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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궁금한 이야기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종교적 박해

by 높은산 언덕위 2021. 5. 14.

교회가 조직된 후 처음 20년 동안 후기 성도들은 종종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1830년에 조셉 스미스가 뉴욕에서 교회를 조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셉과 교회 회원들은 뉴욕 서쪽의 오하이오와 미주리 및 일리노이에 있는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성도들은 몇 차례에 걸쳐 하나님을 예배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시온 사회를 건설하려고 힘썼지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근절 조치로 그런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폭도들은 1833년에 미주리 주 잭슨 군에서, 그리고 1838년 10월 하순 주지사가 몰몬들을 주에서 추방 또는 “근절시킨다”는 명령을 내리자 1839년 미주리 주에서, 또 1848년에는 일리노이 주 나부 시에서 후기 성도들을 쫓아냈다. 후기 성도들은 나부에서 쫓겨난 후 대평원을 가로질러 유타로 가는 힘겨운 여정에 나섰다.

이런 어려움에 직면하면서도 후기 성도들은 조셉 스미스에게 주어진 계시, 곧 주위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라는 권고대로 살려고 힘썼다. 그렇지만 오하이오와 미주리 및 일리노이의 적대자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회적, 경제적 관행이 다른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한 적대자들은 성도들의 수가 계속 늘어나자 몰몬들이 현지의 선거를 갈수록 더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데 위협을 느꼈다. 이러한 반대자들은 처음에는 말로, 그 다음에는 물리적으로 성도들을 공격했다. 또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타르를 칠하고 깃털을 꽂고 구타를 가했으며 부당하게 투옥했다. 교회의 다른 회원들도 폭력적인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가장 악명높은 사건인 혼즈밀 학살에서는 적어도 17명에 이르는 9세부터 78세까지의 소년이나 성인 남자가 살해당했으며, 미주리에서 박해 받던 기간에는 일부 후기 성도 여성이 강간 또는 성추행을 당했다. 민병대와 폭도들은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훔쳤으며, 성도들의 반대자 중에는 법적으로 자기 소유가 아닌 토지와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든 사람도 많았다.

8,000명이 넘는 후기 성도가 연루된 미주리에서의 추방이 일어난 시기는 겨울철이어서 충분한 식량과 피난처가 부족했던 수천 명의 피난민에게 고통이 가중되었으며, 그들은 때로 전염병에 노출되기도 했다. 1839년 3월, 미주리 감옥에 수감된 조셉 스미스는 추방당한 후기 성도들의 고충에 관한 보고를 받자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라고 외쳤으며, “오 우리 하나님이시여,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성도들을 기억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성도들은 미주리에서 쫓겨난 후, 처음에는 인접한 일리노이 주민들에게 환대를 받았으며 한동안 나부에서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결국 비몰몬과 교회를 저버린 자들이 공격을 재개하자 다시금 충돌이 일어났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형 하이럼 스미스는 수감 중에 보호받으리라는 주지사의 약속이 있었음에도 폭도들에게 잔인하게 순교 당했다. 이로부터 18개월 후인 1846년 2월, 성도들의 본대는 엄청난 강압 탓에 차가운 날씨 속에서 나부를 떠나야만 했다. 그들은 아이오와와 네브라스카 평원 위에 세워진, 오늘날의 피난민 수용소라 부를 만한 임시 야영지에 머물렀다. 이들 막사에 있던 성도 12명당 1명이 첫해에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연로하거나 병약한 일부 성도는 처음에는 나부에 남아 나중에 성도들의 본대와 합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846년 9월 폭도들은 이들을 쫓아냈으며, 그런 후 성전을 더렵혔다.이 성도들의 야영지를 지나던 어느 비회원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이렇게 적었다. “더디 지나가는 하루의 낮과 밤의 더위와 추위에 지쳐버린 이들은 거의 모두 불구가 된 병자들이었다. …… 그들은 병자의 연약한 호소조차 들어 줄 수 없는 형편이었고 배고파 우는 어린 아이의 시장기를 달래 줄 빵 한 조각조차 없었다. 종교적인 집단에 가한 이런 폭력의 범위는 미합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교회 지도자와 회원들은 현지 정부와 주 정부에게서 물질적인 보상을 받고자 계속 노력했다. 이러한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은 지난 잘못을 바로잡고 미래에 보호를 받기 위해 연방 정부에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후기 성도들은 그동안 겪은 박해와 아울러 자신들을 보호해주지도 않고 또 공격한 자들을 기소하기를 탐탁지 않게 여긴 정부 당국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성도들은 종교의 자유가 약속된 나라에서 종교적 박해를 당했다는 사실에 수시로 통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박해가 이어지자 1838년을 기점으로 일부 성도는 어떤 경우에 방어적인 대처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자기 나름대로 보복 조치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