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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말씀·경전

바벨론에게 유다가 멸망됨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24.

요시아의 치세 후 약 20여년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유다의
불순종의 열매가 성숙하게 무르익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유다는 애굽과 바벨론의 정치적 권력의 틈바구니에 끼게 되었다.
여호아하스가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 후
그는 애굽으로 끌려갔으며, 여호야김이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얻은
여호아하스의 이복형제가 애굽의 분봉왕으로 통치하였다. 그도
애굽을 위하여 그의 백성들에게서 가혹하게 세금을 갈취하였다.
바벨론은 주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무찔렀다.
이리하여 유대 백성은 새로운 정복자의 새로운 노예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호야김은 3년 동안 바벨론에 공물을 바치며
자기의 백성들을 풀어주려 시도해 보았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모반한 왕과 다른 사람들은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다. 왕의
사악한 방법은 유대 백성의 타락을 부채질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어린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계속 바벨론에 대한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겨우 3개월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바벨론은 유다의 지도층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학식 있고
재능있으며 종교적인 사람들을 많이 추방시켰다. 여호야긴도
이처럼 추방되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숙부가 시드기야라는
이름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분봉왕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으나 한동안 백성들 간에는 저항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외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민족주의 정신이 일게 된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반란은 유대로부터 관리 세력을 철수케 하였고,,
백성들 간의 애국정신은 히스기야로 하여금 북방 세력에 대항하는
반란에 애굽의 원조를 구하게 하였다.
본국에서 평정된 문제와 더불어 바벨론 사람들은 유다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돌아갔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유다 땅의 다른
요새들도 공격받아 무너졌다. 예루살렘에 대한 공략은 다른
나라들이 멸망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이 시대의 상태는 거의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느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예레미야애가 4:1~5)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예레미야애가 4:9~10)
성경 역사학자 해리 토마스 프랭크 씨는 이 백성과 도시의
붕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587년 7월에 시드기야는 성을 포기하고 내어 주어 고통의
종지부를 찍으려 시도하였다. 10년전 바벨론은 지극히 자비롭게
예루살렘을 대하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의 그들은 음모의
중심을 없애버리고자 한다. 식량 배급도 다 떨어졌다. 바벨론의
군사들이 도성을 공격한 날 저녁에, 시드기야와 그의 몇몇
신하들은 요단강에 가서 사막으로 피신하려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가능한 한 멀리 도망하려 하였으나 여리고에서 잡혔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본부가 있는 구스(시리아)에 있었다. 그곳에서
유대인들과 그의 자손들이 잡혔다. 이제는 어떠한 히브리의 왕도
여호야긴이 했던 것처럼 호화스러운 망명 생활을 살지 못하게
되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의 대왕 앞으로 끌려갔고, 그의
아들들은 그의 눈 앞에서 살해되었으며, 그후 그는 장님이 되어
사슬에 묶인 채 북쪽으로 끌려갔다.”
“그러는 동안에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바벨론 사람들이 그 도성에서 무엇을 발견하였고, 그들이 발견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는지는 별로 상상을 요하지 않는다.
동시에, 다소 놀라운 것은 이 도성이 함락되었을 때 이 도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사전에 결정된 바가 없었던 것 같다.
한 달 이상 이 극심하게 시련받은 민족들은 공포와 수치감에
시달렸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믿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때 느부갓네살의 경호대장이며 따라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인 느브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느브사라단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천사가 아니었다. 그의 명령으로 국가 고위
관리와, 그들과 함께 각계의 지도자급의 인사들이 수리아 본부인
리브라로 잡혀가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예레미야 52장 29절은 그 수가 832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남자 성인의 수만을 말하며 또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사람만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추방당한 사람들의 수는
훨씬 많다. 마침내 예루살렘의 벽이 무너져 버렸고, 함락된 지 일
년 반이 지나고, 느브사라단이 몰고 온 공포와 그가 한 달 동안
장악해 온 모든 잔재는 불에 타버렸다.”
“무거운 연기가 유대 광야를 내려 감람산을 지나 요단강의
광야쪽으로 서서히 불어갔다. 그러나 그날, 587년 여름의 열기
속에서 그것은 유다의 화장터에서 오르는 연기였다.”(성경의
세계를 발견함, 130쪽, 지도, “유다의 첫 번째 망명과 귀향”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