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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회사·경전 안내

시련과 몰몬에 대한 처절한 박해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8.


조셉의 동생인 사무엘(Samuel)은 새 교회의 첫번째 선교사가 되어 몰몬경을 가지고 전도여행을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에게 이 새로운 복음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가장 많은 개종자가 생긴 것은 네 사람의 선교사가 미주리주의 서쪽 경계에 있는 인디안들에게 전도여행을 갔을 때였다. 중간에 선교사들은 오하이오주를 지나갔다. 선교사 중 하나인 팔리 피 프래트(Parley P. Pratt)는 몰몬경을 자기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였던 시드니 리그던(Sidney Rigdon)에게 몹시 전하고 싶어했다.

 시드니 리그던은 처음에는 몰몬경에 쓰여진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으나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장소로 자기 교회 건물을 사용하고 자기 회중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의 메시지를 주의 깊게 듣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허락하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시드니 리그던은 새로운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 침례를 받겠다고 자청했다. 네 선교사들이 인디안에게 전도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1백30명의 백인 개종자가 생겨났다.

 시드니 리그던은 뉴욕주로 여행해서 조셉 스미스를 만났다. 그는 조셉 스미스의 가까운 친구가 되었으며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열정적인 전도와 설교로 회원들을 인도하고 더 많은 개종자를 내게 하였다.

 사방에서 교회 회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조셉 스미스는 모든 회원을 한 곳에 모으는 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아히오주에서 제일 많은 개종자가 나왔기 때문에 오하이오는 가장 좋은 집합의 장소로 생각되었다. 1830년 12월 조셉과 시드니는 오하이오 뿐만 아니라 뉴욕주의 회원들을 위한 계시를 받았다.  교회 회원은 오하이오주에 다같이 모일 필요가 있느니라

 오하이오주로의 말일성도 집합은 조셉과 그의 아내 엠마가 1831년 2월에 커틀랜드에 이주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커틀랜드는 교회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고 여기서 충만한 복음의 회복이 계속 진행될 수가 있었다.

 성도의 집합은 교회 역사를 통해서 주요한 과제가 되어왔다. 물론 그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지기는 했다. 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교회 회원들이 함께 집합하는 장소는 다른 세계로부터의 피난처로 생각했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재림전인 말일의 파괴와 악으로부터 보호를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집합의 뜻은 한곳에 모이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게 되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회원들로 하여금 어떤 나라나 어떤 지역에 살든지 함께 힘을 모아 지역의 교회를 강화시키도록 촉구하고 있다.

 오하이오주에서의 첫번째 집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조셉 스미스는 가능한 다른 집합장소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있었다. 1831년 여름 미국 영토의 서쪽 경계였던 미주리주를 여행하고 나서 조셉 스미스는 미주리주 잭슨군의 인디펜던스가 새로운 성도들의 집합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7월에 미주리주가 성도들이 모이는 곳으로 지정하여 성별한 땅이며 그러므로 약속된 땅이며 시온의 도시를 세울 장소라는 계시를 받았다

 시온의 도시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믿음은 집합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성도들은 계시로서 앞으로 다가올 날은 어려움에 가득찬 날이 되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은 집합의 장소가 이런 시련을 막아주는 피난처가 되리라고 믿었다. 첫번째 집합 장소인 오하이오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조셉 스미스는 주님에게서 집합의 목적을 나타내는 다음 계시를 받았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너희 재산을 모아 이후에 내가 너희에게 지정할 상속의 땅을 구입하라. 그 땅은 새 예루살렘, 평화의 땅, 피난의 도시, 가장 높으신 이의 성도의 안전한 장소라 불리우리니 주의 영광이 그곳에 있을 것이요, 주의 무서움도 그 곳에 있어 악인들이 오지 아니할 것이요, 시온이라 불리우리라. 악인 가운데 있으면서 검을 들어 자기 이웃을 대적하려 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안전을 찾아 반드시 시온으로 도망하여 오리라.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로부터 시온으로 모여드는 자들이 있으리니 서로 싸우지 아니하는 유일한 백성이 되리라. 악한 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시온을 대적하여 싸우러 올라가지 말자. 시온의 주민은 두려운 백성인 까닭이라. 그런고로 우리가 감히 대적할 수 없도다 하리라. 의인이 모든 국민 가운데서 모여 영원히 기쁜 노래를 부르며 시온에 이르리라.

 새 예루살렘에 집합한다는 개념의 핵심은 배움과 주님의 계시와 의식집행을 위한 거룩한 장소인 성전을 짓는 것이었다. 조셉 스미스는 계시로써 미주리주에 성전 지을 터를 정하고는 오하이오로 돌아갔다. 집합의 중심지로 지정되기는 하였으나 미주리주는 실제로 교회 전체의 중심지가 되지는 못했다. 이후 몇 년간 성도들의 집합은 오하이오와 미주리의 두 곳에서 계속되었다.

 두 곳은 각각 다른 목적이 있는 듯이 보였다. 조셉 스미스는 미주리를 여러 번 방문하기는 하였으나 계속해서 오하이오의 커틀랜드에 살았으며 1838년까지 이 도시는 교회의 행정 중심지였다. 조셉 스미스는 이 곳에서 미주리 교회 일까지 지도하였으며 이 곳으로부터 선교사들이 미국의 여러 곳과 캐나다와 영국에까지 파견되었다.

 새 교회가 주장한 두드러진 가르침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자녀들에게 다시금 계시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성도들이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조셉 스미스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이유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예언자에게 자기 뜻과 가르침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조셉 스미스의  때로부터 지금까지 몰몬 신자들은 계시가 계속되고 있음을 믿으며 살아 있는 예언자가 자기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몰몬의 역사에서 조셉 스미스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직접적인 계시가 내리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예언자로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다.

 조셉 스미스는 광범위한 사물에 관한 계시를 받았으며 교회의 의식절차에서부터 깊은 교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에 대하여 성도들을 가르쳤다. 모든 성도들이 예언자로부터 이들 계시의 내용을 직접 들을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계시를 인쇄할 필요성은 대단히 컸다. 그래서 조셉 스미스는 계시를 정리해 나가면서 인쇄할 준비를 하였고 그 준비과정에서 새로운 계시를 받아서 보태었다.

 미주리주의 인디펜던스는 교회 출판 활동의 중심지였으며 계시의 내용은 올리버 카우드리와 존 휘트머(John Whitmer)에게 넘겨져 인쇄하도록 위임되었다.

 그러나 인쇄가 끝나기 전에 폭도 한 사람이 인쇄기를 파괴하고 이미 인쇄된 유인물 페이지를 사방에 흩어버렸다. 몇 사람의 성도들이 이 책(계명의 이라 불리웠음)의 흩어진 페이지들을 주워 모으려 하였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수집된 계시의 내용은 결국 1835년 오하이오의 커틀랜드에서 발행되어 교리와 성약 이라 불리워졌다. 이 때까지 조셉 스미스와 교회 지도자들은 이 책이 한층 완벽하고 유용한 것이 되도록 재검토하고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처음으로 교회의 모든 회원들은 그들의 예언자가 받은 계시의 내용에 쉽게 접근할 수가 있게 되었고 교리적 설명, 교회조직에 대한 가르침, 거룩한 성약에 대한 설명, 개인적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가르침 등등 확실한 인내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고대 경전(몰몬경)에 대한 번역과 새로운 경전(교리와 성약)의 편찬자로 일하면서 조셉 스미스는 성경에 대한 흥미가 함께 고조되었다. 교회가 조직된 그 다음 해에 그는 구약과 신약에 대한 깊은 연구와 더불어 오역이 되었거나 의미가 매우 불명한 부분에 대한 수정에 착수하였다. 3년 이상 이 일에 종사하면서 그는 성도들의 성경지식을 매우 크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교리 문제에 대하여도 명쾌하게 설명해 나갔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계시로 주어질 때 그는 이 내용을 교리와 성약에 실었다.

 교회의 행정 중심지는 오하이오였으나 미주리는 교회 발간 활동의 중심지였다. 교회는 그 곳에서 두 개의 정기간행물을 발간하였다. 둘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브닝 앤드 모닝 스타(Evening and the Morning Star)였는데 교회의 첫번째 신문이었다. 이 신문의 내용은 교회의 역사적 사건, 조셉 스미스의 계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교회활동, 교리에 관한 논문, 교회 지도자의 가르침 등이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 신문은 인디펜던스에서 1832년 6월부터 1833년 7월까지 발행되었으나 반(反)몰몬들이 인쇄기를 파괴하여 발간 활동을 커틀랜드로 옮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커틀랜드에서 1833년 12월 신문발행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1834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다음 달에 이 신문의 명칭은 말일성도의 전령과 대변자(Latter Day Saints Messenger and Advocate)로 바뀌었다.

 불행하게도 교회가 한층 널리 알려지자 그에 비례해서 커지는 적대감에 봉착하게 되었다. 새 교회가 지금까지의 교회와는 다른 교리와 의식을 전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조롱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고대 경전을 세상에 내놓은 조셉 스미스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고대기록에서 번역하였다기보다는 스스로가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어떤 성직자들은 몰몬교회가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새 교회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데 겁을 먹고 반대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교회 회원이 되었다가 개인적인 이유로 예언자에게 실망해서 아니면 그의 가르침에 실망해서 반대했다. 어떤 신자들은 이런 반대와 비판에 이끌려 교회에서 떨어져 나갔으나 오히려 남아 있는 자들의 신앙을 깊게 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자들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고난을 겪으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을 기억하면서 인내하였다.

 박해는 단순한 인쇄물에 의한 공격뿐만 아니었다. 반(反)몰몬 책자나 지어낸 루머가 일으킨 적대감으로 인하여 성도들에 대한 신체적 공격도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일어난 박해는 교회 조직 후 2년이 안 되는 1832년 3월 오하이오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검게 칠한 20명 이상의 폭도가 밤늦게 조셉 스미스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침대에서 끌어 내렸다. 폭도들은 또한 교회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시드니 리그던도 집에서 끌어내어 발뒤꿈치를 잡아 끌었다. 그는 얼어붙은 땅 위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엎어졌다. 이 부상으로 시드니 리그던은 여러 날 동안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폭도들은 수를 믿고 조셉 스미스의 옷을 벗기고 손톱으로 할퀴고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리고는 옴 몸에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온통 붙였다. 이런 짓은 적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창피를 주는 방법이었는데 말라버린 타르에서 깃털을 떼어내는 것은 무섭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질산 병을 입에 물려 이빨 한 개를 부러지게 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워도 조셉의 친구와 가족은 그날 밤에 타르를 때어냈다. 그 다음날인 일요일에 조셉이 설교를 할 때 참석한 회중의 한 사람은 전날 밤 그를 습격한 폭도를 이끈 사람이었다.

 성도들은 미주리에서 한층 심한 반대와 적대감에 부딪쳤다. 많은 수의 이주민이 갑자기 그 곳에 몰려들자 이 지역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민들은 위협을 느끼고 몰몬신자들을 자기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사람들로 보았다.

 많은 미주리 주민들이 몰몬 신앙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몰몬들로 부터 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위협을 느꼈다. 왜냐하면 새 이주민들은 조직력이 놀라워서 집단으로 단결하는 경우에는 지역경제를 움직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안되어 미주리 주민과 이주민 사이에는 갈등이 고조되었고 원주민들의 폭력을 불러일으켰다.

 1833년 여름 미주리의 몰몬 거주지에는 교회와 그 신자들에 대한 공공연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교회의 인쇄시설은 파괴 당했다. 교회 감독은 잡혀 타르 칠을 당하고 깃털이 붙여졌다. 더 큰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이 분명해졌다. 주민들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잭슨군을 떠난다는 서명을 하도록 강요했고 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떠날 준비를 하게 하였다.

 한편 지도자들은 주 정부와 법원을 상대로 폭력행위로부터의 보호를 요청했다. 이이서 그들은 폭도들의 폭력에 대항해서 보다 강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등 성도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미주리 주민에게는 몰몬들이 떠나려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같이 보였고 많은 주민들이 다시금 일어나 몰몬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두번째 일어난 폭력은 첫번째보다 한층 격렬했고 양쪽 모두 사망자가 생겼다. 게다가 몇몇 교회 지도자는 인디펜던스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미주리주의 부지사 릴번 보그스(Lilburn W. Boggs)는 몰몬들을 설득하여 지역 방위군에 무기를 양도하고 열흘 안에 지역에서 떠날 것을 제안하였다. 이 때 몰몬들은 방위군이 반(反)몰몬 주민들도 같이 무장해제를 시키리라고 믿었으나 그 제안은 계략이었다. 결과적으로 박해와 폭력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성도들은 아무 무기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였다.

 이미 성도들은 잭슨군을 떠나려고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주민들은 막무가내로 이들을 위협했다. 무기를 찾아낸다는 명목으로 집을 수색하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가하고 재산을 빼앗았다. 어떤 경우에는 몰몬 남자들이 떠날 준비를 하러 말과 마차를 모으러 나간 사이에 총으로 무장한 1백명이 넘는 미주리 사람들이 남아있는 여자와 아이들 1백30명을 위협하여 네 대의 마차에 자기들이 실어주는 물건만 싣고 두시간 안에 강제로 떠나게 하기도 하였다.

 잭슨군에 살았던 성도들의 반 이상은 미주리강을 건너 인접해 있는 클레이군(Clay County)으로 피난해 갔는데 집과 농장과 많은 재산을 그대로 남기고 떠났다. 이제는 클레이군이 미주리의 집합 장소가 되었다.

 몰몬들은 계속해서 주정부와 법원에 호소하여 살던 곳에 돌아가고 잃어버린 재산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보호와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주리 주지사는 동정을 하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오하이오의 몰몬신자들은 미주리의 성도들이 처참하게 당한 이야기를 듣고는 몹시 낙담했으나 미주리 성도들이 잭슨군에 다시 돌아오도록 지원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시온의 진영(Zions Camp)이라 불리는 준(準)군사조직을 구성하여 미주리로 행군하면 공식적으로 미주리주 정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백50명으로 구성된 이 그룹은 1834년 5월에 오하이오에서 미주리까지 1천6백km를 행군했다.

 다른 주들을 통과하면서 그들의 숫자는 2백5명으로까지 늘어났다. 미주리의 교회 회원들도(이 때는 주로 클레이군에 머물고 있었다) 역시 스스로 무장을 갖추게 됨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6월에 시온의 진영은 잭슨군 가까이에 진을 치고 사태를 관망하면서 필요한 경우에는 미주리 성도들을 힘으로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가지 일이 생겨서 충돌을 피할 수가 있었다. 첫번째로 시온의 진영은 미주리주 방위군으로부터 당초 예상했던 공식적인 승인을 얻을 수가 없었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1834년 6월 22일 조셉 스미스가 미주리주 시온의 진영 야영지에서 받은 계시였다. 이 계시에서 주님은 시온(이 때는 집합의 장소를 이렇게 불렀다) 즉시 구속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다. 이 계시는 폭력적인 미주리 주민을 꾸짖는 대신에시온의 구속은 나의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하여 지연되리라는 말씀이 그 내용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시온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완전하게 의로워야 할 성도들이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이 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하심이 결국에는 모두 이루어지나 그것이 어려운 현실로 인하여 지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운 날씨 가운데 그토록 먼 거리를 행군해 와서 아무런 결과도 없이 시온의 진영을 해산하게 된 것은 큰 좌절과 실망을 주는 일이었으나 성도들은 매우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다. 시온의 진영에 참여했던 몇몇 성도는 콜레라에 걸려 숨졌고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가 자기들을 잘못 인도했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시온의 진영은 조셉 스미스의 예언자적 사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는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후에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이 시온의 진영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서 나왔는데 이는 극심한 어려움과 논쟁과 단련을 거치면서 신앙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시온의 진영은 해산되었으나 커틀랜드에서 성전이 완성된 것은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집합이라는 것이 한 곳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여러 곳에서 분산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으나 성전의 건축은 성도들의 집합과 매우 큰 관계가 있는 사항이었다. 이 관계는 시온의 진영 시절에는 분명하지 않았으나 성도들은 자기들을 오하이오에 집합하도록 주님께서 명하신 것은 자기들에게 가르치실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1831년 1월에 주님께서는 조셉 스미스를 통하여 나의 율법을 너희에게 주노니 거기서(오하이오) 너희는 높은 곳에서 임하는 능력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시온의 진영을 해체하도록 명하신 같은 계시에서 주님께서는 권능의 부여가 성전에서 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진실로 내가 이르느니 나의 교회의 최초의 장로들은 내가 커틀랜드의 땅에 내 이름으로 지으라 명령한 나의 집에서 위에서 주시는 엔다우멘트를 받음은 내게 필요한 일이니라.

 성전 건설사업은 다른 주에서 성도들이 커틀랜드로 계속해서 이주해 옴에 따라 한층 촉진되었다. 1832년경에 커틀랜드에 살고 있는 몰몬 신자의 숫자는 겨우 1백명에 불과하였으나 4년이 지나서는 1천5백명을 넘어섰다. 커틀랜드 성전은 1836년 3월 건축이 끝나서 헌납식을 행하였다. 이 성전이야말로 성도들에게는 피와 땀의 결정체였는데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건축을 도왔다.

 헌납하는 날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거의 반 정도의 사람들은 건물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헌납식은 이들을 위해서 다시 반복해서 행해졌다. 헌납기도에서 이 성전은 성도들의 마음에 새겨진 그대로 기도의 집, 금식의 집, 신앙의 집, 학문의 집, 영광의 집, 질서의 집, 그리고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워졌다. 나중에 조셉 스미스를 통해 계시된 대로 성전은 영원한 결혼과 죽은 선조를 위한 대리의식이 집행되는 장소가 되었다.

 성전 헌납이 행해지던 그날 저녁부터 시작해서 그 후 여러 날 동안 신약성서에 나오는 오순절 또는 성림강림일에 있었던 것과 똑 같은 풍성한 영적 은사가 성도들에게 내렸다. 몇사람의 성도들이 있던 방은 갑자기 바람부는 소리로 가득찼다. 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들었으며 불기둥이 성전 맨 꼭대기의 탑을 비췄다고 보고했다. 성전 안에서 어떤 성도들은 방언을 말했다. 며칠이 지난 후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와 그를 둘러싼 천사들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성전을 둘러싼 가장 큰 기적은 성전 헌납이 있은 지 1주일 후에 일어났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보좌였던 올리버 카우드리는 일요일 아침 기도를 드린 후에 주님 자신이 그 성전을 받아들이시기 위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 이 시현이 있은 후 구약 시대의 모세(Moses)와 엘리야(Elijah)도 두 사람에게 나타나서 각각 중요한 권능을 교회에 회복하였다.

 마찰과 갈등과 박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커틀랜드 시대에는 교리와 교회 행정조직 면에서 큰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발전은 커틀랜드와 오하이오주 하이람(Hiram)에서 내려진 계시를 읽으면 알 수가 있다. 이 계시들 중 중요한 것으로는 하늘에서의 부활과 영광의 등급, 몰몬 신자들이 재산을 교회에 들여놓고 일정 지분의 청지기의 임무를 행사함으로써 공동체적 생활을 구상하게 된 근본인 헌납과 청지기의 법, 주님의 재림과 복천년의 평화적 통치에 대비한 개개인의 준비, 소위 지혜의 말씀이라 불리는 건강을 위한 율법 등이다.

 이와 같은 교리적 발전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에 따르는 제도적 발전과 조직면에서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졌다. 1830년 4월의 교회 조직에서는 교회 지도자는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뿐이었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각 지역 수준에서 그리고 본부에서 교회 일을 관리하고 예언자로부터의 가르침을 전달할 역원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1831년에는 감독(Bishop)의 직책이 정해졌다. 때가 되자 감독은 지역교회의 지도자로 정착되었다. 1832년에는 3인으로 된 대관장단(First Presidency)이 공식적으로 구성되었으며 1835년에는 십이사도 정원회(Quorum of the Twelve Apostles)가 구성되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가장 큰 임무는 선교 사업이었으며 대부분의 사도들은 정원회 조직 후 몇 년 동안 영국에 건너가 직접 전도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교리와 조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회원들은 교회가 너무 복잡하고 계층이 많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에게서 오는 지침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분쟁의 더 큰 원인은 커틀랜드에서 교회가 경제적인 사항에 깊이 관여한 데서 일어났다. 교회는 커틀랜드에서 경제적 공동체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주택, 상점, 제분소를 짓는 등 여러 활동에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은행을 설립하고 주정부의 인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가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인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은행이 시작되었으나 곧 은행은 붕괴되어서 갈등은 커졌다. 많은 성도들이 돈과 재산을 잃었고 조셉 스미스는 소송과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어떤 신자들은 예언자로서의 조셉과 사업가로서의 조셉을 구별하지 못하고 이런 문제로 교회를 떠났다.

 불화와 배도로 교회는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사람은 예언자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사람들은 뒤에서 강하게 그를 지지했다.

 특히 조셉은 자기 지지자가 가장 필요한 때에 신앙심 깊은 여러 사람을 선교사로 영국에 파견했다. 이런 일은 단기적으로는 그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키는 일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되어서 1천5백명이 넘는 새로운 개종자가 1년 내에 교회에 들어왔다.

 교회는 이러한 내부적인 위기는 이웃의 비(非)몰몬편에서 몰몬에 대한 의심이 커가는 것과 궤를 같이하였다. 집합 장소에 몰몬 이주민이 늘어남에 따라 그 숫자는 커틀랜드에서 비(非)몰몬의 숫자를 능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몰몬들은 선거를 통해 지방정부의 여러 직책에 자기들 후보를 내세울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비(非)몰몬 주민들에게는 불만과 의심의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여건은 경제적 문제에 대해 교회 안에서 조셉 스미스가 겪는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생명의 위협이 커지자 조셉은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커틀랜드를 떠나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리고 시드니 리그던과 여러 다른 신앙심 깊은 지도자들을 이끌고 1838년 1월에 커틀랜드를 떠나 3월에 미주리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커틀랜드는 교회 본부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커틀랜드에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지도자를 따라 1838년에 미주리로 이주하였다.

 미주리로의 몰몬 신자의 이동은 과거에 일어났던 문제와 마찬가지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게다가 교회 안에서의 불화도 끝나지 않았다. 미주리에서의 지난 경험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가정과 재산을 지키려는 경계심을 한층 높였다.

 조셉 스미스는 폭력을 원하지 않았으나 죄없는 성도들이 다시금 박해 당하고 집에서 쫓겨나고 살해당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성도들은 얼마간 미주리주의 파 웨스트(Far West)라는 곳에 모여 정착하려 했다.

 그러나 안정을 찾을 만하게 되자 또 다른 분쟁의 불씨가 당겨지게 되었다. 첫번째 공격은 1838년 8월 데이비스군(Davis County)의 선거일에 일어났다. 주의회 위원에 출마한 반(反)몰몬 후보 한 사람이 몰몬 신자들이 투표하는 것을 막으려고 유권자들을 부추겨 반(反)몰몬 분위기에 불을 당겼다. 술에 취한 주민 하나가 몰몬 신자 한 사람에게 싸움을 걸자 바로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다행히 심하게 다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으나 과장된 유언비어가 양쪽 진영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하지만 성도들은 여러 정착지에서 쫓겨나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안전한 파 웨스트로 몰려들었다. 콜드웰군(Caldwell County)에서는 몰몬신자들이 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데이비드 패튼(David W. Patten) 대위의 지휘로 다른 지역 방위군 부대에 포로로 붙잡혀 있는 다른 몰몬신자들을 구하러 파견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일어난 전투에서 패튼 대위(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이었음)는 자기 부대원 한 사람과 상대편 부대원 한 사람과 함께 전사했다.

 감정에 격해 있는 당시 분위기에서 전투와 분쟁에 관한 소식은 무섭게 과장되어서 양 진영에 유포되었다. 미주리 주지사가 된 릴번 보그스는 몰몬 신자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미주리 주민을 집에서 몰아내고 있다는 유언비어만을 분명히 인정했다.

 실제로 몇 사람의 몰몬 신자들이 복수의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보그스 주지사는 이제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838년 10월 27일에 그는 몰몬 박멸령(Order of Extermination)을 발동했다. 이 명령에는 몰몬을 적으로 취급해야 하고 공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몰살시키거나 주 경계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폭력 사태를 악화시키는데 이 명령보다 더 좋은 사건이 있을 수 없었다. 몰몬을 죽이는 것은 이제는 주정부 당국이 승인한 것이었다. 이 명령이 발동된 지 3일 후에 미주리 몰몬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일이 일어났다.

 제이콥 한(Jacob Haun)이라 불리는 몰몬 신자의 제분소에 폭도들의 폭력을 피해서 약 30명의 다른 몰몬 신자 가족이 숨어 있었다. 이 사람들은 지역 방위군 지휘관들과 평화조약을 이미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방위군은 그들을 공격하였다. 성도들이 평화를 외쳤으나 공격자들은 반복해서 무자비하게 사격을 가했으며 가족들은 인접한 대장간으로 피신하기도 하고 숲속으로 달아나기도 하였다. 17명의 몰몬 신자가 살해당했는데 몇 명은 처참한 형상으로 죽었다.

 노인 한 사람은 난도질을 당해 죽었고 열살짜리 소년은 대장간에 숨어서 공포에 떨다가 발각되어 총에 맞아 죽었다.

 다음날에는 조셉 스미스를 포함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주 방위군에게 체포되었다. 군법회의가 열리고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총살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진압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 비(非)몰몬 방위군 지휘관인 알렉산더 도니판(Alexander Doniphan) 준장의 옹호로 겨우 풀려날 수가 있었다. 총살형이 집행되는 경우에는 이 세상 법으로는 당신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지 말라고 말했다.

 조셉 스미스와 함께 체포된 사람들은 사형 집행은 면하였으나 반역죄로 리버티(Liberty) 마을의 감옥에 5개월 동아 갇혀 있었다. 한편 파 웨스트에 남아 있던 성도들은 지도자들이 모두 감옥에 갇혀 있는데다가 폭도들의 새로운 공격이 두려워 주 방위군에게 항복하고는 주 경계를 떠나는 데 동의하였다. 이들의 출발은 대개 겨울에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시금 재산을 모두 잃었다. 그들은 1838년과 1839년 사이 겨울에 미시시피강을 건너 일리노이주로 이주하였는데 미주리에서의 극단적인 적대감과는 달리 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호의적인 대접을 받았다.

 이 고난의 시기에 성도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나 조셉 스미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깊은 자기 반성과 더불어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감을 가질 수 있었다. 예언자가 쓴 깊이 있는 글과 우리에게 가장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계시는 감옥에 갇혀 있던 이 때에 나온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감옥에서 고난에 찬 겨울을 보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셉은 밝은 미래를 보고 있었다.

 리버티 감옥에서 그가 배운 교훈은 그이 남은 생애 동안 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했다. 박해하는 자들이 폭력을 쓰면서까지 자기를 괴롭히고 늘 문젯거리가 산적해 있었으나 그는 주님이 함께 하시며 그에게 맡기실 일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감옥에서 쓴 편지에 주님으로부터의 계시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이것의 일부분이 교리와 성약 122편에 실려 있다.

  너를 함정에 던져 살인자의 손에 넘기고 사형을 선고할지라도, 저들이 너를 깊은 바다에 던질지라고, 몰아치는 파도가 너를 삼키려 할지라도, 열풍이 네 원수가 될지라도, 여러 하늘이 흑암을 몰아오고 풍우 화석이 모두 힘을 모아 길을 가로막으며 무엇보다도 지옥의 바로 그 턱이 네게 크게 입을 벌려 삼키려 할지라도, 내 아들아, 이 모든 일은 네게 경험이 되고 네게 유익이 되는 줄 알지어다.

 인자는 모든 자보다 낮게 몸을 낮추었나니, 너는 저보다 크뇨?

 그러므로 네 길을 계속하라. 그리하면 신권은 여전히 너와 함께 하리니, 이는 저희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어 넘을 수 없음이라. 네 명수는 알려져 있나니, 네 생명은 하루라도 짧게 헤아림을 받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하실 것임이니라.

 다시금 성도들은 공동사회를 건설하고 안식처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굽이에 있는 땅을 구입하여 새 도시 이름을 나부(Nauvoo)라 명명하였다. 그들은 말라리아와 싸우고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나부를 자기들의 마을로 건설하려는 굳건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나부 시절에 행해졌던 가장 중요한 일은 선교사업이었다. 1837년 커틀랜드에서의 고난의 때에도 조셉 스미스는 가장 가까운 성도들을 영국에 보내서 선교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1840년부터 시작해서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 중 아홉 명이 영국에서 제2차 전도사업을 시작하였다. 다음 해까지 머물면서 그들은 5천명 이상의 새로운 개종자를 얻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웨일스에서 활발한 전도를 하면서 사도들은 교회를 조직하고 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을 교육하여 자기들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교회가 완전하게 운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도들의 영국에서의 전도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매우 중요했다. 첫째로 많은 개종자들이 나부로 이주하도록 함으로써 교회의 힘을 크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후 몇 년간에 걸쳐 약 5천명 정도의 개종자들이 영국에서 나부로 이주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근로자 계급의 사람들이었다. 전도사업과 더불어 사도들은 영국에서 출판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출판사는 수십년간 몰몬 출판물을 발행하는 중심기관이 되었다.

 이 전도사업은 십이사도가 최고 관리기관으로 정착해가는 때에 이루어졌다. 십이사도들은 모두 미주리에서의 고난을 겪고 나부로 이주했으며 이제는 교회를 해외에서 성장시키기 위해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인 브리감 영의 주도로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관리능력을 반전시켰기 때문에 1841년 나부에 귀환한 후에는 보다 큰 책임을 맡을 수가 있었다.

 나부의 성도들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되고 해외에서 새로운 회원들이 꾸준히 이주해 오면서 나부는 성장을 계속하여 지금까지의 어떤 정착지보다도 더 많은 몰몬 신자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되었다. 경제는 번창하고 문화와 사회 생활은 활기차고 성도들은 안정을 찾아서 예언자 조셉 스미스가 꿈꾸던 새로운 사회가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미주리주 시절의 고난을 쉽게 잊지 않고 상당한 규모의 방위군을 갖추었는데 그 사령관에는 조셉 스미스가 취임하였다.

 나부시대에는 커틀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큰 힘을 성전을 건설하는데 쏟았고 커다란 신학적 발전이 있었다.

 나부 시절에 조셉 스미스는 신회(神會)의 개념에 대한 성도들의 이해를 높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신은 세분의 개별적 존재로서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과 같은 살과 뼈를 가지고 있으나 완전한 불멸의 육체를 가지셨음을 가르쳤다. 또한 인간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삶을 가지는 존재이므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영원한 진보에 필요한 의식을 이 세상에서 대리로 집행해야 함을 가르쳤다.

 몰몬들의 의식 중 가장 거룩한 엔다우멘트라 불리는 성전의식이 이 때에 이루어졌다. 이 의식은 처음에는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을 포함한 조셉의 가까운 동료들에게만 소개되었으나 그의 사망 후에는 일상적으로 일반신자들 에게도 행해졌다. 박해의 대상이 된 일부다처제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조셉 스미스는 일부다처제의 실시를 위한 교리적 기초에 대한 계시를 커틀랜드 시절에 이미 받았으나 나부 때까지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조셉 스미스는 처음에 자기를 포함한 몇 사람의 신자가 이것을 실시하도록 허용했으나 이것은 나중에 성도들이 일리노이주를 떠나 미국 영토 밖에 있던 유타 지역에 정착했을 때 크게 확대되었다. 이것이 오해와 핍박의 근본 원인이 되었으며 교회내의 일부 배도와 어울려 결국은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기 까지에 이른다. 결국 외부의 큰 압력에 부딪혀 교회는 1890년에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를 폐지하였다.

 세계 최대의 여성 단체인 상호부조회도 역시 1842년 나부에서 조직되었다. 처음에는 여성을 위한 교육, 사교, 문화 및 종교 공동체로 설립되었으나 이내 중요한 교회 활동의 하나로 부각되어 지금까지 줄기차게 발전하고 있다.

 나부가 커지면서 조셉 스미스는 과거에 댱했던 것과 같은 재난을 또 다시 겪지 않는 한층 안전하고 영구적인 성도들의 안식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마음속에 특별한 장소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언젠가는 성도들이 일리노이주를 떠나 더 서부로 가서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는 곳으로 가게 될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부에서도 드디어 다른 지역에서 몰몬들이 겪었던 문제점들이 다시금 생기기 시작했다. 나부 지역에서 몰몬 신자들의 정치적인 힘과 경제적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비(非)몰몬 이웃들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몰몬 사회가 효과적으로 조직된 사회라는 것 때문에 다툼은 증폭되었다. 게다가 조셉 스미스는 종교 지도자인 동시에 정치 지도자였는데 나부 시장이 되어 교회와 정치를 둘 다 관장하는 것이 비(非)몰몬인 주민들을 화나게 했다. 또한 기존 교회와 다른 교리와 일부다처제 등의 실천행동은 유언비어가 되어 분노를 증폭시켰다.

 배도한 몇 명의 몰몬신자와 여러 명의 반(反)몰몬 패거리들이 발행하는 신문이 교회와 조셉 스미스 개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셉 스미스가 참여하고 있는 시 평의회(City Council)는 이 신문에 대하여 공공의 질서를 해친다는 명목으로 폐간을 명령했다. 이 일은 반대자들을 한층 분노케 만들었으며 결국 조셉 스미스를 체포하기 까지에 이르렀다.

 감옥으로 가면서 조셉 스미시는 자기 임무가 다 끝난 것을 느끼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가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여름날 아침과 같이 평안하다. 양심에 비추어 나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을 거스리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내 생명을 가져가려 한다면 나는 흠 없는 사람으로 죽으려 한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제 하이람과 두 사람의 가까운 동료(이 중 한 사람은 나중에 교회의 세번째 대관장이 된 존 테일러였다)는 재판을 기다리면서 카테이지(Carthage) 감옥에 갇혔다. 재판은 벌어지지 않았고 1844년 6월 27일 드디어 일단의 폭도들이 이들이 갇혀 있는 2층의 감방을 습격해 왔다.

 강제로 문이 열리고 총탄이 빗발쳤다. 다른 공격자들은 마당에서 기다렸으므로 총탄은 바깥에서 이층으로도 날아들었다. 문 뒤에 있었던 윌라드 리차즈(Willard Richards)는 겨우 부상을 면할 수가 있었다. 존 테일러는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침대 밑으로 피신했다. 예언자의 형인 하이람은 얼굴과 등에 총탄을 맞고 마루에 쓰러졌는데 두발의 총탄을 더 맞았다. 조셉은 실내에서 총탄을 맞고 바깥으로부터 총알을 맞았다. 부상을 당하고도 그는 창문을 통해 아래 마당으로 뛰어 내렸으며 폭도들의 발 아래서 운명했다. 그의 나이는 당시 38세 였다.

 조셉과 하이람의 순교는 몰몬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조셉이 끌려갈 때만 하더라도 남아 있던 성도들은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죽음의 소식이 나부에 전해졌을 때 비통과 분노와 당혹감이 도시를 휩쓸었다. 나중에 교리와 성약의 일부가 된 글에서 존 테일러는 당시 성도들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셉이 순교하자 당장 누가 교회를 이끌어 갈 것인가 하는 후계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조셉의 보좌 중의 한 사람인 시드니 리그던과 브리감 영이 이끄는 십이사도 정원회였다.

 십이사도들은 자기들이 신권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예언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때까지는 교회를 이끄는 것이 자기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조셉 스미스의 순교 후 2주가 지나서 열린 모임에서 참석 회원들의 대다수는 십이사도들의 지도를 따르겠다고 투표했다. 몇 사람은 나중에 브리검 영이 모임에서 설교할 때 그들의 눈 앞에서 몸이 변형되어 조셉 스미스의 모습과 목소리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새로운 대관장단이 3년 후에 조직될 때까지 브리감 영이 머리가 된 십이사도 정원회가 교회를 이끌었다. 십이사도 정원회는 많은 중요한 사항에 눈을 돌려 일처리를 했는데 여기에는 나부 성전의 준공도 들어 있었다. 공동체의 상징인 성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십이사도는 성도들을 나부에서 인도하여 대평원을 건너 당시 미국 영토의 바깥에 있는 서부로 가서 안전한 마지막 보금자리를 찾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부를 떠나는 최종 결정은 폭도들에 의한 폭력사태가 또 다시 일어나면서 이루어졌다. 이 폭력의 목표는 나부의 바깥에 있는 몰몬 정착지였으나 지도자들은 단순히 성도들을 모두 나부에 집합시키는 것으로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성전을 완성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면서 지도자들은 그들이 모두 나부를 떠나야 함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먼저 성전을 완성시켜야 했다. 일을 서둘러서 건물은 1845년 12월까지는 성도들이 의식을 집행할 수 있도록 준비가 되었다. 나부를 떠나기 전까지 거의 6천명의 성도가 성전에서 거룩한 의식을 받았다. 여러 해에 걸친 성도들의 희생과 봉사로 성전을 지었으나(어떤 성도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평생 저축한 돈을 헌금했다) 겨우 몇 개월 동안 건물을 사용하고는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몰몬 성도들이 나부를 떠난 2년 후에 성전은 방화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나중에 불어온 폭풍우로 남아 있는 벽도 무너졌다. 몰몬이 살았던 것을 보여주는 대부분의 상징물이 나부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의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몰몬들은 1846년 2월 나부로부터 이주를 시작했다. 이 때부터 전개되는 상황은 이 세상의 이주 역사상 가장 기억할 만한 사건이 된다. 수천명의 성도들이 나부를 떠나 주로 포장마차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건너 서부로 이동하였다.

 강에 얼음이 두껍게 얼었을 때는 사람과 마차와 동물은 직접 그 위를 통과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나룻배를 만들어 건넜다.

 성도들 중 많은 숫자는 몇해 사이에 세번째의 이주를 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처음에는 미주리에 집합하였고 다음에는 나부로 쫓겨갔고  나부의 집에서 다시금 쫓겨난 것이었다. 몰몬의 이주 역사는 서사시적인 서부 개척자 이야기의 하나가 되었으며 위대한 신앙과 역경의 이야기가 되었다

 성도들은 1846년과 1847년 사이의 겨울을 미시시피강의 서쪽 강변에서 지냈는데 이들은 그 지역의 이름을 윈터 퀀터스(Winter Quarters)라 불렀다. 1847년 4월에 브리감 영은 선발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출발했다. 브리감 영은 때때로 아메리카의 모세라고 불린다. 몰몬 신자들은 자기들을 이스라엘의 진영(Camp of Israel)이라 부르면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향하는 출애굽에 비유했다.

 당시의 미국 국경을 넘어 합중국에 편입되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몰몬 신자들은 박해자의 손을 벗어나 자기들의 종교를 가질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자기들의 법을 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땅을 찾기를 희망했다. 선발대는 길을 가면서 여러 곳에 주거지를 조성하고 땅을 개간하면서 씨를 뿌려 다음에 오는 사람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긴 여행길에는 기쁨의 때도 있었고 슬픔의 시간도 있었다. 무서운 질병도 있었으나 영적인 충만함과 기쁨을 나눌 수 있는 때도 있었다. 중간에서 아기들이 태어나기도 했으나 아기들도 어른들도 도중에 죽어갔다. 성도들 중의 하나인 윌리암 클레이튼(William Clayton)이 작사한 새 찬송가는 많은 개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브리감 영의 서기였던 클레이튼은 이제 막 출산을 하려고 하는 연약한 십대의 어린 부인을 나부에 두고 떠났다.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산란해져 있는 그는 드디어 아내가 아들을 낳고 산모와 아기가 모두 건강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기쁨과 안도에 가득차서 클레이튼은 잘 열려진 곡조에 새로운 가사를 붙였다.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로 알려진 그의 찬송가는 이렇게 해서 모든 몰몬 신자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의 하나가 되었다.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 어서들 나가자. 이 여행이 혹 힘들지라도 하나님 계시니 근심 걱정 다 버리고 힘껏 앞으로 나가자. 너의 가슴 부프리니 모든 것 잘되리.

 브리감 영이 이끄는 본대에 앞서서 선발대는 1847년 7월 21일 솔트레이크 계곡(Great Salt Lake Valley)에 들어갔다. 3일후인 1847년 7월 24일에 브리감 영은 계곡에 들어섰으며 성도들에게 정착지 건설을 시작하도록 명령했다. 이 곳이 성도들의 영원한 터전이 될 것이라는 결정은 나흘 후에 브리감 영이 성전 부지를 정하면서 확실해졌다.

 첫번째 몰몬 개척자들이 솔트 레이크 계곡에 도착했던 1847년부터 시작해서 대륙횡단열차가 유타주를 통과하게 된 1869년까지 22년간에 걸쳐 새로운 신앙을 찾아 대평원을 횡단하여 유타로 출발한 몰몬신자는 8만명에 달하였으며, 그 중 약 6천명이 중간에 목숨을 잃었다.

 초기 몰몬 이주민중 가난한 사람들은 유타까지의 대평원을 손수레만으로 여행하였는데 도중에 기아와 추위와 질병으로 이들만 수백명이 죽었다.

 최종적으로 1893년에 건축이 끝나서 헌납된 솔트 레이크 성전은 전세계를 통해 가장 널리알려진 교회의 상징물이 되었으며, 이제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성도들은 그 성전을 보고 또한 그 곳에 나타난 성도들의 희생을 보고 큰 영감을 얻고 있다.

 브리검 영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서 서부 이주를 이끌었다. 1847년 10월 제일회장단이 재조직 되었으며 브리검 영은 공식적으로 교회의 회장으로 성도들의 지지를 받았고 30년 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직을 수행했다.

 브리감 영과 성도들은 도시를 계획하고 살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이 곳이 바로 조셉 스미스가 시현으로 보았던 후기성도들의 영구적인 보금자리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권능과 정치적 권한을 합한 체제가 필요하다고 성도들은 느끼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 체제로서 신정(神政)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지역(나중에는 주가 되었음) 정부와 지방정부의 지도자를 겸하였다. 브리감 영은 야심적인 개척지 건설을 시작하여 미국 서부 지역의 수많은 곳에 몰몬 정착촌을 세웠다. 정착촌은 계속적인 개종자의 서부 이주에 따라 확장되고 번성하였다. 이들 개종자는 주로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여러 나라에서의 성공적인 선교사업의 결과였다.

 지리적으로 이들은 박해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는 했으나 교회와 연방정부의 긴장과 마찰은 19세기 내내 계속되었다. 이 마찰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유타 정부를 교회 지도자들이 완전 장악하고 있는 일종의 신정체제에 대한 연방정부의 반발이었고, 둘째는 1852년에 일부다처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교회의 입장을 철회하라는 압력이었다.

 후기성도들은 일부다처제도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믿었고 제도의 시행을 금지하는 법률이 없는 상태에서는 종교적 자유로 이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인정되든 안되든 간에 많은 미국인들은 당시의 사회 풍습에 맞지 않고 자기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제도를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모든 몰몬 신자들이 일부다처제를 행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 실천은 종교 지도자들의 동의 없이 가볍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이 진지하게 실천한 것이었고 수반되는 의무와 부담이 많았다.

연방정부 관리들이 일부다처를 행하는 사람들을 찾아 기소하기 시작하자 다툼이 일어났으나 몰몬들은 일부다처가 하나님이 필요한 때가 되어서 정한 것이므로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다. 브리검 영은 조셉 스미스로부터 처음 이 원리를 들었을 때 참으로 죽은 자들이 부럽다고까지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식적으로 일부다처제 실시를 중지하는 선언서를 발표한 것은 제4대 회장이었던 윌포드 우드럽(Wilford Woodruff)이었다. 이 때까지 연방의회는 일부다처를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고 연방정부는 교회가 이를 지키도록 높은 압력을 가했고 교회를 붕괴시키겠다고까지 위협하였다.

 윌포드 우드럽 대관장은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성도들의 노력과 충성됨을 받아들이셨다고 말하고 그러나 이제 교회를 파괴적인 법적 조치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일부다처는 끝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교회가 아직 일부다처제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일부다처는 현재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에는 파문 당한다.

 솔트 레이크 계곡에서의 처음 몇 년간은 성도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수확물이 항상 충분했던 것은 아니며 성도들은 집, 축사, 상점, 교회와 성전 등 필요한 건물을 모두 지어야 했다. 때때로 한발이 닥쳐와 어려운 때도 있었고 귀뚜라미와 메뚜기가 떼를 이루어 곡식을 먹어치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도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시련을 통해서 도와 주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또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들이 가르침을 받고 실천해 가는 모든 과정은 합당한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유타 지역에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민이 이 새로운 집합장소로 계속해서 흘러 들어왔으며 브리감 영은 계속적으로 사람들을 인근 지역의 여러 곳에 보내 정착지를 만들게 했다. 1849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된 후 멀리 서부를 향하는 여행자에게는 솔트 레이크 시티가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이것은 축복이기도 하면서 좋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여행객들은 유타 경제에 보탬이 되었으나 멀리 외진 곳에 피신해온 성도들이 안전하게 독립되어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1869년의 대륙횡단 철도의 개통은 고립을 불가능하게 했다. 실제로 동부 철도와 서부 철도는 그 해에 유타에서 만났다. 브리감 영과 몰몬 신자들은 개종자들이 유타에 이주하기가 쉽다는 이유로 철도 개통을 대체로 좋아하였으나 이것은 또한 이 지역에 들어오는 비(非)몰몬이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제 후기성도들이 부딪치게 된 도전은 새로 이주해오는 비(非)몰몬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의 독특한 종교사회를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해를 함께 할 수 있는 교회의 프로그램을 계속해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상호부조회와 젊은이를 위한 조직의 강화가 필요했다.

 성도들은 외부 비(非)몰몬의 도움 없이 또한 그들과 거래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협동조합 형태의 기업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이 기업들은 판매 협동조합 활동에서부터 협동교단(United Order)이라 불리는 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것이 있었다. 성숙한 공동체 사회를 목표로 협동교단을 만들려는 몰몬들의 시도는 개별 교회가 주관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협동농장과 공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재산소유와 작업까지 공동으로 하는 공동체 사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협동교단 운동은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고는 1870년까지 계속되어 헌납과 청지기의 직분이라는 후기성도의 이상적 모델로 남게 되었다.

 1877년에 브리감 영은 솔트 레이크 성전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에 남부 유타에 있는 세인트 조지에 성전이 헌납 되는 것을 보았다. 이 성전은 몰몬들이 나부를 쫓겨난 후 건설한 첫번째 성전이며 오늘날까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성전건축의 효시가 되는 건물이었다. 오늘날에는 세계 거의 모든 곳에 성전이 있으며 새로운 성전 건설계획이 계속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브리검 영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성도들은 30년 전에 비해서 매우 안정된 여건 속에 살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개종자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집을 록키산맥 위에 지었으며 교회가 있는 곳마다 협동과 예배의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단기적으로 교회는 시련에 직면하기도 하였고 외부 세력의 박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야에서 보면 영감적인 지도자들을 통하여 계속적인 계시를 받고 있다는 특유의 신앙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낱낱이 극복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종교가 될 수 있는 특성을 갖추게 되었다.

 브리감 영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 19세기말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극적인 성장과 더불어 유타 몰몬과 연방정부와의 마찰로 특징지어진다. 조셉 스미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브리감 영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대관장단이 1880년에 구성되기까지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이었던 존 테일러가 교회의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그는 제3대 대관장이 되었다.

 교회 회원이 계속적으로 엄청난 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미국 서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캐나다와 멕시코에까지 정착촌이 건설되었다.

 전도사업이 팽창하면서 이들 정착촌은 새로운 개종자들을 계속적으로 불러 들였다. 지역에 따라서는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였으나 선교사는 미국 전역으로 파송 되었다. 특히 남부에서는 선교사들이 때때로 박해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몇 명은 반(反)몰몬 선동자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조차 있었다.

 교회의 선교노력은 미국을 넘어 캐나다, 멕시코, 뉴질랜드, 호주, 사모아, 통가, 터키, 기타 유럽의 많은 지역에까지 퍼져 나갔다. 새로운 성전이 건설되어 유타에는 19세기 말에 4개의 성전이 있게 되었다. 교회 성장은 본부와 지역교회의 조직변경을 가져왔고 교회는 나날이 늘어나는 회원에 대응하기 바빴다.

 연방정부와의 갈등은 주로 일부다처제 문제에 집중되었다. 미국 영토에서 일부다처를 금하는 새로운 법들이 통과된 것은 1885년부터 맥시코에, 1886년부터 캐나다에 몰몬 정착촌이 생긴 사실상의 이유가 된다.

 일부다처 금지 법안들은 연방정부 관리에게 몰몬을 적극적으로 기소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주었다. 동시에 이 법은 일부다처를 행하는 몰론 신자들에게 선택의 여지를 거의 주지 않았다. 이 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첫번째 부인과 거기서 태어난 아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연방정부의 눈을 피해서 숨어 버리거나 미국 영토를 완전히 떠나는 수밖에 없어서 어떤 사람들은 캐나다나 멕시코로 떠났다. 나머지 사람들은 법정에 서는 수밖에 없었다. 1893년까지 거의 1천명의 사람들이 일부다처와 관련해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일부다처제가 주님의 계명이라고 믿어 포기를 거부했던 존 테일러 대관장은 말년을 거의 숨어서 지냈다. 1887년 7월에 그는 숨어 있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교회를 인도하는 책임은 다시금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여되었으며 이 때의 정원회 회장은 윌포드 우드럽이었다. 1889년에 우드럽은 교회의 대관장으로 지지 되었다.

 교회에 대한 연방정부의 압력은 극에 달했다. 많은 회원들이 감옥에 갇혔을 뿐 아니라 이제는 공식적으로 교회의 법적 지위를 빼앗고 교회를 해산하여 재산을 몰수하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교회가 더 이상 일부다처제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조직으로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조항까지 들어 있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한동안 심각하게 그 대책을 숙고하였다. 드디어 1890년 9월에 그는 주님으로부터 영감을 구하고 선언문(Manifesto)을 발표하였다. 그는 자기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대관장으로서 교회를 세상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움직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미국 정부는 일부다처제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일성도를 멸망시킬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또 멸망시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주님께 기도 드리고 그의 영이 주시는 영감을 받아 나는 다음의 선언을 하고자 한다.

 윌포드 우드럽과 교회는 주님께서 일부다처를 중지하고 미국의 법률에 따르도록 원하시는지 아닌지 확신을 가지고 싶어했다. 우드럽 대관장은 나중에  주님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씀하셨고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에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다고 밝혔다. 선언문에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일부다처 결혼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며 누구도 이를 어길 수 없다고 말해주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선언문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계시를 받아들였다. 이들은 50년 전에 조셉 스미스가 계시를 받아 이것이 시작된 것임을 상기하고 새로운 계시를 쉽게 받아들였다.

 그 때 성도들은 어떤 일을 하도록 가르침을 받았을 때에는  온 힘을 다하고 저희 가진 것을 다하여 그 일을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멈추지 아니하도록 하되 저희 원수가 습격하여 와서 방해하며 그 일을 수행하지 못하게 할 때에는 주님은 그 이상 이들 인간의 자녀에게 그 일 행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저희 현물을 받아들이신다고 배웠던 것이다.

 선언문이 발표되자 교회에 대한 적대감은 크게 수그러 들었다. 더 이상 일부다처가 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 연방정부는 선언문이 발표되기 전의 일부다처 가정에 대하여 남편이 나머지 아내들과 아이들을 부양하는 것을 인정했다.

 일부다처제의 공식적인 폐지로 유타가 주로 승격되는 길이 열렸다. 과거에 유타 정부 관리들은 여러 번 주 승격을 신청했으나 일부다처 반대의 여론과 유타 내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거절 당했다. 일부다처제를 포기하고 신헌법에서 공식적으로 교회와 주정부의 분리를 정하게 되자 유타는 드디어 1896년 1월 주로 승격되었다. 1898년 윌포드 우드럽 회장이 별세하고서부터 교회는 미국 사회의 주류(主流)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는 몰몬 신자들에게는 문자 그대로 시련과 박해와 소외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박해와 시련은 몰몬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살던 마을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거친 서부로 이주하면서 그들은 지도자에 대한 순종과 상호간의 긴밀한 협동을 배우게 되었으며 어려움을 참고,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쉬지 않고 일하는 습관을 몸에 익혔다. 수천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초기의 박해는 이들을 오히려 강하게 하고 두려움 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다. 그것은 더 질기고 더 강한 성도를 만들어 내는 대장간의 불과 같은 것이었다. 박해는 오히려 수 많은 신화와 순교자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