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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회사·경전 안내

다시 일리노이주로 쫏겨 나다(1839~1840년)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5.

일리노이 주 주민들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동정심을 품고 그들을 받아
주었으며, 음식과 의복과 다른 필수품들을 제공해 주었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약 5개월간 리버티 감옥에 수감된 후 1839년 4월에 일리노이 주의
퀸시에 있는 성도들과 합류했다. 조셉은 워싱턴 디 시로 가서 미합중국
대통령인 마틴 반 뷰렌을 만나, 미주리 주에서 성도들에게 가해진 잔악한
행위들에 대해 공정한 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별로 인기도 없는
몰몬들을 도와 주는 데서 오는 정치적인 결과를 두려워했으므로 성도들에 대한
도움을 거절했다
.(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219~222쪽 참조)
선지자가 워싱턴으로 가기 이전에 성도들은 일리노이 주 코머스의, 모기가
들끓는 습지를 구입했다. 그들은 땅에 배수 시설을 한 후, 나부 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나부에 거주하는 동안 십이사도는 영국 제도에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파송되었다. 십이사도 중 한 명인 올슨 하이드 장로는 유대인의
귀환을 위해 성지를 헌납하라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조셉 스미스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와 엔다우먼트를 소개했으며, 나부 성전
건축할 것을 지시했다. 조셉은 상호부조회를 조직했으며, 아브라함서를
출판했고, 교리와 성약 132편을 기록했다.(주님은 132편에서 영원한 결혼의
원리를 계시하셨고, 교회의 형제들 중 일부가 한 명 이상의 아내를 취할 것을
명하셨다. 후에 주님은 교회 형제들이 한 명의 아내만 취하도록 명하셨다.
지금까지도 계속 합당한 성도들은 세계 도처에 있는 성전에서 영원한 결혼을
할 수 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개종하여 교회로 들어왔으며 나부로 이주해 왔다. 한동안
나부의 인구와 경제는 시카고와 맞먹었다. 나부 시내와 주변에 약
15,000명이 거주함으로 인해 핸콕 군은 일리노이 주에서 가장 붐비는 군의
하나가 되었다. 이 때는 교회의 초기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번영하고 정치적인 힘이 커져 감에 따라 일리노이
주 주민들의 두려움과 시기심과 악감정도 커져 가기 시작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211~266쪽 참조)
선지자 조셉은 미 합중국 대통령 후보들에게 성도들이 미주리 주에서 잃은
재산을 되찾는 데 어떻게 도와 줄 것인지를 묻는 편지를 썼다. 어느 후보도
교회가 바라는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회원들은 1844년
1월에 조셉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조셉은 팸플릿을 발행하였으며 복음을
전하고 그를 위해 선거 운동을 하도록 신권 소유자들을 조직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269~270쪽 참조)
조셉이 살아오는 동안 늘 그랬던 것처럼 교회의 적들은 그에 대해 거짓 고소를
하고 체포 영장을 발부 받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를 괴롭혔다. 일리노이
주에서 성도들에 대한 반대가 거세짐에 따라 선지자는 주기적으로 피신해야만
했다. 1844년 6월에 나부 시의 시장이던 선지자 조셉은 시 평의회와 모임을
갖고 나부 시민들을 중상하고 성도들에 대해 더 많은 민중 폭력을 선동할
것으로 우려됐던 반몰몬 인쇄소에 대해 토의했다. 그들이 그 인쇄소를 공공의
적으로서 파괴할 것을 명령하자, 일리노이 주의 지사는 조셉 스미스에게
재판을 받도록 카테지로 갈 것을 지시했다. 주지사는 조셉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교리와 성약 135편 1~7절에 기록된 대로 선지자 조셉과 그의 형
하이럼은 카테지에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266~285쪽 참조)
조셉과 하이럼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간이 지난 후 많은 회원들은 누가 교회를
이끌 것인지 궁금해 했다. 1844년 8월 8일에 교회는 이 주제로 전체 모임을
열었다. 시드니 리그돈은 자신이 교회의 새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브리검 영도 역시 말씀을 했는데, 그 때 주님은 성도들에게
영적인 나타내심을 보여 주셨다. 회중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브리검 영이
변형된 것을 보았는데, 그의 목소리와 태도와 모습은 선지자 조셉과 같았다
.
절대 다수의 성도들이 브리검 영을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 후 삼 년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으로서 교회를 관리했으며, 1847년 12월에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받고 성임되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286~296,
334~336쪽 참조)
교회는 박해가 점점 심해짐에도 불구하고 브리검 영 회장의 지도 하에
나부에서 계속 발전했다. 칠십인 정원회가 확장되었고, 더 많은 선교사들이
부름받았으며, 1845년 12월에 교회 회원들은 나부 성전에서 자신들의
엔다우먼트를 받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꼭 두 달 후인 1846년 2월에
성도들은 로키 산맥으로 가는 경유지인 아이오와를 향해서 나부를 떠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