도 외곽의 섬들에 사는 후기 성도들과 해외에 나가 있던 통가인들이 이 특별한 행사에 참여하려고 모였던 때를 기억한다. 나는 헌납식에 참여하여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누렸다. 힝클리 회장의 말씀을 들을 때 느꼈던 따뜻한 느낌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소리 모아 ‘호산나 찬송’을 부를 때, 주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알 수 있었다.
구주께서는 언제나 바다의 섬들 위의 백성을 기억하셨으며, 바로 그날 맥케이 회장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주님의 집 재헌납
계속되는 교회의 성장에 따라 성전은 약 2년 동안 문을 닫고 개조에 들어갔다. 다른 여러 작업과 함께 의식실이 확장되었고, 인봉실이 추가되었으며, 벽과 천정에 폴리네시아 전통 문양이 더해졌다.
2007년 초, 남편과 나는 성전 재헌납을 위한 문화 행사를 연출하라는 임무에 지명되었다. 그 행사는 재헌납식 전날인 11월 3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통가타푸의 여러 스테이크 청소년들을 되도록 많이 참여시키고, 다음날 열릴 성전 헌납을 위해 성도들을 영적으로 준비시킬 만한 공연을 기획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이 행사는 통가 외곽의 섬들뿐 아니라 세계 각처의 통가인 스테이크에도 라디오 및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될 예정이었기에,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막중한 임무였다.
그 행사의 제목은 “영원한 보물”로 정해졌다. 공연은 통가 하와이, 타히티, 뉴질랜드, 피지, 사모아의 전통 무용으로 구성되었다. 그 공연의 줄거리는 어린 자녀를 잃은 부부가 상실감을 달래 줄 보물을 찾아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을 찾아 다니는 것으로 시작됐다. 두 사람은 가는 섬마다 보물을 찾기는 했지만, 그러한 것들이 두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지는 못했다. 그 부부는 통가로 돌아온 후 선교사들에게서 복음을 소개받고 “영원한 보물”, 즉 영원한 가족과 또 먼저 떠난 자녀와 장차 다시 결합하게 되는 축복에 대해 배우게 된다.
재헌납식이 예정되어 있던 주 내내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11월 2일, 마지막 총연습을하는 날에도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면, 날씨를 좋게 해 주셔서 통가를 위해, 또 위성방송으로 지켜볼 모든 사람과 특별히 선지자를 위해, 공연에 지장이 없게 해 주시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밤에도 비가 몹시 내렸고, 다음 날 아침 날씨도 여전히 궂어 보였다.
토요일 저녁, 힝클리 회장의 건강 문제로 대신 성전 재헌납을 위해 방문한 십이사도 정원회 러셀 엠 넬슨 장로의 말씀을 듣고자 3천 명의 청소년들이 테파이바 경기장에 모였다. 나는 그날의 공연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일이 제대로 진행되었다. 날씨는 완벽했고, 전에 고장을 일으켰던 음향 시스템도 수리되어 훌륭했으며, 춤을 추는 청남 청녀들은 마음을 담은 공연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기적을 목격했다. 하나님아버지께서는 그분 자녀들의 기도를 듣고 비를 멀리 잡아 두셨다. 동시에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야말로 영원히 지속되는 보물이며, 성전은 그런 축복을 가져오기 위해 지어진다는 것을 회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다음 날 진행될 성전 재헌납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주님께 헌신하는 백성
지금까지도 통가의 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으며, 통가인 지도자들이 교회를 이끌고 있다. 제도 전역에 수많은 예배당이 세워졌고, 선교사들이 늘어나 이 사업을 서두르고 있다. 굳건히 자리한 교회 학교들은 용감한 선교사와 미래의 지도자, 합당한 어머니와 아버지들을 계속 길러 내고 있다.
이제 회원들은 연차 대회를 보기 위해 배를 타고 긴 여행을 하여 본도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기술의 도움으로 소속 스테이크 내에서 연차 대회 및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
통가의 해안에 다다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성도들은 신앙의 유산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175년 전에 하나님께 맡겨진 백성이다. 그들은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자신들의 삶과 모든 소유를 주님께 헌납하고 있다. ◼

(하발린 케이 세코나 통가 리아호나 중학교 교장 20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