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궁금한 이야기

혼돈과 시련의 시기에 비친 복음의 빛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0.


한국에서 선교 사업이 시작된 것은 한국 전쟁 중인 1950년대이다. 그러나 교회가 처음 한국을 접한 것은 1910년 1월, 당시 일본 선교부 회장에서 해임된 앨마 오웬 테일러가 함께 봉사한 선교사 프레드릭 에이 케인 장로와 함께 한국과 중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제일회장단은 이 지역에서 선교 사업이 가능한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여행을 승인했다.

김호직 박사의 개종
테일러 회장이 다녀간 후 수십 년 동안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화와 군국주의, 아시아-태평양 전쟁, 러시아와 중국의 압력, 북한의 공산화와 한국 전쟁 등으로 인한 혼돈과 시련의 시대를 겪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희망의 불씨가 저 멀리 미국 뉴욕 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국의 대통령이 수원농업시험소 책임자였던 김호직을 미국으로 보내 한국인의 영양 상태를 향상할 방법을 배우게 한 것이 한국 교회의 태동이 된 것이다. 김호직은 영양학 대학원 과정이 유명한 코넬
대학교를 선택했다. 1949년, 그는 박사 과정을 시작했고 동시에 뉴욕 주 이타카 지역의 여러 교회 모임에 참석하며 “참된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김호직은 코넬 대학교에서 올리버 웨이먼이라는 특별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지 않았고, 험한 말은 한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일요일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느 날, 김호직은 올리버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생활합니까?” 올리버는 그 답으로 책을 한 권 내밀었다.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가 쓴 신앙개조라는 책이었다.
김호직은 일주일 만에 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전해 받은 몰몬경도 읽었다. 그는 두 책을 모두 믿었고 올리버에게 몰몬경이 “성경보다 더 완전하고 이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참된 복음의 메시지에 목말라 있던 김호직은 이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접함으로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곧 선교사들과 토론을 시작했고, 망설임 없이 침례를 받기로 결정했다.1951년 7월 29일, 김호직은 바라던 대로 100여 년 전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침례 받은 사스케하나 강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침례를 받고 물속에서 나올 때 김호직은 귓가에 울리는 뚜렷한 음성을 들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음성은 훗날 한국 땅에 복음이 뿌리내리는 데 헌신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전쟁이 어느 정도 소강 상태에 접어든 1951년 9월, 김호직 박사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마음속에는 회복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부산으로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후기 성도 미군들이 예배 보고 있는 곳으로 직행했다. 그는 미군 모임에 방문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복음 교리를 설명하고 간증을 나누었다. 청소년들에게 영어로 복음을 가르치는 젊은 후기 성도 미군들을 위해 친절하게 통역과 설명을 해 주는 나이 든 김호직 박사의 겸손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이러한 모범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상처에 아파하던 한국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은 단비와도 같았다. 김호직 박사의 헌신적인 노력은 마침내 결실을 맺어, 1952년 8월 3일, 부산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이 침례를 받았다.
문교부 차관 등의 바쁜 공직 생활 중에도 김호직 박사는 일단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구주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내 생명과 재산과 직책을 다 포기한다 해도 상관치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려는 이와 같은 그의 결의는 그의 삶으로 증명되었다.
국내에 선교부가 없었음에도 복음은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고, 그 성장은 교회 본부의 지도자들이 보기에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54년 9월, 한국을 방문하고 유타로 돌아간 십이사도 정원회의 해롤드 비 리(1899~1973) 장로는 한국인 성도들의 신앙과 열정을 소개하며 곧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복음이 전파될 것을 소망한다고 밝혔다. 드디어 1955년 4월 7일, 제일회장단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일본 선교부를 북 극동 선교부와 남 극동 선교부로 나누며, 한국을 북 극동 선교부에 포함시켰다. 이로 인해 선교사 파견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지만 한국의 성도들은 불안한 한국 정세를 알기에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기다렸다.
선교 사업의 시작
1955년 8월 2일,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장충단 언덕에 선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조셉 필딩 스미스(1876~1972) 회장은 한국을 주님의 땅으로 헌납했다. 이로써 전임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문이 열린 것이다. 스미스 회장이 한국 땅에 다시 평화와 번영이 찾아오도록 기도하는 동안 사방은 고요했다. 헌납한 그날 저녁에 스미스 회장은 한국 지방부를 조직했고 김호직을 초대 회장으로 불렀다. 이어 부산을 방문하여 부산 지부를 조직했다.1956년 4월, 여전히 불안한 한국의 정세에도 불구하고 새로 부름받은 북 극동 선교부 회장은 리차드 데튼 장로와 돈 파월 장로를 한국에 보내야겠다는 영감을 받았다. 김호직 박사를 포함한 64명의 한국인 성도들과 후기 성도 미군 병사들의 노력이 한국 교회에 햇빛과 수분이 되어 주었고, 이제 그 위에 전임 선교사라는 양분이 더해진 것이다. 이때부터 수많은 사람이 개종했고,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초기 성도들의 신앙
이렇게 선교 사업이 활발해지고 교회가 발전하며 성도들의 신앙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종종 그들의 신앙은 시험을 받았다.한국에 최초로 부임한 헌신적인 선교사에게서 복음을 배운 사람 중에 정대판 형제가 있었다. 그는 훌륭한 목사가 되어 한국 기독교를 이끌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고, 재학 중이던 서울대학교를 그만두고 신학 대학에 입학했다.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그에게 영어로 된 몰몬경을 한 권 주었다. 책을 읽어 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신학교 수업 시간에도 몰몬경을 읽게 되었다. 동료들이 물으면 성경과 같은 책이라며 사서 읽어 보라고 권유하기까지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학교에서 난리가 났다. 정대판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이단 종파에 빠졌다는 것이었다. 급기야는 그를 교무실로 불러 몰몬경과 학교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는 이미 몰몬경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실 그 문제는 그에게 그리 크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개종 후 정신적,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신학 대학 수석 장학생으로 받던 혜택,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그에게 여러 교회 성가대에서 보내 주던 후원금 등이 모두 끊기고 주변의 친구들도 다 떠나갔다. 이런 그를 따뜻하게 맞아 준 사람이 김호직 박사였다. 그의 도움으로 다시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을 찾게 된 정대판은 후에 교리와 성약을 번역하고 찬송가를 편집하는 등 한국 교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가 번역한 찬송가의 아름다운 가사는 지금도 성도들의 심금을 울린다.
성도들의 수가 차츰 증가했다. 드디어 1962년 7월, 한국 선교부가 조직되었고 한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했던 형제가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그는 몰몬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출판하는 것을 자신의 최우선순위로 삼았다. 그 당시 이미 번역되어 있던 몰몬경 원고를 보고 여러 상황들을 숙고하고 기도한 끝에 그는 번역 작업을 당시 전임 선교사였던 한인상 장로에게 다시 맡겼다. 기존의 두 번역본을 검토한 후 한인상 장로는 성공적으로 새로운 번역본을 완성했으며 1967년, 그의 노고로 한국 최초의 우리말 몰몬경이 출판되었다.
모국어로 된 몰몬경이 나온 이후부터 많은 한국인들이 교회를 찾기 시작했다. 직접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서 선교사들이 따로 구도자를 찾아 나설 필요가 없을 정도였고, 일부 선교사들은 하루 종일 가르치는 일에 매달리기도 했다. 이렇게 교회가 발전하고 성도들의 신앙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침례받은 후 군에 입대했던 천낙서 형제는 힘들었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군복무 기간 3년 내내 제 신앙과 간증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중대장이 취한 채로 술을 여러 병 들고 와서 중대원들에게 일일이 술을 권했습니다. 동료들은 제가 후기 성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늘 제게 온 술잔을 비워 주었습니다. 허나 그날 저녁, 술 취한 우리 중대장은 저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저에게 잔을 비우라고 했습니다. 제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는 권총을 빼서 저를 향해 겨냥하면서 마시라고 명령했습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했습니다. ‘중대장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마침내 그는 ‘말릴 수 없는 놈이구나.’ 하고 말하며 권총을 내려놓았습니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막사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중대장은 저에게 와서 전날 밤의 두었다.일을 사과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종종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저와 상의하기도 했습니다.”
천 형제는 한국에서 전임 선교사로 봉사했고, 후에 미국 메릴랜드 주 알라메다 와드의 감독으로 봉사했다.
선교 사업에 대한 한국 성도들의 열정 또한 교회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회원 선교사 중 한 사람인 잠실 와드의 이성만 형제는 50대에 교회에 들어왔다. 인생에 많은 굴곡이 있었으나 그는 늘 자신의 종교 생활에 긍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구두 수선공인 그는 가게 안에 몰몬경을 쌓아 놓고서 손님들에게 읽어 보라고 권유하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몰몬경을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친척들을 포함하여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왔다. 그는 표준 경전을 수십 번 읽었으며, 죽는 순간에도 경전을 머리맡에 두었다.

한국 최초의 스테이크와 성전
한국 성도들은 스테이크 설립의 희망을 품은 채 1973년을 맞이했고, 그 해 3월 8일, 십이사도 정원회의 스펜서 더블유 킴볼(1895~1985) 회장이 한국에 최초의 스테이크를 조직했다. 역사적인 이 한국 최초의 스테이크는 8개 와드와 2개 지부로 구성되었다. 한국의 교회 회원들은 이제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이끄는 스테이크에 속하여 한국인 축복사의 축복을 받으며 예수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게 되었다.
선교 사업은 전보다 더 바빠졌다. 1973년 한 해 동안 1,200여 명이 침례를 받았다. 한국의 회원 수는 곧 8,000명을 넘어섰고, 700명 이상의 멜기세덱 신권 소유자가 있었으며, 와드와 지부의 수는 31개에 이르렀다.
12년 후,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 온 한국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간절히 원했던 성전을 갖게 되었다. 1985년 12월 14일, 당시 제일회장단 제1보좌였던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이 한국 서울 성전을 헌납했다. 한국 성도들과 오랜 인연을 맺어 온 힝클리 회장에게 한국 서울 성전의 헌납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의 추억을 회상하며 “한국인들은침략과 전쟁으로 시련을 겪어 왔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친절한 민족입니다. 저는 이 세상 어느 곳보다도 한국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라고 말했다. 힝클리 회장이 헌납 기도를 할 때, 참석한 많은 사람이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초겨울의 매서운 날씨였지만 그날 한국 서울 성전에 맴돌았던 따뜻하고 온화한 주님의 영은 모든 사람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성전에 보관 중인 그림 중에는 1970년에 침례 받은 호희순 자매를 그린 작품이 있다. 호희순 자매는 80대의 나이에 성전 사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1,500명 이상을 위해 엔다우먼트를 받았다. 2007년 한 해 동안 그녀는 6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위해 대리 의식을 받았다. 그녀의 봉사에 감명을 받은 어느 미국인 화가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서 서울 성전에 기증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그녀의 끊임없는 노력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도 성전 사업에 대한 한국 성도들의 열의는 대단했다. 그 중 마산 스테이크(현 창원 스테이크)는 1995년부터 성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했다. 매달 두 번째 금요일 오후, 전세 버스가 진해, 창원, 진주, 사천과 거제를 들러 성도들을 태우고서울로 올라갔다. 새벽 2시나 3시쯤 성전에 도착하면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 5시에 예비 의식부터 시작하여 엔다우먼트 의식까지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었다. 다음 날 안식일도 종일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회원들을 방문하며 하루를 보냈다. 당시 스테이크 회장이었던 김충석 형제는 “모두들 녹초가 되었지만 행복했습니다.”라며 그때를 회상한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교회는 성숙해 가고 있다. 한국 성도들은 가족의 가치와 선지자들이 제시한 우선순위를 따라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한국 성도들이 가정에서 하는 예배의 중요성, 즉 가정의 밤과 가족 기도, 가족 경전 공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전임 선교사로봉사하는 한국인의 수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다. 오랜 기간 혼돈과 시련의 시기를 거쳐 한국에 비친 복음의 빛은 초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신앙을 싹트게 했고, 이제 그 빛은 한국 회원들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 내고 그들의 신앙만큼이나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가도록 이끌고 있다. ◼
(서희철 20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