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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복음원리·은혜

그의 은혜가 족하니라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13.

한 젊은 자매가 저를 찾아와
이야기 좀 할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물론이죠.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은혜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어떤 부분이 이해가 안 가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최선을 다하면
예수님께서 나머지 부분을 채워
주신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것 자체를 못하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빚을 모두 갚아 주셨지요. 그분은 일부를
제외하고 다 갚으신 것이 아니라 전부
갚아 주셨습니다. 완전히 청산하셨지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할 일이 없는 거네요?”
“아닙니다. 자매님이 할 일이 많아요.
하지만 그 일이 빚을 갚는 일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돌아가 심판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서
얼마나 편안하게 있을 수 있으며 어떤
영광의 등급을 받을 것인가는 우리의
순종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을
믿는 신앙을 나타내 보이고, 회개하며,
성약을 맺고 지키며, 성신을 받고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공의의 대가를
조금도 치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대신 계명에 따라 그분과 같은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분께서 하신 일에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공의는 즉각적인
완전을 요구하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그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완전해질 기회를 주실 수
있으며(마태복음 5:48; 제3니파이 12:48
참조) 또한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분은 공의가 할 수
없는 용서를 해 주실 수 있으며, 대신에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이 정하신 요건을
제시하십니다.(제3니파이 28:35 참조)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엄마가 아이에게 음악 교습을
받게 해 주는 것과 유사합니다. 엄마는
피아노 선생님에게 돈을 지불합니다.
엄마는 수업료를 모두 지불했기 때문에
아이에게 뭔가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연습입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연습하면 피아노
선생님께 수업료를 지불하는 것이
됩니까? 아닙니다. 아이의 연습이 피아노
선생님한테 수업료를 지불한 엄마에게
다시 갚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연습은
엄마가 준 커다란 선물에 대해 아이가
감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 그것은
아이가 더 고차원적인 삶을 살도록
엄마가 준 놀라운 기회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엄마의 기쁨은 돈을 되돌려
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로
아이가 발전하는 모습을 볼 때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마는 연습하고 또
연습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연습하라는 엄마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고 아이가 생각한다면(“엄마, 왜
연습해야 해요? 나처럼 연습해야 하는
애들은 아무도 없다고요! 그냥 프로 야구
선수가 될래요!”) 그 아이는 아직 엄마가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더
고차원적인 삶을 살 때 인생이 얼마나 더나아질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공의의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대신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마태복음 4:19),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한복음 14:15)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해하시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시려고
하는지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자신의 죄에 따른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이 고통에는 형벌이나 대가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의 목적은 바로
변화입니다.”(The Lord’s Way [1991], 223;
강조체 추가) 이제 이것을 그 아이에게 적용해
봅시다. 그 아이는 피아노를 연습해야 하지만,
이 연습에는 형벌이나 대가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변화입니다.
속죄의 기적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살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0:10 참조) 속죄의 기적은 우리가 깨끗해지고
위안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로마서 8장 참조) 경전에는
깨끗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없다고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만(앨마서 40:26
참조) 변화하려 하지 않는 것은 그런 영광을
원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속죄의 기적은 우리가 단지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향에서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 신앙과 회개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변화하려는 소망 또한 없을 것입니다. 신앙과
회개가 없는 삶을 살겠다고 선택한 친구들과
가족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편안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함께 편하게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성약을 지키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성신의 은사도 주지
않으신다면 변화될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힘을 받을 수 없으며
오로지 자신의 힘에만 영원히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이 끝까지 견디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시간이 지나도 내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는 변화가 아니라, 언제까지나
표면적이고 외형적인 변화에만 그치게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실행을 요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절대로 성도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도와준다
“하지만 연습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전 피아노에 소질이 없어요.
자꾸 건반을 잘못 눌러요. 제대로
치려면 시간이 한없이 걸릴 거예요.” 그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배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린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잘못 눌렀다고 해서 그가 계속
연습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그가 완벽하게
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아이가 계속 연습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완전해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피아노를
배우는 예에서는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그토록 쉬운 반면 왜 하늘에 관해
배우는 상황에서는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포기합니다. 끊임없이 드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지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계속 노력해 왔지만
자신이 여전히 못 미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선택 사항이 완전과 포기, 이 두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피아노를
배울 때, 카네기 홀에서 연주하지
못하면 그냥 포기해야 한다는 선택만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배움도
시간이 걸립니다. 은혜를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며, 변화가
하나의 과정이며, 회개가 우리 삶의
패턴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은혜를
이해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지속적이며 그분의 힘을 통해 우리의
약점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고린도후서 12:9 참조) 은혜를
이해할 때 우리는 교리와 성약에
언급되어 있듯이 “[우리]가 온전하게
되기까지 계속하여 인내”(교리와 성약
67:13)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우리의 연료가 고갈될 때 힘을
주는 신성한 권능이며 우리가
언제나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발휘하는 추진 엔진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에너지원입니다. 은혜는 터널
끝에 비치는 빛이 아니라 터널 속을
지나가도록 도와주는 빛입니다. 은혜는
훗날 언젠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충만합니다.(이더서
12:27; 교리와 성약 17:8 참조) 우리의
빚을 갚을 만큼, 우리를 변화시킬 만큼,
변화의 과정이 진행되는 내내 우리를
도와줄 만큼 충분합니다. 몰몬경에서는
우리가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니파이후서 2:8)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일부 기독교도들이
믿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결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이 그토록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와 그분이 명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행할 힘을 발견하게 됩니다.(빌립보서 4:13
참조) 은혜는 하나님의 기대치가 높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권능이
존재함을 말합니다.(누가복음 1:37 참조)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충만합니다. 은혜는
충분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십시오. 탈출구나 변명거리를
찾지 마십시오. 주님과 그분의 완전한
힘만 찾으십시오. 비난할 사람을 찾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도와줄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놀라운 은혜라고
말하는, 가능하게 하는 힘과 신성한
도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브래드 윌콕스 20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