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실로 이같이 주가 이르노라. 이는 나의 종 데이비드 더블류 패튼이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그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그의 상품을 처분하여 내년 봄에 다른 사람들 곧 그를 포함하여 열둘이 온 세상에 나의 이름을 증거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나를 위하여 수행할 수 있게 함은 그에게 현명한 일이니라.
1838년 가을, 패튼 장로에게 선교 사업을 준비하라는 명이 담긴 계시가 있은 지 6개월 후, 그는 미주리 중서부의 성도 정착촌 근처에 위치한 크룩트강 전투에 참전했다. 1838년 10월 25일에 폭도들이 회원들에게 그 주를 떠날 것을 요구하면서 성도들의 집을 공격하고 세 명의 남성들을 사로잡아 갔다. 폭도들이 포로들을 그날 밤 살해할 것이라는 보고를 들은 성도들은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민병대를 두 그룹으로 조직했다. 데이비드 더블유 패튼 장로는 그중 한 그룹을 이끌었다. 거의 새벽 무렵, 패튼 장로가 이끄는 민병대가 강을 건너기 위해 크룩트강으로 다가갔을 때, 근처에 숨어 있던 폭도 중 누군가가 총을 발사했다. 교전이 일어났으며, 패튼 장로를 포함하여 양쪽 진영에서 여러 부상자가 생겼다.
패튼 장로는 몇 시간 후 사망했다. 그는 한때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게 순교자로서의 죽음을 맞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할 만큼 회복된 복음에 대한 신앙이 강했다. “그 말에 크게 감명 받은 선지자는 데이비드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슬픈 마음을 격려했다. ‘형제님과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은 어떤 것이든 주님께 구하기만 한다면 그것을 꼭 얻게 될 것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이틀 위에 파웨스트에서 있었던 패튼 장로의 장례식에서 조셉 스미스는 그를 이렇게 칭송했다. “자신이 항상 말해 왔던 그대로 행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
패튼 장로는 죽기 전에 충실하게 선교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부 회원들을 포함하여 충실하지 않았던 그의 동료 성도들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더블유 패튼 장로는 죽어 가면서 이렇게 외쳤다. “오 그 사람들이 나처럼 했었더라면!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내 앞에는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나를 위하여 예비하신 면류관이 놓여 있노라”[디모데후서 4:7~8 참조]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건, 부디 믿음만은 부인하지 마시오.”(Life of David W. Patten, 69에서 히버 시 킴볼이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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