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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회사·경전 안내

몰몬교의 적응과 발전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8.

교회를 새로운 시대로 이끌면서 많은 변화를 일으키게 한 것은 제5대 회장인 로렌조 스노우(Lorenzo Snow)였다. 이후 교회는 미국 문화의 본류(本流) 속에 스며들면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에 무섭고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많은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19세기 기간에 고난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자기들의 훌륭한 장점들을 잃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몰몬(후기성도)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면서 융합 되는 과정은 항상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다른 사회와 격리되어 독특한 문화를 창조해 왔기 때문에 그 중 많은 몰몬신자들은 새로운 사고를 갖는 것이 어려웠다. 게다가 낡은 화제들, 특히 일부다처와 같은 이야깃거리는 몰몬들의 사회진출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

 일부다처는 몰몬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여러 가지 출판물에서 불을 붙이는 기름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몰몬과 비(非)몰몬이 점점 자주 접촉하게 됨에 따라 부정적인 이미지는 점점 사라지고 수용과 협력의 분위기가 번져갔다.

 20세기가 열리면서 로렌조 스노우 대관장은 커다란 시련을 겪고 새 시대를 맞아 한없는 가능성을 추구하는 성도들을 희망찬 눈으로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였다.

 나는 20세기에는 위대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새벽에 나는 손을 들어 지상의 주민들에게 하늘의 축복을 내리고자 합니다. 머리 위로부터 내리는 햇빛이 여러분에게 환한 웃음을 가져다 주기를 빕니다. 유타의 산맥에 있는 몰몬 신자들의 음성이 온 세계에 퍼져 나가서 모듬 사람들이 우리 소망과 우리 사명이 온 인류를 구원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기 바랍니다. 20세기는 모든 시대 중 가장 행복한 시대가 되고 죄와 슬품과 고통과 죽음을 이기면서 승리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세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교회는 20세기 전반에 28만명의 회원에서 거이 1백10만명 회원으로까지 성장했다. 이 성장은 지역교회의 숫자를 계속 늘리고 교구와 선교부의 수를 계속 증가시켰다. 교회는 전도와 선교사업을 가장 큰 임무라고 강조해 왔으며 이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몰몬 신자들은 부활 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을 늘 마음속에 새기며 생활하고 있다.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선교사업은 20세기에 들어와 계속적으로 발전하여 매년 선교사로 떠나는 성도들이 늘고 전도하는 지역이 증가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 개종자들이 생겨났으며 다음에는 독일어를 쓰는 나라로 뻗어 나갔다. 교회는 1901년 일본에도 선교부를 세웠다. 이것은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으로 나중에 대관장이 된 히버 제이 그랜트(Heber J. Grant)의 노력이었다.

 교회 회원수가 늘어나자 교회는 앞으로의 성장을 다지기 위한 제도와 조직을 강화하는 내부 결속의 시기를 맞았다. 지역의 교구장이나 감독에게 더 많은 의사결정 권한이 주어지고 교회내의 여러 연령그룹을 지원하기 위한 보조 조직들이 더 생겨났다.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회(Primary), 젊은이을 위한 상호향상회(Mutual Improvement Association)등이 그것이다.

 소년들과 성인을 위한 신권 정원회도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부인들을 위한 상호부조회는 계속적으로 활기 있는 조직이 되어 부인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상호부조회는 다양한 지역사회 활동과 구호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사회사업과 공공적인 구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상호부조회는 1929년에 시작된 대공황 기간동안에는 특히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20세기 초 교회는 주로 록키산맥 지역의 교회였다. 미국의 다른 지역과 해외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이 때까지도 유타 이주를 독려했는데 시온에 집합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많은 개종자들의 마음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기에 교회가 세계적인 종교로 진로를 정하면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Joseph F. Smith) 대관장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지역의 성도들에게 미국으로 이주하지 말고 자기나라에 남아서 교회를 튼튼히 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했다. 1921년 공식적인 발표문에서 대관장단은 선교사들이 앞으로 미국 이주를 권고하지 않도록 당부하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전 건설은 집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주를 권하지 않는 대신 각 지역의 성도들에게 지역마다 성전이 건설되어 다른 나라에 가지 않고도 성전의식을 행하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1921년의 발표문에서 대관장단은 교회 회원이 자기 나라에 남아 교회를 강하게 하고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 방침은 그 때부터 변하지 않고 유지되었으며 1974년에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외부의 비판과 오해 속에서도 (20세기 초에는 특히 그러했다) 교회는 내부의 변화와 성장을 계속하면서 20세기 전반을 눈부시게 개척해 나갔다. 또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짐으로써 교회 내에는 해결해야 할 많은 문제점들이 생겨났다. 제2차 대전 후에 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엄청나게 빠른 세계적 성장에 따른 도전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몰몬이 미국 사회와 문화의 주류에 적응하고 수용되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그 출발점을 끊은 사람은 유타 출신 연방 상원의원 리드 스무트였다. 그는 1903년에 워싱턴 정계에 진출하여 25년 동안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지도자로 일했다. 그는 통상관세정책의 기수로서 재계 실력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리드 스무트 보다 나중에 유타주 출신 연방 상원의원으로 윌리암 킹이 민주당 출신으로 워싱턴에 진출하여 1917년부터 1941년까지 정치가로 명성을 날렸는데 그는 워싱턴시를 관장하는 위원회의 위원장을 오랫동안 지낸 경력으로 인해 워싱턴시의 비공식 시장으로 불리 울 정도였다.

 리드 스무트와 윌리암 킹은 수 많은 젊은 후기성도들이 워싱턴의 정계와 관청과 공공기관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이 시작되었을 때 수 많은 몰몬 신자들이 워싱턴으로 진출하였다. 뉴딜정책의 경제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연방정부 재무장관과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지낸 마리너 에클스의 뒤를 이어 많은 몰몬신자들이 뉴딜정책을 시행하는 기관의 요직에 임명되어 정책을 성공시켰다. 대표적으로 프랭클린 리차즈(Franklin D. Richards)는 연방주택청(Federal Housing Authority) 청장을 맡았고 진 메릴(Gene Merril)은 연방통신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ttee)의 위원장을 맡았다.

 재미있는 것은 몰몬교회는 한편으로 반(反)뉴딜적인 복지사업을 자체적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전국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성도들을 뉴딜정책을 집행하는 행정부에서 일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 된 것이다.

 제2차대전 후에 워싱턴에 진출하는 몰몬신자들은 세갈래로 나누어져 영향력을 키워갔다. 첫번째는 상원의원 왈라스 베네트(Wallace F. Bennett)계열이 있었다. 베네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상원의 지도자인 에버렛 더크슨(Everett Dirksen)을 움직여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 총재에 뉴욕주 출신 제이콥 재비츠 상원의원이 추천한 록펠러 계열 인물을 제치고 몰몬신자를 임명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두번째는 에즈라 테프트 벤슨이 이끄는 농무성을 중심으로 한 관청 계열이 있었다. 벤슨이 장관을 지내던 1954년에서 1962년까지의 농무성은 당시 세계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벤슨은 농업 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수의 유능한 후기성도들을 보좌관으로 썼다. 그는 동시에 위싱턴의 종교계를 주름잡았다. 그의 뒤를 이어 유명한 실업가인 윌러드 매리오트(J. Willard Marriot)가 워싱턴을 본거지로 호텔사업을 크게 일으켰다.

 세번째는 윌킨슨 크래건 바커 법률회사(Law Firm of Wilkinson, Cragun and Barker) 계열이 있었다. 윌킨슨은 대법원 판사를 지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Felix frankfurter) 밑에서 일했으며 나중에 영향력 있는 법률회사를 세워 인디언 문제와 교회에 관련된 법률문제를 많이 다루었는데 유능한 젊은 변호사들을 대대적으로 키워냈다.

 1947년에 교회 회원수는 1백만명을 돌파하였으나 이것은 그 이후의 눈부신 발전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