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어느 날 로저 슬라고우스키 장로와 나는 독일 서부지역의 빌헬름스하펜에서 가가호호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한 노년의 미망인이 우리를 그녀의 소박한 아파트 안으로 친절하게 맞이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녀가 정말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녀는 수십 년 전 그녀가 젊은 엄마였을 당시 두 명의 후기 성도 장로들이 그녀 집의 문을 두드렸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당시 그녀는 매우 바빴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돌려 보냈다. 후에 그녀는 그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고 만약 후기 성도 선교사들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면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겠다고 맹세했다. 에머 헹케는 명민한 정신이 또렷했으며 그녀는 우리의 메시지를 경청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주 먼 곳에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우리에게 친절했으며 항상 얼마 안 되는 음식일지라도 우리와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우리 메시지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이해하는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그녀를 콜백리스트(가끔 방문해 볼 필요는 있지만 적극적으로 복음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의 명단)에 올리고 우리가 근처에 들를 일이 있을 때마다 가끔씩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몇 주 후에 우리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방문하는 동안 놀랍게도 에머는 그녀의 침례 결심을 발표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자신의 힘들었던 삶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에 그녀의 갓 태어난 딸이 죽었다. 1924년에는 아홉 살 난 딸이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었다. 1941~1942년 겨울 동안,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의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던 그녀의 스물 한 살된 아들의 마지막 편지를 받았다. 얼마 후에 그녀는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했다. 에머의 남편인 휴고는 나치 정부의 정책들을 경멸했다. 그녀는 자주 그에게 좀 더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1944년초, 정부의 라디오 신호 탐지기가 행케 집에서 영국의 방송국 신호를 추적한 후, 게슈타포(나치의 비밀 경찰)가 문을 부수고 그를 체포해갔다. 그는 함부르크 근처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고 에머와 어린 아들만이 남겨져 스스로를 돌보아야 했다. 에머는 남편을 투옥시킨 지역 나치 관리자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남편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1945년 3월에 휴고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관리자는 그 일로 인해 무기징역에 처해졌지만 우리가 에머의 문을 두드리기 얼마 전에 석방되었다. 그녀는 그 관리자가 비싼 새 차를 타고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자주 본다고 이야기했다. 침례 받겠다고 한 날, 에머는 드디어 남편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비를 구하는 그녀의 간청을 거절한 그를 용서할 힘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심판을 주님의 손에 맡기기로 확고히 결심했다. 에머는 교회의 충실한 회원이 되었고 회복된 복음의 진리를 발견함으로써 큰 기쁨과 위안을 찾았다. 1966년 11월, 상호부조회 모임에 가기 위해 빌헬름스하펜의 광장을 서둘러 지나가던 중에 그녀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행케 자매는 인생의 시련으로 인해 적의를 품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분노나 복수심을 갖지 않은 채 죽음을 맞이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사랑스러운 자매는 그녀가 사랑했고 잃었던 사람들과의 기적적인 해후를 만끽 했을 것이다. (토마스 이 홀레처 200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