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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말씀·경전

팔마이라 로 가는 길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

이 기사는 선지자 조셉 스미스에 관해 두 차례에 걸쳐 다루는 연재물의 첫 번째 기사이다. 두 번째 기사인 “몰몬경의 출현”은 다음 달 리아호나에 게재될 예정이다. 이점을 분명히 아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이 전임 선교사인지 아닌지에 상관 없이 모든 후기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온 세상”(마태복음 24:14)에 전파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 복음의 순수한 원리와 교회 조직에 대한 관행을 함께 나누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데에서 우리는 조셉 스미스가 주님의 도구로서 그러한 순수한 원리와 교회 조직의 회복에 쓰였다는 점에 대해 가르치고 간증하는 것이 필수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이때에 여러분이 분명한 확신과 기쁜 마음으로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서, “일천팔백이십 년 이른 봄 아름답고 맑게 갠 날 아침”1 에 조셉 스미스가 한적한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는 것과, 세상은 다시는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그런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생애를 진지하게 연구하겠다고 지금 결심하십시오. 조셉 스미스의 삶에는 구주의 생애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삶에서도 볼 수 없는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 진실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셉의 삶을 상세히 알아 간다면, 그에 대한 존경과 애착이 깊어지는 것을 느낄 것이며, 특히 살아가면서, 또한 봉사로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위안과 격려가 될 것입니다. 아울러 세상의 증거들이 조셉은 그가 주장하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고 너무도 굳게 확신하는 현대 비평가들의 조롱에 맞서도록 조셉 스미스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한층 배가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그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정말 비범했던 사람인 조셉에 대해 조금이나마 살펴보도록 합시다. 고통의 길 첫번째 시현의 아침이 찬송가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기도”2 에 그려지듯이 영화롭고 평화로웠을 것이라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마음속에 그려 볼 때, 우리는 그 아침이 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신성하고 기이한 순간이 일어난 장소인 팔마이라로 가는 길은 이 소년 선지자와 그의 가족에게 감미롭지도 않았고, 빛으로 가득한 길도 전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의 부모인 조셉 스미스 일세와 루시 맥 스미스는 1796년에 미국 버몬트 주 턴브리지에서 결혼했습니다. 6년간 그럭저럭 성공적인 농작을 한 스미스 가족은 소매점 일을 해 보려고 가까운 랜돌프로 이사했습니다.3 보스턴에 거점을 둔 채권자들의 도움으로 조셉 일세가 매입한 상품은 새로운 고객들에게 빠르게 팔려 나갔습니다. 다만 현금 거래가 아닌, 추수를 한 뒤 갚기로 한 외상 거래였습니다. 채권자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약속된 외상값을 기다리던 조셉 일세는 새로운 투자 기회에 뛰어들었습니다. 당시에 중국 시장은 인삼 뿌리의 수요가 많았습니다. 조셉 일세는 그가 수집하고 출하 준비를 한 인삼 뿌리를 현찰로 3,000달러에 사겠다는 중간상의 제의를 받았으나, 더 위험하긴 하지만 잠정적으로 이익이 더 크게 남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그는 상품을 직접 뉴욕으로 가져가 자신의 상품을 중국에서 위탁 판매하도록 선장 한 사람과 계약을 맺었습니다. 중간상을 배제함으로써 당시로는 상당한 금액인 4,500달러의 수입이 예상되었습니다.4 불운이었는지, 사악한 계책 때문이었는지, 조셉 일세가 선적한 화물은 결국, 전에 사업 제의를 거절했던 중간상의 아들이 탄 배에 실렸습니다. 그 중간상의 아들은 상황을 악용하여 중국에서 인삼을 “고가에” 팔았으며, 사업이 망했다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차가 가득 든 상자 하나만 내 주고는 수익금을 몽땅 가로챘습니다.5 한편, 조셉 일세가 이러한 사기를 당하는 사이에, 스미스 상점에서는 대량의 재고품에 대한 대금 상환 만기일이 임박했습니다. 상환을 요구하는 채권자들이 들이닥치면서, 스미스 가족은 심각한 상황에 몰렸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루시는 수년간 아껴 온 1,000달러 상당의 결혼 패물을 내놓았고, 조셉은 턴브리지에 있는 가족 농장을 팔아 800달러을 받았습니다.6 농장은 미국 초기의 험난했던 미개척 사회에서 적어도 약간이나마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하고 장기적으로는 물리적 안전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이렇게 무일푼에 땅도 없어진 스미스 가족은계속해서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14년간 여덟 차례나 이사를 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이사를 하게 된 여러 원인 중 하나로는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었는데, 이는 1813년에 유행한 장티푸스에 스미스 가족의 모든 자녀들이 전염되어 치료비가 누적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셉은 열이 내리고 몇 주 후에 어깨에 엄청난 고통을 느꼈습니다. 의사는 그 고통의 원인을 염좌로 오진했습니다. 2주 후에 고통이 극심할 정도로 악화되었을 때, 그 의사가 돌아와 조셉의 오랫동안 지속된 발열과 관련된 감염 부위를 찾아냈습니다.7 곪은 부위를 도려 내자 고름이 1리터가량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시술도 완벽하지 못해 감염이 새로이 왼쪽 다리로 옮아갔습니다. 이 새로운 감염 때문에 결국 외과의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무릎에서 발목까지 20센티미터 가량을 절개했고, 그 덕에 고통은 조금 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감염은 뼈에까지 번졌습니다.8 이때 가족들은 다트머스 의과 대학의 최고 권위자들에게 최신 의료 자문을 구했습니다. 루시는 가장 논리적이고 관례적인 시술인 다리 절단만은 하지 말자고 고집했습니다. 그 대신에, 스미스 가족은 성공 보장이 없는 새롭고 고통스러운 시술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의사들은 조셉의 다리를 절개하여 뼈 양쪽에 구멍을 뚫기로 했습니다. 그런 다음, 감염된 모든 부위를 제거하기 위해 뼈를 크게 세 부분 도려냈습니다.9이 모든 수술 과정은 현대의 일반적인 마취 과정 없이 행해져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료진은 가족에게 조셉이 까다로운 수술 과정 동안 고통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도록 술을 먹이거나 침대에 묶도록 강력히 권고했습니다. 아직 어린 일곱 살의 소년이었던 조셉은 두 가지를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 대신, 두 가지를 요청했는데, 하나는 아버지에게 자신을 잡아 달라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어머니에게 방에서 나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10 조셉의 울부짖음이 극심해졌을 때 어머니는 밖에 있지를 못하고,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방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가 그때 본 조셉의 모습은 그녀의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되었습니다. 피로 젖은 침대에 누워 있는 조셉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얼굴에는 …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모든 모습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11 다행히도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조셉은 그 후 3년간 목발을 짚고 살았습니다. 이 혹독한 시련이 있은 후 가족은 버몬트 주 노르위치에서 새 출발을 함으로써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안정과 번영이 마침내 실현될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희망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임대한 농지에 농사를 지어 보려 시도했으나 첫 해는 흉작이었습니다. 이듬해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3년째인 1816년에 조셉 스미스 일세는 형편이 나아질 수 밖에 없다고 믿으며 한 해만 더 애써 보기로 결심 했습니다.12 1815년, 지구 반대편의 인도네시아 탐보라 산이 폭발하면서 지구 대기 중으로 엄청난 재를 분출했는데, 이것이 정상적인 기후 주기에 지장을 주었습니다. “여름이 없었던 해”란 별명이 붙은 1816년 6월부터 8월 사이, 뉴잉글랜드에는 네 차례나 서리가 내려 다시 한 번 여름 작황을 망쳐 놓았습니다.13 기근이 시작되자 수천 명이 한꺼번에 버몬트 주를 떠났고, 조셉 일세는 지금까지보다 더욱더 운명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며 알아 왔던 가족과 친구, 또 농장이 있는 32킬로미터 반경을 벗어나, 남서쪽으로 482킬로미터나 떨어진 뉴욕 북부의 팔마이라로 향했습니다. 그곳은 땅이 비옥하고 장기 융자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부득이하게 조셉 일세가 먼저떠났고, 루시와 팔 남매는 남아서 살림살이를 챙겨 뒤를 따랐습니다.14 추운 겨울에 루시와 용감한 어린 자녀들은 가진 모든 것을 썰매에, 그리고 나중에는 마차에 옮겨 실었습니다. 몇몇 채권자에게 빚을 갚고 나자 루시에게는 여비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여정이 끝날 무렵, 루시는 옷가지와 약으로 여관비를 갚았습니다. 그녀는 팔마리아에 도착했을 때 남은 “현금은 겨우 2센트”뿐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15팔마이라로 가던 중에, 썰매를 끌도록 고용되었던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가던 게이트 가족의 예쁜 두 딸을 태우겠다고 어린 조셉을 압박해서 내리게 했습니다. 아직 완치되지 않았던 조셉은 “6일간 매일 64킬로미터씩 눈 위를” 다리를 절며 걸었습니다. 조셉은 그때의 경험을 “가장 극심했던 피로와 고통”16의 시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셉의 헌신적인 형들인 앨빈과 하이럼이 조셉을 태워 달라고 간청하자, 그는 채찍 손잡이로 그들을 때려 땅바닥에 쓰러뜨렸습니다. 유티카에서, 루시에게 현금이 바닥난 것이 분명해지자 그는 마차를 훔치려고 루시 가족의 짐을 길바닥에 모두 버렸지만, 그 시도가 실패하자 루시의 가족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17 우여곡절 끝에 가족은 모두 안전하게 팔마이라에 도착했고, 조셉 스미스 일세의 팔에 안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쩌면 이 여정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나중에 조셉이 가족 여행을 기록한 원고에 덧붙인,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내용일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가는 길에 유티카에서 나를 일행의 마지막 썰매에 타고 가도록 남겨 놓았다. 그런데 썰매가 왔을 때 썰매를 몰던 게이츠 가족의 한 아들이 나를 때려눕혔다. 그러고는 나를 피가 흐르는 채로 땅바닥에 뒹굴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 낯선 사람이 와서 나를 태워 팔마이라까지 데려다 주었다.”18 이 일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없이 귀중한 보물 팔마이라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한 시현이 일어난 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5킬로미터를 더 가면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금판이 묻힌 쿠모라 산이 있습니다. 조셉이 팔마이라에 도착했을 때 주님은 예임된 선지자를 더없이 귀중한 보물이 감춰져 있는 곳으로 데려가셨습니다. 이 보물은 수세기에 걸친 보편적인 영적 암흑과 혼란이 끝나고 하늘이 다시 열렸음을 알리는 증표가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성역이 교리 및 지리적인 측면에서 그 시대의 기독교 교회들이 아는 것보다도 훨씬 더 광범위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었습니다. 이 보물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언어와 대륙에 구애됨이 없이 인간사에 전면적으로 관여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해 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보물은 참으로 순수하고 강력한 가르침을 전해 주어, 그것을 영혼에 깊이 심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과, 몹시 감미로워 사람이 소망할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고 필적할 바 없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임을 약속해 줄 것이었습니다. 필멸의 눈으로 봤을 때, 그런 인물과 그런 순간에 더 어울리는 길은 더 안락하고 효율적이며 찬사가 따르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소년이 이 시기에 이 마을에 들어옴으로써 일어나게 될, 세상을 흔들어 놓을 사건을 기리기 위해, 천 년도 더 되는 세월 전에 금판을 땅 속에 묻도록 참으로 주의 깊게 연출하신 주님께서 더 평탄하면서도 더 안락하고, 예고된 여정을 제공하실 수는 없었을까요?물론 그럴 수 있으셨지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소년에게는 그 유명한, 예언된 기름 부음도 없었습니다.(사무엘상 16:11~13 참조) 조셉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향하도록 지시하는 꿈도 없었습니다.(니파이전서 5:4~5 참조). 그의 가족이 길을 따라가며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도움이 될 신묘한 리아호나도 없었습니다.(니파이전서 16:10; 앨마서 37:38 참조) 햇빛 밝은 날, 연도에 승리의 개선을 환영하는 인파들의 환호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무개차 리무진을 타고 축하를 받으며 들어오는 길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조셉과 가족 앞에는 불행과 질병, 미숙한 판단, 자연 재해, 극심한 고통, 부당한 냉담함, 명성과는 거리가 먼 삶, 한결같은 가난으로 점철된, 굽이굽이 돌아가는 슬픔의 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 가족에게 극도로 비참한 삶만 계속 이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팔마이라로 가는 길은 평탄한 길도 아니었고, 순조롭거나 사람들 눈에 띌 만한 그 어떤 특별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축 처진 채, 절뚝거리며 피로 물든 선지자는 말 그대로 이름없는 낯선 사람의 손에, 비할 바 없는 운명을 마주할 장소로 실려 와야 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조셉 스미스의 삶과 몰몬경 출현에서 첫 번째로 기억해야 할 교훈일지 모릅니다. 실패와 재난,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일을 생각해 볼 때, 바로 그러한 것들 때문에 조셉 스미스는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꼭 있어야 할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이나 미래의 어느 날, 주위를 둘러볼 때, 여러분은 일자리를 잃었는데 여러분보다 덜 헌신적인 다른 지인이 세상적으로 성공을 할 때, 정말 중요한 순간에 큰 병에 걸려 일을 망치게 되었을 때, 유망한 직책에 다른 사람이 승진할 때, 일부 동료들이 여러분보다 언어와 토론에서 더 빠르게 발전하는 듯이 보일 때,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 동료나 와드 회원, 구도자와 여러분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때, 여러분이 어쩌지 못할 재정적인 어려움이나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소식을 집에서 보내올 때, 자신이 마치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선교 드라마에서 특징 없고 지친 단역 배우처럼 느껴질 때,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약 2,000년 전에 골고다와 동산 묘지에 있었던 사건들 이래 지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날 무대로 인도되었던 그때, 조셉 스미스가 그처럼 많은 일을 겪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제 삶과 지상에서의 운명이 선지자 조셉과 똑같을 수는 없잖아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 중요하며, 여러분과 여러분이 만나게 될 모든 사람의 영원한 잠재력이 선지자 조셉보다 덜 위대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조셉처럼, 전반적인 삶 또는 특히 선교 사업이 매우 고통스럽거나 혼란스럽거나 침체될 때, 절대로 포기하거나 굴복하거나 멈춰서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8; 강조체 추가) 하나님께서는 어린 조셉 스미스에게 하셨듯이 여러분이 마지막날에 여러분이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영광스럽게 되도록 매일 여러분을 조각하며 이끌어 주고 계십니다. ◼ 2014년 2월 15일, 프로보 선교사 훈련원 영적 모임에서 전한 “The Making of the Book of Mormon, Joseph Smith, and You”에서 발췌함. 매튜 에스 홀런드는 유타 밸리 대학 총장이다

(매튜 에스 홀런드 ,리아호나,20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