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가족
스펜서 킴볼이 선교 사업에서 돌아온 후 약 7개월쯤 지난 1917년 여름에 그는 지역 신문에서 한 공고를 보았는데, 1912년에 힐라 밸리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온 카밀라 아이어링이 힐라 아카데미에서 가정 경제를 가르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스펜서는 그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면서, 언젠가는 카밀라 아이어링과 결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우연”을 가장하여 그는 아카데미 근처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만나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버스에서 그녀와 함께 앉아서 대화를 계속했고 집으로 만나러 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카밀라의 어머니는 청년 스펜서 킴볼을 매우 좋아했다. 그녀는 그가 카밀라를 만나러 올 때마다 저녁 식사를 권했다. 그리고 딸의 구혼자의 자질에 관해 엄격한 기준을 갖고 있던 아이어링 형제도 어떤 반대도 제기하지 않았다. 31일 뒤에 스펜서는 아이어링 가에서 거의 붙어 살다시피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결정했지만, 그들의 계획은 진행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스펜서는 군에 징집될 가능성이 있어 애리조나 태처에 머물며 기다려야 했고, 따라서 두 사람은 유타에 있는 성전으로 먼 여행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스펜서와 카밀라는 아들 셋과 딸 하나, 이렇게 모두 네 자녀(스펜서 리반, 앤드류 아이어링, 에드워드 로렌스, 올리브 베스)를 두었다. 부모로서 두 사람은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과 지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고, 또한 개인적인 결정은 스스로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한 아들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자녀들이 학교나 교회 그 밖의 어디서든 뭔가를 하고 있을 때, 부모님은 얼마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자리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에 대한 관심과 자부심을 항상 보이셨습니다.
“우리 가족 안에는 소유와 지배의 관계가 아니라 교제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 행동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명령하시지 않고 격려하고 이끄셨습니다.”
이 아들은 부친에 관해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제 부친보다 영적으로 더 관대했던 분을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분은 결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고 사려 깊으셨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일반적인 필요 사항에 개의치 않는 매우 권위적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친께서 꾸밈없는 칭찬이나 감사의 말을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감사나 애정의 표현도 자신의 가족으로부터 오는 것만큼 큰 가치가 있지는 않습니다.
“부친은 가족이 자신의 인도를 따라 의롭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볼 때보다 더 큰 만족을 느끼신 적이 없었는데, 부친에게는 그것이 주님께서 자신의 노력을 인정하실 때 받는 느낌 다음으로 좋은 것이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마지막 날에 누구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누구보다도 우선 제가 선택할 분은 제 부친입니다.”(스펜스 더블류 킴볼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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