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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궁금한 이야기

이탈리아의 후기 성도들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0.

이탈리아 지역의 교회 역사는 일단의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수도를 본거지로 삼았던 신약 시대부터 시작된다. 성경에는 로마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지만, 서기 57년경에 사도 바울이 로마 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교회의 지부는 “여러 해 전부터”(로마서 15:23) 그곳에 있었다.
바울은 로마 회원들이 “선함이 가득하[다]”(15:14)고 말했다. 바울은 일부 회원들과 친분이 있었고, 그의 서한에는 그가 인사를 보낸 사랑하는 성도들의 이름이 길게 적혀 있다.(16:1~15 참조)
바울은 그들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격찬하며 자신이 그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고 전했다. 그는 회원들을 몹시 보고 싶어했으며 조만간 그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회를 허락해 주시기를 바랐다.(1:8~15 참조)
드디어 로마로 가게 되었을 때 바울은 죄인의 신분이었는데, 그럼에도 교회 회원들은 바울이 도착하기만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몇몇 형제들이 그를 만나러 70여 킬로미터를 여행해서 압비오 광장까지 갈 정도였다. 형제들을 보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었다.]”(사도행전 28:15)
그 후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했으며, 기독교인들은 네로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배도에 빠져들었지만, 초기 로마 성도들은 제국의 한가운데에 신앙의 유산을 남겼으며 기독교가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주께서 감춰 두신 사람들
1849년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렌조 스노우(1814~1901) 장로는 이탈리아에 선교부를 조직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생각하던 중에 그는 발도파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발도파는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 산맥에 거주하는 신앙 공동체였다.
과거에 발도파는 종교 문제로 7세기에 걸쳐 극심한 박해를 받은 역사가 있었다. 종교 개혁이 있기 수백 년 전에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의 초기 교회가 배도에 빠졌음을 가르쳤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갈라섰고 이단으로 내몰려 여러 도시에서 쫓겨나 고문당하고 학살당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단념하는 대신 북부의 산악 지방으로 피신했다.1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발도파에 대해] 생각하자 빛이 한꺼번에 내 마음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집으로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주님께서 한 백성을 알프스 산맥 한 가운데 감춰 놓으셨다고 믿습니다.”2
이탈리아의 다른 지방은 선교 활동에 호의적이지 않은 법령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스노우 장로가 도착하기 2년 전, 피에몬테 지방에 살던 발도파는 수 세기에 걸친 박해 끝에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3 이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이 놀라운 꿈과 시현을 보고 선교사들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4
1850년 9월 19일, 스노우 장로는 두 선교 동반자를 대동하고서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를 헌납했다. 스노우 장로는 “그날부터 우리 메시지를 전할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5라고 기록했다.
그 후 4년에 걸쳐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파하며 성공과 반대를 동시에 겪었다. 그들은 선교 소책자 두 권과 이탈리아어 몰몬경을 출판했으며 많은 개종자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러나 1854년경, 선교 사업이 쇠퇴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배치되었고, 가장 충실한 개종자들은 유타로 이주했으며, 박해는 날로 커졌다. 1862년에는 모든 전도 활동이 중단되었고, 1867년에는 선교부가 폐쇄되었다.이탈리아 선교부가 운영된 기간은 단 12년에 불과했지만, 그 사이에 열두 가족과 일곱 명이 개종하여 유타로 이주했다. 복음을 받아들인 발도파는 유타 지역 교회에 힘을 불어넣었으며, 현재 수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로키 산맥의 후기 성도들과 합류하고자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난 72명의 충실한 발도파 조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6
사업을 서두름
이탈리아 선교부가 문을 닫은 이후로 이탈리아에서는 선교 사업이 거의 백 년 동안 공식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때, 미국인 후기 성도 군인들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주둔하게 되면서 이탈리아에서 복음의 빛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일요일에 모임을 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탈리아의 미군 기지에 후기 성도 군인들이 배속되면서 그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 20년에 걸쳐 주님은 그분의 사업을 서두르셨다. 이탈리아인들이 인근 국가에서 선교사들을 만나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폴리와 베로나에 있던 군인 회원 그룹들은 스위스 선교부의 지시에 따라 지부로 조직되었다. 선교부에서는 몰몬경을 이탈리아어로 다시 번역해서 출판했다. 선교사들이 이탈리아로 파견될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1964년에 이탈리아는 스위스 선교부 산하 지방부로 조직되었으며, 곧이어 이탈리아어를 하는 선교사들이 여러 도시로 보내졌다. 1966년에는 이탈리아 선교부가 조직되었는데, 기존 이탈리아 선교부가 문을 닫은 지 99년만의 일이었다.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의 에즈라 태프트 벤슨(1899~1994) 장로는 복음 전파를 위해 이탈리아 재헌납 기도를 드렸다.
선교부가 개설된 후 10년 동안, 이탈리아 지역 회원 수는약 300명에서 5,000명으로 증가했다. 1982년 무렵에는 그 수가 2배로 늘어났으며, 최근 몇 년 동안에는 더더욱 놀라운 성장을 이룩했다. 2005년부터 2010년 사이에 4개 스테이크가 새로 조직되어 스테이크 수가 일곱 개로 늘어났다. 현재 이탈리아에는 약 25,000명의 후기 성도가 있다.
교회를 세움
칠십인 정원회의 크레이그 에이 카든 장로는 1854년에 유타로 이주한 발도파 개종자 필립 카든의 수천 명에 달하는 후기 성도 후손 중 한 사람이다. 카든 장로는 처음에는 1960년대에 새로 문을 연 이탈리아 선교부 선교사로서, 나중에1980년대에는 이탈리아 로마 선교부 회장으로서 조상의 땅에서 주님의 사업이 펼쳐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1983년에 카든 장로가 선교부 회장으로 부름받았을 당시, 로마는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예배당이 임대 건물이었다. 그때는 교회 건물을 새로 지으려면 현지에 있는 회원들이 분담금을 내야 했다. 여러 채의 건물을 지으려면 많은 기금이 필요했기에 회원들이 그렇게 많은 기금을 기부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거의불가능해 보였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문제를 고려한 끝에 이탈리아 회원들은 그 해 성탄절에 사용할 돈을 모아 건축 기금으로 내기로 했다. 많은 가족들이 선물을 주고받는 대신 성탄절 트리 밑에 그들의 희생을 나타내는 벽돌 한 장을 놓았다.
“그 일은 정말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카든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 “기부금이 건물 짓는 데 필요한 금액을 넘어섰습니다. 그 일과 더불어 성도들이 꾸준히 충실한 십일조로 바쳤기에, 주님께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선교부와 로마 전역의 성도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로마에 스테이크가 조직되고 성전이 건축될 정도로 교회가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기까지는 회원들이 바친 헌신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고 확신합니다.”7
총관리 역원으로 부름을 받기 전에 카든 장로는 2005년에 이탈리아로 돌아갔고 이탈리아 로마 스테이크가 조직되는 현장을 직접 지켜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행복한 경험이었다. “그곳에 신권의 힘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로마 성전
몬슨 회장이 로마 성전 건축을 발표하자 컨퍼런스 센터 여기저기서 경탄하는 소리와 흥분 어린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이탈리아에서 위성으로 대회를 지켜보던 성도들은 기쁨에 들떠 소리쳤다. 한 자매는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는 마음 가득 기쁨에 들떠 마치 날개가 달린 양 집으로 돌아갔습니다.”로마에 성전을 세운다는 것이 왜 그렇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회원들은 성전이 차지하는 심오한 영적 중대성을 알 뿐 아니라 이 도시의 역사적 의미를 잘 안다고 카든 장로는 말한다. “로마의 통치와 권력이 한 시대를 풍미할 때 세상에 크나큰 기여를 했던 탐험가들, 예술가, 과학자, 발명가들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종교적 힘이 기독교를 세상 곳곳에 소개하는 데 일조했던 것은 축복이었으며, 이제 로마 역사의 일부가 된 그 축복 위에 주님의 성전이 은혜의 빛을 더하고 있습니다.” 2010년 기공식에서 몬슨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이곳에 건축될 성전은 후기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8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탈리아 회원들은 스위스 베른 성전을 이용해 왔으며, 일부 회원들은 그곳까지 이틀에
걸친 여행을 감수하기도 했다. 전에 로마 스테이크 회장으로 봉사했고 지금은 지역 칠십인인 마시모 드 페오 장로는 후기 성도들이 오랜 세월 행한 봉사와 희생을 주님께서 보셨으며 성전을 바라는 그들의 갈망을 인정하신다는 표시가 바로 로마 성전이라고 믿는다.
성전 건축 발표가 났을 때, 드 페오 장로는 마치 운동 경기 종료 직전에 터진 역전승의 감격과도 같은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그 기쁨은 전세에서 구원의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느꼈을 것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러한 기쁨일 것이다.성도들은 껴안고 웃음 짓고 눈물을 흘렸다. 참된 행복이 그곳에 있었다.
“이 시대에 특히 이탈리아에서, 로마에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놀랍고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드 페오 장로는 이렇게 말한다.“저는 주님께서 그분의 왕국 중에서도 이 지역을 크게 축복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글쓴이는 미국 유타에 산다.
(리아 맥클라너핸 2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