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회사·경전 안내 281 성스러운 숲과 스미스 가족 농장 조셉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 가족 농장은 회복의 초기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의 배경이 되었다. 1816년과 1817년 사이에 스미스 가족은 밀을 재배할 작정으로 뉴욕 팔마이라로 이주했다. 그들은 2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팔마이라에서 남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맨체스터에 삼림지 12만여 평을 구매하기 위해 첫 지급금을 냈다. 1818년에서 1819년으로 이어지는 겨울 동안 스미스 가족 중 열 명이 조셉 스미스 일세와 그의 아들 앨빈과 하이럼이 지은 28평짜리 통나무집으로 이사했다. 이 집은 팔마이라 군구에 있는 농장 북쪽에 있었다. 농장을 개척하는 일은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모든 가족이 토지를 개간하고, 작물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울타리와 돌담을 세우고, 헛간 및 별채를 짓는 일에 매달렸다. 가족들은 농.. 2020. 9. 21. 커틀랜드 선지자 학교가 남긴 정신적 유산 선지자 학교 1832년 12월에 조셉 스미스는 커틀랜드에서 교회의 장로들을 위한 학교를 세울 것을 지시하는 계시를 받았다. 조셉 스미스와 당시 사람들은 새로운 학교를 “선지자 학교”라고 지칭했다. 이 명칭은 하버드와 예일에 있는 신학교뿐만 아니라 목사 양성 교육을 하는 여타 학교를 흔히 지칭하기도 했다. 학교 이름을 들었을 때 구약전서에서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와 같은 선지자들 주위에 모였던 “선지자 무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커틀랜드 선지자 학교 1833년부터 1836년까지 매년 겨울마다 커틀랜드에서 열린 선지자 학교는 참여자들에게 영적 교육은 물론 세상적인 교육도 했다. 이 학교는 참여자들이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준비시키고, 또 커틀랜드 성전이 완공되었을 때 약속된 “권능의 엔다우먼트”를 받기.. 2020. 9. 20. 모든 사람에게 회복된 복음을 전파하라 선교 사업의 성장 후기 성도의 복수결혼 시행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1800년대 후반의 선교 사업은 난항을 겪었다. 정부가 여러 차례 후기 성도 선교사들에게 제약을 가했다. 윌포드 우드럽 회장은 복수결혼 종식의 계기가 된 1890년 성명서를 발표한 뒤, 주로 미국과 유럽, 태평양제도에 설립되어 있던 교회의 선교부들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라틴아메리카와 일본에 선교부들이 개설되고 통가와 그 밖의 태평양제도로도 선교 사업이 확장되었다. 선교 사업은 그 뒤로 20세기 내내 크게 성장해 나갔다. 선교부 재조정 교회가 조직되고 처음 몇십 년 동안은 교회의 선교부에 뚜렷한 지리적 경계가 없었고, 공식적으로 부름받은 선교부 회장이 늘 선교부를 감리한 것도 아니었다. 윌포드 우드럽이 교회.. 2020. 9. 20. 보물 찾기 조셉 스미스를 비난하는 자들은 그를 돈 발굴가 또는 보물 수색꾼으로 지칭하며 폄훼하려 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셉은 그 혐의를 부인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공식 역사서에서 1825년에 조사이아 스토웰이 펜실베이니아 북부에서 보물 수색 사업을 돕도록 자신을 고용했다고 인정했다. 스토웰은 그 일대에서 “선견자”, 즉 특별한 돌을 들여다보면서 사라졌거나 숨겨진 물건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평판이 자자했던 조셉에게서 도움을 얻고자 했다. “보는 것”과 “선견자”는 조셉 스미스가 성장한 문화에서 한 부분을 차지했다. 19세기 초반에는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돌과 같은 물체를 통해 사라진 물건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조셉 스미스와 그의 가족은 주위의 많은 사람처럼 이러한 풍속을 받아들였다. 1820년.. 2020. 9. 19. 이전 1 ··· 24 25 26 27 28 29 30 ··· 7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