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포드 우드럽의 부모는 아페크와 뷸라 톰슨 우드럽이었다. 윌포드의 모친은 그가 15개월이 되었을 때, 사망했다. 당시 세 자녀의 아버지였던 아페크는 아줄라 하트와 결혼했으며, 그녀는 후에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윌포드 우드럽의 조상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나의 증조부인 조사이야 우드럽은 거의 백 세가 되도록 사셨으며, 아주 건강했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많은 양의 육체 노동을 하셨다.” “나의 조부인 엘다드 우드럽은 조사이야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1751년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 군 파밍턴에서 태어났으며 그 역시 몸이 아주 튼튼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하트포드 군에서 수년 간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일을 했으며, 목재를 자르는 힘든 일 때문에, 그는 오른쪽 엉덩이에 류마티즘이 걸려, 사망하기 전 수년 동안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나의 부친[아페크 우드럽]은 몸이 아주 튼튼한 사람이었으며 많은 일을 하셨다. 열여덟 살에 그는 제분소와 제재소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거의 50년 간이나 그 일을 계속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 그는 하루 18시간씩 일을 했다.”“History of Wilford Woodruff” ( , Millennial Star, 1865년 3월 18일, 167~168쪽)
“1827년 4월에, 나는 숙모인 헬렌 휠러의 제분소를 맡아 3년 동안 그 일을 했다. 1830년 5월에, 나는 코네티컷 주 사우스 캔톤에 있는 도끼 제조업자인 콜린스 씨의 제분소를 맡았다. 그 해 말에 다른 기계를 설치하기 위해 제분소를 없앴다. 1831년 3월에, 나는 코네티컷 주 뉴 하트포드에 있는 리차드 비 코울스 씨 소유의 제분소를 맡았다. 1832년 봄에는 큰 형인 아즈몬과 함께, 뉴욕 주 오스웨고 군 리치몬드로 가서 농장과 제재소를 사들여 사업을 시작했다.”“History of Wilford Woodruff” ( , Millennial Star, 1865년 3월 18일, 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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