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졸업식은 제가 여태껏 참석했던 여느 졸업식과는 달랐습니다. 졸업생은 44명이었는데,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인 학사모와 가운 차림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하늘색 데님 셔츠와 남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졸업식이 열린 곳은 체육관도, 경기장도, 훌륭한 강당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유타에 있는 어느 교도소의 단출한 다종교 예배당이었습니다. 그 졸업반은 1년짜리 성경 학습 과정을 모두 이수했습니다. 이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가 후원하는 것이었으나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보이는 한 젊은이가 개회 기도를 했습니다. 그는 매우 긴장했으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무장 강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아 10년째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폐회 기도는 45 내지 50세쯤 되어 보이는 분이 했는데, 마치 누군가의 삼촌처럼 보이는 푸근한 인상이었습니다. 그는 2급 살인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출소한 한 젊은이가 졸업장도 받고 동료 수감자들도 격려하기 위해 다시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교도소 안에서는 정말 절망적인 관점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깥 세상에서는 더 밝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런 후 그는 외부에서 온 친구와 가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곳에서 빛을 발하는 등불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현재의 이 모습에서 우리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 변하지 못할 것입니다.” 졸업식이 끝난 후 사회를 맡은 한 수감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목이 멘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1년 중 가장 희망에 찬 날입니다. 성탄절보다 더 그렇습니다. 추수감사절보다도 더 좋습니다. 심지어 어머니날보다도 훨씬 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깨우침을 얻었고 좀 더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 후, 교도소 철문은 아내와 제 앞에서 굳게 닫혔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집에 돌아왔으나 저는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저는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감금과 자유, (그것이 깨우침 및 사랑과 맺는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그날 밤, 저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심을 느꼈습니다. 앨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자비가 공의를 앗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아니라. 조금도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를 그치시리라.”(앨마서 42:25)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7). 저는 또한 바울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엉겅퀴를 심었는데 어떻게 딸기를 수확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우리가 증오를 심는다면 풍성한 사랑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수감자들을 떠올리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둬들이는 것은 맞지만 언제나 더 많은 양을 거둬들이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작은 엉겅퀴를 심었지만, 몇 년 후에는 사방으로 마구 뻗으며 자라난 수많은 엉겅퀴를 거둬들이게 됩니다. 그것을 뽑아내지 않으면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증오를 조금만 심어도 자신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많은 증오를 거둬들입니다. 증오는 들끓어 곪게 되며 적개심이 일어 결국에는 적대적이고 악의로 차게 됩니다그러자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 그다지 괴로워할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우리 모두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아무리 두렵더라도, 공의로운 하나님을 떠올리기가 아무리 두렵더라도, 공의롭지 않은 하나님을 떠올리는 것은 훨씬 더 두려운 일입니다. 후기 성도 교리의 기본 원리란 바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는 공의입니다. 만약 공의가 우리에게 이롭게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만약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어 다른 규율을 적용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의롭게 살거나 더 사랑하거나 더 빨리 회개할 신앙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1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며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기를 그치시리라는 것을 알기에 앞으로 정진해 나갈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변덕을 부리는 분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커다란 희망을 줍니다. 하나님의 자비 그때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 그 자체이시며, 자비로운 하나님이 되어야 하시기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앨마서 42장에서 앨마는 코리앤톤에게 하나님이 공의로우셔야 한다는 점을 확실히 한 후에, 바로 그 하나님은 또한 자비로우셔야 하며 그 자비는 회개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막 교도소를 다녀왔기 때문에 그 부분이 저에게는 색다르게 와 닿았습니다. 자비가 회개를 요구한다는 생각은 저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자비의 은사를 받기 위해 교도소에 가야만 했던 것이라면, 그리고 교도소에 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경전 또는 속죄를 알게 되는 것이라면 그들의 수감생활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교도소처럼 참회할 수 있는 곳, 즉 감독이나 주님, 또는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들, 혹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찾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우리 주변에 우리만의 작은 교도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로 갈 때, 우리가 진정으로 뉘우쳐서 자비의 은사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시 되돌아가서 원상태로 돌리고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말씀드립니다만, 공의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애써 여기며 그 상태로 가기보다는 차리리 새로 시작하는 편이 훨씬 쉽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한 유명한 영국인 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모두 멸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때만 구조될 수 있습니다. [수학에서 잘못 계산한] 합계는 계산 과정을 되짚어가면서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그런 후] 그 지점부터 다시 계산함으로써 올바른 합계를 낼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계속 엉겅퀴를 심었는데 어떻게 딸기를 수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증오를 심는다면 풍성한 사랑을 받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진행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악을 바로잡을 수는 있지만 선으로 ‘발전’시킬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꼬인 것은 풀어야 합니다.”2 따라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자비는 뉘우치는 자를 주장하며”(앨마서 42:23), 악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회개의 필요성 마지막으로 떠오른 놀라운 생각은 문자 그대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모든 세대, 모든 경륜의 시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이유가 됩니다. 그분은 애초에 이 경륜의 시대에 밝히신 교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대에게 회개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 나의 계명[을] 따[르라.]”(교리와 성약 6:9) 저에게 매우 명확하고 유익하며 감동을 주는 개념으로 와 닿은 성구입니다. 저는 예전에는 회개 외에 다른 길이 없다는 말씀을 어떤 면에서는 정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필멸의 존재들과 같다면, 자신을 휘감은 사슬을 풀어야 할 영역들이 있을것이며, 벗어 버려야 할 차꼬와 족쇄가 있을 것이고, 회개해야 할 죄도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무지의 속박을 들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속박은 바로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 초반에 상투어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 중 두 가지를 말씀드리자면, “모르는 게 약이다.”와 “아는 게 병이다.”가 있습니다.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의 무지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 더 크게 여러분을 해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자초한 속박에 대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며, 우리가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 이생이나 다음 생에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종교의 원리는 무지하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으며(교리와 성약 131:6 참조) 이생에서 배우는 것은 부활할 때에 우리에게 회복될 것이고(교리와 성약 130:18 참조), 우리가 더 많은 지식을 얻는다면 장차 올 세상에서 그만큼의 유익을 얻게 되며(교리와 성약 130:19 참조), 지식을 얻은 후에야 구원받을 수 있고3, 빛과진리는 악한 자를 버리며(교리와 성약 93:37 참조), 하나님의 영광은 예지(교리와 성약 93:36 참조)라고 가르칩니다. 이 경륜의 시대 초기, 교회 전체가 대가를 치른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교리와 성약 84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 너희에게 한 가지 계명을 주노니, 너희 스스로에 관하여, 그리고 영생의 말씀에 부지런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조심하라.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함이니라. 이는 주의 말씀은 진리이며, 무엇이든지 진리인 것은 빛이요, 무엇이든지 빛인 것은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까닭이니라.”(43~45절; 강조체 추가) 궁극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면전으로 나아가게 되는 시작점은 84편에 나와 있듯이 말씀입니다. 주님은 성역을 베푸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한복음 15:7) 다시 되돌아가서 원상태로 돌리고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진심을 다해 말씀드리지만, 공의가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애써 여기며 그 상태로 가기보다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편이 훨씬 쉽고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자유의 중요성 우리 존재, 즉 과거에 전세에 있었을 때 우리의 존재나 앞으로 있게 될 우리의 존재에 관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아는 그 존재와 관련하여 한 가지 주제를 골라야 한다면, 그 주제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과 연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 회의의 상당 부분이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향해 어떻게 진보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데 할애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은 선택의지와 선택입니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자유도 포함하지만, [실제적으로 그것의 전제가 되는 자유는] 결국에는 성공을 거두게 될 자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의지를 행사하여 해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많은 안전 장치와 우주의 모든 힘이 우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이 안전 장치에는 충만한 복음 진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없을 때 참으로 우리는 속박과 감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저는 제 생애 어느 시점에 투옥되는 경험을 했다면 이 말씀을 매우 극적으로 전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천사들을 오게 해서 간수들을 놀라게 하며 감옥 문을 활짝 열게 한 베드로나 바울처럼(사도행전 12:5~11; 또한 16:25~26 참조), 또는 감옥 벽이 무너지게 한 앨마와 앰율레크처럼(앨마서 14:23~29 참조), 어둡고 암울하고 황량한 감옥에서 우리 경륜의 시대에 가장 숭고한 경전을 기록한 조셉 스미스처럼(교리와 성약 121~123편 참조)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우리는 교회 회장인 선지자가 투옥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적어도 정치적, 신체적 속박을 받거나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이 있으며 우리 삶에서 없애 버려야 할 다른 형태의 감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와서 우리가 해야 하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자비를 베풀 수 있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용기를 내어 뭔가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살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경전에 나오는 대로 “독수리 날개 위에 태우듯 [우리]를 받들어”(교리와 성약 124:18) 주실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저는 독수리 날개 위에 타는 경험을 해 왔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압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교회를 이끄시고, 이곳은 그분의 교회이며, 그분이 친히 모퉁잇돌이 되시며, 그 주위로 살아 있는 사도와 선지자들이란 기초가 놓여 있음을 압니다. 저는 우리가 다시 구주와 함께 지내게 될 것이며, 그분께 충실하다면 거리낌 없이 가뿐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분의 몸에서 결박과 구금, 우리를 위한 희생으로 목숨을 버리신 흔적을 보게 될 것임을 압니다. 저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하며,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심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죄가 만연한 곳에는 더욱 풍성한 자비가 있으며 “그 자비는 회개를 요구한다.”고 가르치는 경전과 살아 있는 선지자들의 말씀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201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