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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선교사업

내게 요구되는 것을 행하든가 아니면 그러다가 죽든지

by 높은산 언덕위 2021. 3. 24.

브리검 영은 1832년 4월에 교회에 가입한 이후, 9년 이상의 시간 동안 여러 차례 선교 사업을 다녀왔다. 브리검 영이 처음으로 선교 사업을 한 것은 그가 침례받은 직후 겨울 동안이었다. 그리고 그는 시온 진영에 참여한 것을 포함하여, 1833년부터 1837년까지 매년 여름에 다섯 번의 선교 사업을 했는데, 이 봉사는 대개 석 달에서 다섯 달에 걸쳐 이루어졌다. 1838년에 브리검 영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대영 제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는데, 이때 그들은 주님의 지시에 따라 이 선교 사업을 위해 1839년 4월 26일에 미주리주 파웨스트에서 출발했다. 브리검 영과 다른 사도들은 대영 제국으로 여행할 준비를 더 하면서 아이오와와 일리노이에서 몇 달을 보냈다. 1839년 여름, 전염병인 말라리아가 그 지역을 휩쓸었고, 그들 역시 이 역병을 피하지 못했다.

 

브리검 영의 다음 말씀을 읽으면서, 병세가 위중하여 부축 없이는 마차에 오르지 못할 상태로 출발하며 주님을 향한 봉사에 보인 그의 태도를 살펴본다. “잉글랜드로 가든지 가다가 죽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각오가 섰습니다. 난 생명과 구원의 복음 안에서 내게 요구되는 것을 행하든가 아니면 그러다가 죽든지 하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검 영[1997])

브리검 영이 선교 사업을 하면서 그의 가족들도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브리검 영이 대영 제국으로 선교 사업을 떠났을 때, 그의 가족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다음 내용으로 알수있다.

브리검 영은 부인인 매리 앤이 네 번째 자녀를 출산한 지 정확히 10일이 지난 1839년 9월 14일에 아이오와주 몬트로즈에서 대영 제국으로 떠났다. 당시 매리 앤도 마찬가지로 말라리아로 고통받고 있었다. 결혼한 이후로 매리 앤이 브리검을 선교 사업을 위해 멀리 보내는 것은 이번으로 다섯 번째였다. 그 전해에 미주리주에서 거의 전 재산을 잃고 집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브리검이 가족을 위해 매리 앤에게 줄 수 있는 돈은 고작 2.72달러뿐이었다. 브리검과 매리 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허락해 주시리라 믿었으며, 사도들이 선교 사업을 하는 동안 그 가족들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에 의지했다.

브리검 영 장로와 히버 시 킴볼 장로, 조지 에이 스미스는 대영 제국으로 선교 사업을 가기 위해 미국 동부로 향하는 동안 “브리검이 가방을 들여다보면 항상 그 속에는 다음 역까지 마차를 타고 갈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들어 있었다. 브리검은 히버가 돈을 채워 넣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기부받은 13달러 50센트를 들고 여행을 시작했지만, 마차를 타는 데만 87달러 이상을 지출했다. 그들은 어떻게 하여 여분의 돈이 여행 가방에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단지 ‘복음의 전파를 재촉하기 위해 하늘에서 보낸 보이지 않는 천사’가 행한 일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

 

브리검 영은 영국 제도 전역의 선교 사업을 확장하는 일을 총괄하는 동안 엄청난 영적 능력과 행정 능력을 보여 주었다. 브리검 영 및 다른 사도들의 지시 아래 교회는 대영 제국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했다. 1841년 4월에 대부분의 사도들이 영국을 떠날 때까지 약 7,000명에서 8,000명 정도가 교회에 가입했으며, 사도들이 떠나기 몇 달 전에 그들 중 약 1,000명은 나부로 이주하고 있었다.

“이 선교 사업 기간은 십이사도 정원회를 훈련시키고 원숙하게 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브리검 영은 장래에 자신이 나부에서, 특별히 조셉 스미스의 순교 이후에 불가피하게 발휘하게 될 지도력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 공통의 목표를 위하여 일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의 시련과 희생을 통하여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교회의 지도력 또한 시간을 앞당겨 강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때가 찬 시대의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