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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궁금한 이야기

교회의 성장과 이주, 그리고 힘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24.

스웨덴에서 교회는 쉽지 않은 상황을 겪어 왔다. 충실한 회원들이 이주해 나가고, 언론은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보도를 하며, 환경은 더욱 세속적으로 변화해 왔다. 그러나 주님은 이 특별한 땅에서 그분의 사업을 서두르고 계신다.

1849년, 브리검 영 회장은 몇몇 형제에게 세계 각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스웨덴 항해사 출신으로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교회 회원이 된 후 솔트레이크밸리로 간 욘 포슈그리옌은 영 회장에게 자신을 스웨덴에 선교사로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렇게 그는 부름을 받게 되었고, 1850년 6월에 스웨덴에 도착했다.
포슈그리옌 장로는 먼저 게블레에 사는 동생들을 방문했다. 동생 피테르는 투병 중이었는데 의사에게 시한부 판정을 받은 터였다. 포슈그리옌 장로는 동생들에게 자신이 선교 사업을 하는 목적을 설명한 뒤 피테르에게 기름을 바르고 축복해 주었고, 후에 피테르는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1850년 7월 19일, 포슈그리옌 장로는 동생 피테르에게 침례를 주었고, 피테르는 스웨덴의 첫 번째 개종자가 되었다.
포슈그리옌 장로의 여동생 에리카는 흥미로운 경험을 통해 피테르와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될 수 있었는데, 오빠가 도착하기 몇 달 전, 에리카는 늘 그렇듯 교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찬송가를 부르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말을 건넸다.
“7월 다섯째 날에 한 남자가 책 세 권을 가지고 찾아올 것이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믿는 사람은 모두 구원받을 것이오.” 오빠가 성경과 몰몬경, 교리와 성약을 들고 온 것을 본 에리카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오빠의 간증을 믿었다.1
애석하게도 포슈그리옌 장로는 석 달 후에 스웨덴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안 돼 다른 선교사들이 스웨덴에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스코너 주의 스쾨나베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았는데, 그들은 흔쾌히 복음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개종하여 1853년에 서른여섯 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지부가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스코너의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칼 캅손이 룬드의 지부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캅손 형제의 헛간에서 열린 첫 번째 교회 대회에 100명 가량이 참석했으며 이 대회는 박해를 피해 밤중에 열렸다.2

충실한 여성들
복음을 받아들인 여성들은 스웨덴에서 역량 있는 기둥 역할을 했다. 한 예로, 브리타 올스도테르 페숀은 빙오케르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1877년, 페숀 자매는가족을 부양하느라 스톡홀름으로 가서 손수 짠 옷감을 팔았다. 거기서 선교사들을 만난 그녀는 그들이 진리를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보고는 50세의 나이에 침례를 받았다.
페숀 자매의 개종과 주님의 사업을 진척하려는 충실한 노력은 더 많은 침례로 이어졌으며 빙오케르에 지부가 조직되기에 이른다. 그녀의 후손들은 아직도 교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페숀 자매의 고손녀인 라일라 크릴본 자매는 이렇게 말한다. “제 아이들과 손자 손녀 세대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 놀랍기만 해요. 현재 저희 가족 중에는 신권 형제도, 선교사도 많죠.”
또 다른 여성 개척자는 웁살라에 살았던 로비사 문테르이다. 1886년에 회원이 된 문테르 자매는 91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충실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안식일이면 모임 장소로 가서 불을 켜고 다른 회원들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을 때도 잦았다. 열한 시 정각이 되면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하나님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되지.” 그녀는 노래를 부르고기도를 하고 짧게 말씀을 한 뒤 또 다른 노래를 부르고 기도로 모임을 마쳤다.
기차로 스톡홀름에 갈 일이 있으면 문테르 자매는 교회에 관한 내용이 담긴 전단을 돌리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신앙의 유산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문테르 자매의 후손 여럿이 선교사로서 다시 스웨덴 땅에 발을 디딘 것이다.3
선교사들은 달라나 주의 스메이예바켄에도 파견되었다. 거기서 1886년에 얀손 가족이 교회 회원이 되었다. 얀손 가의 후손 중 리이드 욘손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스웨덴에 도착한 선교사였다. 그는 선교 사업을 마치고도 선교부 회장, 지역 대표, 성전 회장으로서 여러 번 스웨덴으로 돌아갔다. 얀손 가는 선지자의 아내인 프랜시스 몬슨 자매의 친정이기도 하다.

박해를 넘어서
수십 년 동안 교회 회원들은 매우 극심한 박해를 겪었다. 스웨덴인 미카엘 욘손을 포함해 여러 선교사가 수감되기도 했다. 욘손 장로는 1852년 체포되어 사슬에 묶인 채 말뫼까지 770킬로미터를 이송되었고, 성안의 감옥에 갇혀 굶주리고 헐벗으며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러다 한번은 욘손 장로가 교육을 받은 총명한 사람임을 알아본 성직자가 그를 찾아와서는 “몰몬이즘”을 부정하고 루터교에 들어온다면 도와주고 교육을 더 받게 해 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욘손 장로는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강제 추방당했다.4
1857년에 베네시보리에서 태어난 칼 아 칼쿠이스트도 충실한 선교사 중 하나였다. 열일곱 살에 복음을 가르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품은 그는 옌셰핑 주변에서 교회 책자를 배부하는 부름을 받는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그를 위해 지부의 회원 중 일곱 명의 미망인들과 그 자녀들이 정장과 장화를 구해 주었다. 칼은 겨울에 입을 외투조차 없어서 몇몇 교회 회원들은 외투를입지 않는 시간에, 하루에 몇 시간씩 자신들의 외투를 빌려 주기도 했다.5
나중에 칼 형제는 유타로 이주하여 스웨덴계 이민자인 훌다 외스테르그리옌과 결혼했다. 후에 그는 두 차례 더 스웨덴으로 돌아가 선교 사업을 했으며 그중 한 차례는 스칸디나비아 선교부의 선교부 회장으로서였다. 마지막 선교 사업 기간에 그는 교회에 관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출판물을 바로잡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한 기사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 거주한 적 있는 오슬라브 목사가 작성한 것이었는데 그는 스웨덴 내 반 몰몬 정서를 부추기도록 고용된 목회자였다. 예컨대 1912년에 오슬라브는 스벤스카 다그블라뎃 신문에 기고한 기사에서 칼쿠이스트 형제가 일부다처주의자라고 주장했다.6 칼쿠이스트 형제는 국왕인 구스타브 5세와의 면담은 물론, 여러 공개 석상에서 오슬라브의 주장을 반박하는 등의 노력을 계속했다.7
오슬라브의 주장을 반박하는 데 힘을 싣고자 현지 회원인 에이나르 요한손이 교회를 위해 대변자로 나섰다. 그는 법적 소송을 제기했는데, 오슬라브가 교회 선교부 사무실이 “백인 노예 매매상”이라는 주장을 하여 교회의 명예를 훼손했기 때문이었다.8 요한손 형제는 스톨홀름의 지부 회장으로 봉사하는 등 스웨덴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다.9
박해가 심한 시대였지만 많은 사람이 복음으로 개종했다.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때는 640명이 침례와 확인을 받은 1862년이었다. 그러나 개종자 대부분은 곧 유타로 떠났다. 당시는 유타에서 교회를 강화하기 위해 지도자들이 이민을 장려하던 시절이었다. 그 이주의 결과는 지금까지도 목격되고 있는데, 유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절반 정도가 북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다.그러나 1910년에 스톡홀름을 방문한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이제 회원들이 스웨덴에 남아서 교회를 일으킬 것을 독려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교회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모든 미국인 선교사들은 철수해야 했다. 그리고 스웨덴 현지 남성들이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요청받게 되었다. 1931년에 교회 회원이 된 프리츠 요한손은 새로운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전쟁 발발 1년 전, 그는 자기 소유의 식료품상을 처분하고 아내와 세 자녀와 함께 선교사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요한손 회장과 스웨덴인 선교사 일곱 명은 전쟁 중 중단됐던 핀란드의 선교 사업을재시작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1946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미국인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영어 회화반을 개설했고 반원 중 많은 사람이 교회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스웨덴 회원이 유타로 이주했던 탓에 그 성장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과거의 적대 관계에 대한 두려움과 선교부 회장의 권유, 성전 의식을 받을 기회 등을 이유로 1948년부터 1950년 사이에 활동 회원 250명이 스웨덴을 떠났다.
그중에는 1915년에 교회 회원이 된 오스칼과 알베티나 안데숀 가족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칼과 알베티나 부부는 회원과 가정을 이룬 일곱 자녀와 함께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시온으로 가자”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린다.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안데숀 가족 중 스물아홉이 스웨덴을 떠났다. 오스칼과 알베티나 부부는 집은 물론 자녀 셋과 손자녀 넷을 스웨덴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는사람들이 사는 사막의 도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충실한 회원들에게는 성전이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 후 안데숀 가의 회원들은 세계 각지에서
선교사와 교회의 지도자로 봉사했다. 그중에는
아프리카의 지역 회장과 스웨덴의 성전 회장도
있다.
그러나 스웨덴에 남아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교회 회원들도 있었다. 1949년에 침례를
받은 젊은 아버지였던 보 베네룬드가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스웨덴 교회에서 선교부 회장과
지역 대표 및 성전 회장으로 봉사하며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해냈다.

스웨덴에 내려진 성전의 축복
1955년, 스위스에 성전이 헌납되자 이민은
크게 감소했다. 30년 동안 스웨덴 회원들은 여러
날을 기차와 버스, 승용차, 비행기를 타고서
스위스의 성전을 방문했다. 일 년에 수 차례에
걸쳐서 방문하기도 했다.
1985년, 스톡홀름에 성전이 세워져 헌납되자
회원들은 기뻐했다. 베스테르하닝에 와드의
회원인 베릿 베네르홀름은 성전 헌납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래 갈구해 온 영광스러운
경험이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모두 흰
손수건을 흔들며 ‘호산나!’ 하고 외칠 때였죠.”성전 부지 선정에는 주님의 손길이 함께했다.
스톡홀롬의 여러 지자체와 수차례 논의한
끝에 적당한 부지 두 곳이 가려졌는데, 지역
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그중 한
곳을 제안했으나 교회 제일회장단은 다른 한
곳이 더 나을 것이란 결정을 내렸다. 후에,
현지 지도자들이 추천한 곳이 성전 부지로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 결정이
영감에 따른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스웨덴 매체로부터 긍정적인 관심을 끌어내기위해 교회는 많은 공을 들였으나 정작 그 일은 1984년에 있었던 한 가지 사건으로 성취되었다. 헤리 가의 어린 형제들이 유럽에서 가장 큰 노래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에 비친 이들의 모습으로 교회에 관한 여론이 호전되었고, 이때 많은 젊은이가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또다시 긍정적인 기사로 언론을 장식한 회원이 있었다. 35세였던 주 스웨덴 미국 대사인 그레고리 뉴웰은 다양한 공개 행사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뉴웰 부부는 2011년 스웨덴 스톡홀름 선교부의 선교부 회장으로서 스웨덴에 돌아와 2014년 7월까지 봉사했다.뉴웰 회장은 84명에서 205명으로 늘어나는 선교사들을 돌보았다. 스웨덴에는 아파트가 드물고 비싸기 때문에 그는 그 일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선교부가 신임 선교사들이 생활할 아파트를 56채나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성장
전후 스웨덴은 매우 세속적인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는 이민자도 적지 않았다. 현재 스웨덴 국민 여섯 중 하나가 국외 출신이다. 스웨덴 교회의 신회원 대다수는 이민자이다. 뉴웰 회장은 최근 개종자 일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각기 다른 28개국에서 온 형제자매들이 스웨덴에서 교회로 개종했습니다. 제 생각에 주님은 살던 땅으로부터 사람들을 분산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집합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우리 시대에 이 특별한 땅에서 사업을 서두르고 계십니다.”
교회는 회원들 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다. 연합 스테이크대회는 이웃 국가의 젊은이들을 모아 그들이 새 가정을 꾸리는 데 일조한다. 정부가 넉넉하게 양육 수당을 제공하고 출산 시 유급 휴가를 보장하는 덕분에 부부들이 비교적 큰 규모의 가정을 이룰 수도 있다.
오늘날 젊은 활동 회원 대부분이 세계 각지에서 선교사로 봉사한다. 귀환 선교사인 다비드 할디엔은 러시아의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봉사한 첫 번째 선교사였는데 이제는 여섯 자녀를 둔 훌륭한 가정의 가장이다. 할디엔 형제는 가정에 복음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녀들을 미혹할 만한 목소리들이 너무 많아요. 복음은 부모가 자녀를강화하고 자녀의 신뢰를 얻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세속적인 환경과 일부 부정적인 여론 속에서도 스웨덴에는 많은 충실한 회원들과 굳건한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이 회원들은 교회의 가르침과 활동으로 가족과 개인이 도움을 받고 있음에 감사드린다. 또한, 그들은 세계의 더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속죄에 관한 기쁜 메시지를 받아들이기를 염원한다. ◼
글쓴이는 스웨덴에 산다.
(잉에르 헤그룬드20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