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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궁금한 이야기

후기 성도와 아메리카 인디언

by 높은산 언덕위 2021. 5. 14.

접경 지역의 다른 정착민들처럼 후기 성도들 역시 아메리카 인디언이 이미 거주하던 지역을 점령했다. 유럽에서 이주한 정착민들과 미합중국의 군사 및 정치 조직이 여러 인디언 부족을 괴멸하고 다른 사람들을 유린한 비극적인 역사는 역사가들이 잘 기록해 왔다. 일부 후기 성도를 비롯한 정착민들은 19세기 내내 수많은 분쟁을 겪는 동안 인디언들을 학대하고 죽였으며, 그들을 살기 좋은 땅에서 보호 구역으로 내몰았다.

후기 성도들은 대다수의 다른 미국인과는 달리, 인디언들을 택함 받은 백성이자 몰몬경에 나오는 백성의 후손인 동료 이스라엘 민족으로 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상속자로 간주한다. 브리검 영은 교회 회장이자 준주 지사, 그리고 인디언 문제의 관리자로서 인디언 거주 지역에 몰몬 정착지를 개척하는 동안 평화 정책을 추구했다. 후기 성도들은 인디언 언어를 배우고 교역 관계를 이룩했으며, 복음을 전파하고 일반적으로 인디언들과 사이좋게 지내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이런 정책이 계속 유지되거나 적용되지는 못했다.

후기 성도와 인디언 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모범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 교회 회원들은 인디언들과 격렬하게 충돌하기도 했다. 이 두가지 문화, 즉 유럽인과 아메리카 인디안 사이에는 토지와 재산 사용에 관한 추정 방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어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몰몬들은 이따금 인디언들을 절도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한편, 인디언들은 몰몬들이 인디언 부족의 땅에서 생산한 물자와 가축을 공유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인디언들은 몰몬들이 정착한 지역에서 유럽인들을 상대한 경험은 이전에 사냥꾼이나 모피상과 더불어 상호 유익이 되는 거래를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인디언 구역을 통과하거나 잠시 머물렀을뿐, 몰몬들이 그랬던 것처럼 토지에 대한 영구적인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오해로 두 백성 간에는 마찰과 폭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1849년 말, 한 몰몬이 셔츠를 훔쳤다고 고소했던, Old Bishop으로 알려진 한 우트 인디언을 살해하자 몰몬과 우트 족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 몰몬과 무리 두 명은 그 당시 희생자의 시신을 프로보 강에 숨겼다. 적어도 처음에는 살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브리검 영과 다른 지도자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지만 포트유타 정착민들은 인디언들의 정착민에 대한 총기 발사와 가축 및 작물 갈취를 비롯하여 인디언들로 인해 생긴 다른 어려움을 보고했다. 브리검 영은 ”여러분의 요새를 지키고 자기 일만 신경 쓰십시오. 인디언의 일은 인디언에게 맡기십시오.“라고 말하며 인내심을 발휘하라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포트유타에서의 긴장이 고조된 부분적인 이유는 현지의 몰몬들이 Old Bishop의 살해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우트 족에게 넘겨주지도 않고 물질적인 보상마저 거부했기 때문이다. 1849년과 1850년 사이의 겨울에는 몰몬 정착민에게서 우트 족 야영지에 퍼진 유행성 홍역으로 많은 인디언이 목숨을 잃고 긴장은 극에 달했다. 1850년 1월 31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있었던 교회 지도자 평의회에서 포트유타의 지도자는 우트 족의 행동과 의도가 갈수록 공격적이 되어 간다며 이렇게 보고했다. ”저들은 우리 소들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인디언들로 하여금 우리를 죽이라고 설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 지사는 이에 응하여 우트 족에 대한 군사 행동을 승인했다. 1850년 2월, 일련의 전투로 수십 명의 우트 족과 몰몬 한 명이 죽었다. 이 사건과 아울러 다른 일로 일부 후기 성도는 원주민들에게 과도한 폭력도 불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일이 있긴 했으나 성도들은 대부분 미 서부의 다른 지역 정착민보다 인디언들과 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브리검 영은 몇몇 아메리칸 인디언 지도자와 돈독한 관계를 맺었으며 백성에게 가능한 한 인디언 이웃과 평화롭게 지내라고 가르쳤다. 어떤 인디언들은 우호적이라고 간주한 ”Mormonees“ ”Mericats“로 알려진 다른 미국 정착민들과 구별 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