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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我聲高處

왕권으로 이루어진 교회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4.

로마시대 초기무렵 대도시의 교회 감독들 사이에는 극심한 적대 감정이 늘어가서 빈번히 싸웠으며 마침내는 로마 감독과 콘스탄티노풀 감독들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또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세 경쟁자들은 아랍족의 정복으로 제거되었고 나중에는 서로 파문한 후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본부로 하는 동방의 교회와 로마를 본부로 하는 서방 또는 로마교회의 두 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이 둘을 가리켜 카톨릭 혹은 세계의 교회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서로 자기편이 진실한 교회라고 주장하고 서로가 상대편을 이단 교회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황제들은 자기들이 감독들의 회의를 소집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믿고 있던 원리만으로 질서와 평정을 유지하려고 했으며, 더구나 그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들의 옳고 그름까지를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회의의 결정을 법으로 제정하여 전 제국에 효력을 내도록까지 했습니다."
위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황제가 7세기경에 살았던 포카스인데,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인 시라큐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황제는 시라큐스의 교황직을 박탈하여 보니훼이스 3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자연히 로마의 교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누구의 권위에 의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역시 정치적인 세력에 의해서라고 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포카스 황제가 그리스도 교회의 회원이었는지 아닌지 조차도 기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6세기 중엽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교회를 자기의 제국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며, 국민들의 권리인 교회내에 있어서의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평신도 동의권"마저 박탈해 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교회의 성직자만이 교회의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교회의 성직자들이 종교적인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여 복종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반대를 하면 그들은 곧 유배를 당했습니다.
당시 서방교회는 동방 교회보다 더 빨리 발전하였습니다. 로마의 감독들은 재빨리 공세적인 정책을 취함으로써 정치적인 면에서 우세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로마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서 큰 힘을 장악하여 왕들의 정책을 지시하고 세금을 걷어들였으며 국가 정책에 관여했습니다.
이런 처사로 서부 유럽의 통치자들은 분개하게 되었으며 면죄부의 판매를 반대하고 나선 마틴 루터를 도와 교황들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의 얘기는 널리 잘 알려진 것이므로 여기에 길게 쓸 필요가 없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부패한 교회에 대한 개혁을 부르짖었을 때 그는 비난을 받았을 뿐 아니라 파문까지 당했습니다.
그의 행동을 일부에서는 강력히 반대하는 반면에 독일황제들에게는 그것이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 같은 사람은 루터의 반대파에 가담해서 교황을 옹호하는 책을 내었으며 "신앙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영국의 왕들은 그 칭호를 대대로 물려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서 삭소니아 지방 출신의 프레드릭은 루터가 암살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었고 황제 앞에서 변호도 했습니다. 프레드릭은 평화론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1523년에 죽은 후 그의 동생인 존왕이 그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자기 형과는 성질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존은 루터의 교리를 믿었지만 그는 분명히 루터의 견해와 황제의 교리는 양립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황을 지지할 것을 취소하고 루터를 지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을 성취하기 위해 그는 로마 교황에서 분리하여 뚜렷한 교회를 설립코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루터와 그의 친구 매런크톤을 지명해서 예배 의식을 만들고, 루터의 견해를 확립할 교회 행정의 체제를 세우고 성직자의 의무와 월급을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개혁자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며, 이 새로운 교회는 삭소니아 지방에 있는 존왕의 후원 아래서 보호받게 되었습니다. 의식도 행해졌고, 설교도 들을 수 있어서 사람들은 종교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이 새로운 교회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권능으로 이 새 교회는 설립되었을 까요? 삭소니아 지방의 존왕의 권능으로?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었겠습니까? 그는 정치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묻지만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신성한 권능을 가졌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못하였으며 아무 권능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정치적인 권능만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비록 교황에게 충성한 몇몇 독일의 제후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이 이에 합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후에 루터교라 불리운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교리의 대부분은 그들이 "개혁"을 부르짖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을 떠난 것이 많았지만 사람들에게는 평판이 좋아서 빠르게 퍼져 갔습니다.
스칸디나비에서는 왕들이 솔선하여 카톨릭의 감독들을 배척하고, 그 대신 신교를 세워 그 교회 일을 수행해 나갈 권리를 부여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신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국민들도 불평없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데에도 성스러운 권능이 작용했을까요? 아닙니다. 변화를 초래케 한 것은 왕들의 정치적인 권력이었습니다.
또한 칼빈과 파렐이 개혁을 성취한 스위스에서도 정치적 권력이 개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 통치기구(평의회)는 카톨릭 감독들의 종교적 직원을 인수하여 신교를 세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이 변화는 비록 종교적인 것으로 위장되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치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감독의 직원을 무시해 버린 평의회는 그 자체가 감독의 기능과 임무를 떠맏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평의회는 감독을 제네바의 교회 우두머리의 직분에서 파면시킴으로써 정부위 우두머리의 직분에서도 파면시킬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와 정치의 양면에 걸친 권리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변화 때문에 시민의 권한은 교회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때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카톨릭 교회의 주도권에 굴하지 않고 대항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에 간청을 했다가 거절을 당했습니다. 화가 난 그는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의회의 협력으로 자신의 교회 즉 영국 국교를 설립했습니다.
다시 묻는 바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해진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한 정치적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설립된 교회였겠습니까? 아니면 왕의 편의와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람이 만든 것이겠습니까?
신교 운동의 여파는 여러 나라로 번져갔습니다. 모든 국가는 당시에 있던 교회를 개혁하려 하거나 성경의 개인적인 해석과 견해를 기초로 해서 새로운 교회를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하늘로부터의 계시는 주장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예배 중에 하나님의 권능의 회복은 공언되지 않았습니다. 국교는 조직되고 발달하여 그 나라를 지배한 정치적인 기관에 의해 권위가 서게 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인정되거나, 그것은 오로지 정치적 전환이었을 뿐이었지 하나님의 권능을 소유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어떤 그룹에서는 성경을 자기대로 해석하고, 연구하여 자기들의 교회를 세웠으며 결국 자기들의 뜻대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정치적인 색채는 없었지만 보통 국교와 마찬가지로 그네들의 행동이 성스러운 권능으로 인도된다고는 주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