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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신앙·간증

함께하소서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

한국 발산동에서 선교 사업을 하던 시절,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에 동반자와 나는 교회 모임이 끝난 후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와드 선교 책임자가 소개해
준 강성균이란 12세 소년에게 복음을 소개하러 나가려고 했다.
강성균은 그날 교회에 참석했고 복음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했다.
물론 우리는 강 형제를 가르칠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지만
그렇게 어린 학생을 가르치려니 긴장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확실히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로 하고, 강성균의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인 박미정 씨와 짤막한 대화를 나누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들이 교회를 참석하려 하는 것을 기뻐했으며 우리가
집에 와서 아들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구도자들
다음 날 저녁, 우리는 소년의 집에 도착해서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미정 씨는 우리에게 딸인
강수진에게도 복음을 가르쳐 주길 바랐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으로 방문했기에 박미정 씨도 선교사 토론에 함께
참석해보고 싶어 했다. 물론 우리는 듣고자 하는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서 기뻤다.
우리는 다과를 대접받고 함께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미정 씨는 곧장 공과를 시작하기보다 우리를 좀 더 잘 알고,
또 우리에게 가족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아들이 최근에 암에 걸려 투병 중이라는 것을 포함해서 가족이
겪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을 알려 주었다. 아들은 성공적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아서 암이 현재는 소강상태에 있지만,
의사들은 언제라도 재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가족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부유한 가족이 아니었기에,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해야 했다.
나는 그들의 삶에 닥친 시련에 놀랐고, 마음이 아팠다. 삶이
녹록지 않았지만, 이 가족들에게서는 한국에서 만난 그 어느
가족보다도 훨씬 더 큰 친밀함이 느껴졌다. 한국과 같은 가족
중심 사회에서 이런 면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날 저녁
이 특별한 가족을 더 잘 알게 되었으며 그들과 복음 메시지를
나눌 기회를 얻고 그 집을 나왔다.
동반자와 나는 그 주에 몇 차례 가르치기 위해 다시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우리는 처음 방문했을 때와 똑같은
따뜻함과 호의를 경험했다. 침례 이야기가 나오자 두아이는 몹시도 교회에 가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이들만큼 열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가르침에
흥미가 생기고 그것이 참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지만,
교회에 가입하는 데 요구되는 성약을 맺고 지킬 수 있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또한 우리가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남편을
두고 자기만 침례받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우리를 계속 만나려 했고 자녀와 함께 교회에 참석하려
했다.
둘째 주가 끝날 무렵, 계속 그녀의 집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우리는 남편인 강국원 씨를 만났는데 그는 겸손하고,
자애롭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는 남은 몇 토론을 우리와 함께
했고 우리가 가르친 모든 것을 곧바로 믿었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종종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느끼는 십일조와 지혜의
말씀과 같은 교리도 포함된다. 그들은 궁핍하다 할 수 있는
당시의 재정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유일한 장애물은 일요일에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요일마다 공항에서 근무를 했기에 가족과 교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빡빡한 근무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을 내어
다음 일요일에 열린 자녀의 침례식에 아내와 함께 참석했다.
자녀가 침례를 받은 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가족의 집에서
자주 만났다. 우리는 가정의 밤을 하고, 경전과 마음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나누었으며, 그들에게 와드 회원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복음과 관련된 경험을 계속하기는 했지만,
부모는 침례에 더 다가가지 못했다.
한편, 내 동반자는 이동을 가고 선교사 훈련원에서 막 나온
장로가 새로운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신앙과 활기, 열의로
가득 차 있었기에 솔직히 나는 그를 따라가기가 벅찼다.
강국원 씨와 박미정 씨를 몇 차례 만난 후 동반자는 내게
와서 이전 동반자와 내가 그들과 함께 금식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금식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사실, 나는 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가족을 만나
금식을 제안했다. 나는 그들이 아들의 건강을 위해, 그리고
강국원 씨가 교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근무 일정이 변경되게
해 달라고 자진해서 주기적으로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반자와 내가 그들과 함께 금식에
참여하자 우리의 기도는 응답되었고, 강국원 씨의 근무 일정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박미정 씨는 여전히 완강하게 침례를 받지
않으려 했다.

영감으로 주어진 한 생각
그때 동반자는 다른 기발한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소형 찬송가를 꺼내서 그들과 함께 찬송가를 불러도 되는지
물었다. 우리는 전에도 함께 노래를 불렀지만, 박미정 씨가 노래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기에 나는 그녀가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 않거나 음악이 생소하여
노래 부르는 걸 불편해한다고 추측했었다.
동반자가 그녀에게 좋아하는 찬송가가 있는지
묻자, 놀랍게도 그녀는 소녀 시절부터 좋아하는
찬송가는 “늘 함께하소서”(찬송가 97장)였다고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4부 화음으로
노래를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멜로디를, 어머니는
알토를, 동반자는 테너를, 나는 베이스를 불렀다.
방 안에 영이 강하게 임했다. 3절을 불렀을
때,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목이 잠겼고, 우리는
노래를 계속했다.
늘 함께하소서
기쁘나 슬프나
계시지 않으면
내 생애 헛되네
언제나 나의 주여
함께 하옵소서
오 주께 나가오니
복 주옵소서
우리가 마지막 절인 4절을 모두 마쳤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다. 남편이 다독여 준 후에야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저는 침례를 받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강국원과 박미정 씨의 침례식이 있었던 그
일요일 오후는 내 선교 사업 중 가장 영적인
시간으로 꼽힌다. 자녀가 침례식 순서에
참여했고, 지역의 여러 회원이 참석해서 와드의
새로운 개종자 가족에 대해 지지를 보여
주었다. 동반자와 나는 특별 음악 순서로 “늘
함께하소서”를 불렀다.
후에 나는 선교 사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대학에서 1년을 보낸 후에 여름 인턴 과정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갔고, 선교 사업 동안 만났던
여러 특별한 친구와 가족을 방문할 시간을
주말마다 마련했다. 몇 주 후에 나는 발산동으로
돌아와 이 특별한 가족을 만났다. 그 집에
도착해서, 나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박미정
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암이 재발하여 아들이
열네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가 고통스러워하며 위로의 말을 전하려고
애쓰자 강국원 씨는 다 괜찮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들은 복음을 사랑했고 충실히
교회를 다녔으며 서울 성전에서 함께 현세와
영원을 위한 인봉을 받을 날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들은 비통함을 느끼면서도 성균이를 다시 볼
것이며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박미정 씨는 또한 매일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극복할 힘을 얻고 영이 가져다주는 평안을
느끼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그 집을 떠나면서 나는 박미정
씨가 좋아하는 찬송가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균이가 떠난
후 가족이 평안하도록 축복해 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특히 박미정 씨가 개종하도록
도와준 영의 역할에 감사드린다. 이로써 가족은
성전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되었다. ◼
글쓴이는 미국 유타에 산다.
(조나단 에이치 웨스토버 20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