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교회는 사도들이 순교하고 그에따라 계시가 사라지자 전과 같은 권능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되었으며 여기 저기 산재한 도시에 몇 개의 교회가 그들을 인도하는 지역적인 권능만을 지닌채로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지상에는 분쟁이나 오류를 조정하는 최후의 상소법정도 없게 되었고 각 감독이나 관리 장로들은 그들의 지혜대로 교회를 운영 할 수 밖에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사면초가의 상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가 주체가 되어 기독교인들을 불순분자로 낙인을 찍고 모반자로 몰아 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대규모의 학살이 있었고 살아 남은 자들은 강제로 생매장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당시 철학은 순수하고 참된 복음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히 다르게 인식시키고 희랍에서 전래된 많은 이교(異敎)의 비법들을 교리와 의식으로서 교회에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신에 대한 교리 해석이 완전히 새롭고 다르게 되어 드디어는 니케아 신조가 생겨나고,애급으로부터 어머니와 아이들에 대한 숭배 사상이 들어 왔고, 노우시스파의 이단설과 신 플라톤파의 철학이 참된 기독교의 교리를 혼돈 되게 했으며, 프리지아로부터 대모(大母) 경배 사상이 들어왔고, 비기독교인들의 극단적인 여러 의식으로부터 기도와 성가와 봉독과 암송을 하는 미사 의식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우상 숭배 사상을 파괴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이교도의 우상 숭배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명백히 끊어져 가던 희랍 정신은 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속에 생명이 다시 이어졌고, 수 세기 동안 철학을 지배했던 희랍의 언어는 기독교 문학과 의식의 매개물이 되었고, 희랍의 신비는 인상적인 미사 의식의 신비 속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윌 듀런트, 문명의 이야기[뉴욕, 사이몬과 슈스터 1994년] 3:595)
사랑받던 요한이 사라진 후 200년 동안 이러한 상태가 계속해서 조장되었습니다. 교회는 여러 분파로 갈라졌으며 이미 이 세상에는 교리상의 일치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질과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신념이 주로 논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침례와 같이 그렇게 단순한 의식이 토론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형식이 변하고 또한 목적도 변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역시 침례 의식을 수행하는 데에 하나님의 권능이 필요치 않다는 교리가 유포되었으며, 유아 세례가 시작되었습니다. 감독간의 알력은 비참한 유혈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핍박이 가라않게 되자 교회는 다시 회원 수가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그 시대의 이교도 교회에서 세상적인 견해와 관습을 받아들여 교회 자체의 표준을 저속화하였던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태양 숭배자로서, 거의 그의 전 생애를 보냈고 25년 동안이나 침례받지 않았으며 신자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기독교를 육성하였고 거기에서 그는 개인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던 것입니다.
근래에까지 오랜 내란을 치른 그는 만약에 인기있는 기독교가 국교로 되면 황제로서의 기반을 굳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그의 휘하에 두었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후 황제는 교회에 큰 권력을 주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기독교가 정부의 한 부분이 되었으며, 그 권력을 통하여 황제는 정부의 다른 모든 부분을 통치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의 교회에 여러 종파가 있다는 것을 안 콘스탄틴 대제는 그 어려운 일을 정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첫 번째로 가장 분파가 심한 곳으로 알려진 아프리카에 손을 써 보았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황제로서의 자기의 권위를 세울 작정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만 그는 태양 숭배자일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의 권위를 갖지 못하였고 어느 것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으로 강력하였으므로 로마황제의 권력으로써 아프리카의 분쟁에 개입한 것입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로마 제국의 황제이며 통치자의 권력으로써 그의 세력하에 있던 모든 나라의 감독들을 회의에 소집했습니다. 이 회합은 아르레스에서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했던 어떤 성직자는 그 곳에서 인간의 지식으로 만들어진 침례와 교회의 권능에 관한 의식들에 반대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는 무력으로 그들을 동의시키려 했습니다. 학살은 계속됐고, 유혈은 낭자했으며, 간신히 살아남은 수많은 반대자들은 유형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자기의 뜻대로 일을 처리했으며, 그를 반대한 감독 대신에 황제로서의 자신의 정치적 권력으로 다른 감독들을 선택해서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통치자들에 의한 감독 임명의 시초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알렉산드리아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교회의 모든 감독들의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감독들의 논쟁을 듣고 있던 그는 아타나시우스 편에 동의했고 이에 반대했던 아리우스파들은 유형을 당하였으며, 그들 대신에 새 감독들이 임명되었습니다. 과연 이것은 어떠한 권력에 의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권능으로 입니까? 그는 아무 권능도 갖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황제로서 모든 것을 처리했고, 감독들을 임명했을 뿐 그의 권위는 세속적 권력이지 하나님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성직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콘스탄틴에 의해 지명받은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영감도 받지 못하고 침례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족을 죽여 살인까지 범한 순전한 태양 숭배자인 콘스탄틴은 그의 정치적인 세력으로 자기네들이 숭배하는 신의 본질에 관한 교리를 기독교의 그것과 바꿀 방도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그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얼마 동안은 아리우스의 의견에 찬성하기도 했고, 또 한 동안은 아타나시우스 일파를 지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불과 몇 년 동안에 교회의 정통 교리를 몇 번이나 바꾸었던 것입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에게 물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께서 과연 콘스탄틴과 같은 인간을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도록 하셨겠는가를 !
그런 일이 있은 후로 황제들은 빈번히 성직자들을 임명하고 면직시켰으며, 교회 내의 많은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으며, 소위 하나님의 사업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로마 제국의 한 부분으로 밖에는 여기지 않았으며, 로마 황제를 교회 우두머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한 모든 것은 성스러운 권능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권한으로 행했을 뿐입니다. 자, 이제 어느 누가 이 교회를 참된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시저의 교회였다고 하겠습니까?
이 시기에 많은 인구가 사는 중심 도시의 감독들에게는 적은 도시나 촌락의 감독들 보다 자기네들이 우월하다는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결과 수도 근방의 감독들은 지방의 감독들을 제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감독들이 서로 평등하다는 본래의 원칙은 변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새로운 회중이 도시 변두리에 모여 교회가 생기게 될 때면 도시의 감독들은 그곳을 감독할 자들을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후에 교외 감독 또는 지역 감독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타 > 我聲高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가 끊임없이 받는 계시 (0) | 2015.11.04 |
---|---|
박해로 지연된 발전 (0) | 2015.11.04 |
왕권으로 이루어진 교회 (0) | 2015.11.04 |
고대 미대륙의 원주민과 문자 (0) | 2015.11.04 |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스러운 권능을 가진 교회 (0) | 2015.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