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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我聲高處

나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보게 되었다

by 높은산 언덕위 2019. 9. 28.


"1517년 10월31일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교수 마르틴 루터가 성서를 무기 삼아, 교황청을 상대로 도전장을 낸 그의 행동은 조직적이지도 계획적이지도 않았습니다.
한 개인의 분노와 정의감으로 세계사를 바꾼 마르틴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아이슬레벤에서 농부였다가 광산업자가 된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루터는 '엄격하고 가혹한 가정을 피해 수도원으로 도망쳤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그가 선택한 아우구스티누스 은둔 수도원도 엄격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루터는 자신을 채찍질하듯이 고행하였습니다.
스물네 살에 그는 신부가 되었고, 작센 공화국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 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교황 레오 10세였습니다.
1517년 레오 10세는 성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재원을 모으기 위해 면죄부를 팔도록 했습니다. 면죄부를 산 사람은 지은 죄를 용서받을 받을 뿐 아니라 죽은 뒤 연옥에 빠져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을 교황으로부터 받는 것이었습니다. 교황은 독일의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면죄부 판매권을 맡겼다.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요한 테첼이란 사람을 판매인으로 지정했습니다.
독일의 중심부에 있던 강국인 작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할 권한을 가진 영주인 프리드리히는 이 면죄부를 작센에서 팔아선 안된다는 명령을 내렸고,독일인의 돈이 이탈리아로 흘러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습니다. 판매인 테첼은 작센 공화국으로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접경지역 가까이 와서 면죄부를 팔았는데 작센의 비텐베르크 사람들이 면죄부를 사 와서 루터 신부에게 보여주면서 이것이 과연 효력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평소부터 로마 교황청의 부정 부패에 분노하고 있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지켜보면서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고, 교황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였고,교황이 하느님만 갖고 있는 권능을 사칭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은 자신의 선행(베드로 성당을 짓는 데 기부하는 것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고, 인간은 그리스도가 인간을 위해서 세운 공덕의 힘을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을 담은 루터의 95개조 문서가 인쇄되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루터의 이단적 주장에 열렬한 찬성과 신랄한 반론이 쏟아졌습니다.로마 교황청은 이 수도사에게 로마로 오라는 소환령을 내렸는데 종교재판에 걸어 화형시킬 것이 뻔했습니다.
루터는 작센 공화국의 영주인 프리드리히 측에 편지를 보내 독일 제후들이 독일의 신민을 이탈리아로 넘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교황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프리드리히는 이에 동의했으며, 독일을 근거로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를 잘 보호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영국교회를 만들어 카톨릭에 대항한 영국의 헨리8세가 가톨릭의 교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영국에 대한 교황의 압력을 거부하였던 것처럼 루터는 독일민족주의에 호소하여 이탈리아 교황의 명령을 무력화시켰습니다.
루터의 반역이 성공하여 개혁으로 불리게 된 데는 구텐베르그의 인쇄술, 독일 사람들의 지지, 그리고 독일영주들에 의한 루터 보호가 있었습니다.
독일영주들의 보호조치로 인해서 루터를 소환할 수 없게 된 교황은 체면을 구겼고, 타협안으로 루터를 아우구스부르크에 있던 카예탄 추기경 앞으로 불러 그의 주장을 취소시키라고 명령하여 루터가 카예탄을 만나러 갔고 이단사상을 취소하라는 그의 권고를 묵살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오게 됩니다.
루터의 주장을 담은 문서들이 인쇄되어 돌아다니자 많은 대학생들, 상인들, 문학인들이 루터를 지지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후원금을 보내자는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인쇄술의 도움으로 드디어 민중의 마음을 잡게 되었고,이에 고무된 루터는 1520년에 '개요'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출판하여 교황을 정면으로 공격하게 됩니다.
<로마는 자주빛 옷을 입은 바빌론이요, 로마 교황청은 악마의 회당이다. 우리가 도둑을 교수대로, 강도를 칼로, 이단을 불로 처형하면서 어떻게 이들 추기경과 교황, 그리고 로마라는 소돔의 온갖 하수구를 공격하지 않는단 말인가.>

결론적으로 카톡릭은 애초 교부시대부터 죽은자들의 구원사업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옥사상 즉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지 못한 사람들이 거하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지대인 연옥에 거하는 사람들이 온전해져서 천국으로 가게 해준다는 공덕축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은 감옥살이하는 범죄자들과 같아서 스스로는 그 죄를 경감할 수가 없고 이승에 있는 사람들이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 바치는 기도를 통해서,그들의 죄가 경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정해 죽은 자들을 위한 위령미사 등을 통해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를 바치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연옥이란 단어나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없지만, 마태오 복음서 12장 32절에서의 내세에서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암시 (개신교의 개역 성경에는 내세가 아닌 다가 오는 세상으로 되어 있다) 와 카톨릭에서 사용하는 외경 마카베오 하권 12장 43절에서 죄를 범하고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한 일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연옥에 대한 개념은 연옥이 로마 가톨릭의 공적 교리로 확정되기 이전, 초대교회 시절 교부들의 진술에서도 발견되는데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은 이를 돌봄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아직 내세의 정화를 요구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신도들의 기도와 순교자들의 중재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영혼이 부활하려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한 푼도 남김없이 치러야 할 교도소에 대하여 말한 적이 있습니다. 키프리아누스는 순교자들은 죽는 즉시 궁극적 구원을 얻지만, 박해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공적으로 부인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하였던 사람들은 죽은 후에 정화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진술들이 과연 연옥을 지칭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죽은 후에 영혼이 정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연옥설은 초기교회에서부터 거론되다가 1336년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교서를 통하여 로마 가톨릭의 공식 교리가 되었는데,이러한 사상이 약간 변질되긴 했으나 결국은 죽은자들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 이르게 되었고,이로 인해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종교개혁의 결과 청교도들이 생겨나서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되었고,그들의 헌법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함으로써,오랜 침묵과 암흑으로부터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초석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십수년이 지난후에 태어난 조셉 스미스에 의해서 드디어 1830년 회복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그리고 커틀랜드 성전과 나부 성전이 건립되어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의식이 회복되고 시행되었습니다.
오랜 배도의 기간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의식의 회복을 위해 조금씩 준비하고 종교개혁에 가담한 영감받은 분들과 콜럼부스와같은 탐험가를 주신것 같습니다.저는 면죄부 판매라는 사건을 지지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그안에 들어있는 공덕 축적사상 즉 죽은자를 위한 의식 즉 어떤 행위가 필요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타종교에도 이러한 사상이 죽은자를 위한 천도제와 같은 형태로 일부 남아 있습니다만 본격적으로 죽은자를 위한 의식을 하는 곳은 없는 줄로 압니다.저는 성서 역사와 교회 역사를 공부하고 연구해본 결과 '연옥설과 종교개혁 그리고 청교도와 교회회복은 모두 성전으로 향함'을 알게 되었습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예수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그냥 좋은 교회가 아니라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불멸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유일한 참된 교회입니다." (홍성주)


이글은 제 개인의 생각을 적은 글이며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