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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궁금한 이야기

스펜스 더블류 킴볼의 청소년 시절

by 높은산 언덕위 2017. 10. 27.

청소년 시절

스펜서 울리 킴볼은 1895년 3월 28일, 앤드류 킴볼과 올리브 킴볼의 열한 자녀 가운데 여섯째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의 애리조나 풍경을 회상하면서 그는 “그곳은 건조한 지역이었지만 노동자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땅이 되었습니다.”라고 적었다.4 그는 덧붙여 이렇게 기억했다. “우리는 애리조나 태처의 남쪽 끝머리에 자리한 조그만 농장에서 살았습니다. 우리 집은 남쪽과 동쪽으로 넓은 농지가 있는 길모퉁이에 있었습니다. 집 뒤에는 우물과 펌프, 풍차, 물 공급을 위한 큰 목재 탱크, 공구 건물이 있었고, 조금 더 뒤로는 매우 큰 장작 더미가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돼지우리, 울타리, 건초더미, 밭이 있었습니다.”5

스펜서는 일찍 부모님에게서 중요한 복음 교훈을 배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가축이나 가축에서 나는 소산물을 십일조로 바치기 위해 먼지가 나는 길을 어머니와 함께 걸어서 감독님의 집으로 가던 어린 소년 시절이 기억납니다. 걸어가면서 저는 ‘왜 감독님께 계란을 가져 가는 거예요?’라고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이것은 십일조 계란이야. 감독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십일조를 받으신단다.’라고 어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또 어머니는 매일 저녁 계란을 받으면 첫 번째 계란 하나는 조그만 광주리에 넣고, 나머지 아홉 개의 계란은 큰 광주리에 넣으신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6

헌신적인 봉사에 대한 앤드류 킴볼의 모범은 스펜서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스테이크 회장이 하는 일에 대한 첫인상은 제 자신의 아버지를 보면서 얻게 되었습니다. … 저는 부친께서 스테이크 사람들을 열심히 돌보아 줌으로써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께서 부친에게 주신 축복을 성취하셨다고 믿습니다. 스미스 회장은 힐러 계곡의 사람들이 ‘자녀가 부모에게 하듯이 그에게 구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부친이 보여주신 모범의 가치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분이 세워 놓은 표준은 어느 스테이크 회장에게도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7

킴볼 가족은 검소하게 살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몰랐습니다.”라고 스펜서는 기억했다. “우리가 꽤나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8 그들은 집에서 만든 옷을 물려가며 입었다. 그들의 식사는 기본적인 것으로 고기와 그들이 소유한 땅에서 재배해 수확한 것들이었다.

스펜서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도왔다.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채소밭에 물을 주기 위해 손으로 펌프질을 하여 물을 퍼 올리곤 했으며, 젖소 젖짜기, 유실수 가지치기, 울타리 수리, 그 밖의 다른 일들도 익혔습니다. 저에게는 형이 둘 있었는데, 확신하건대, 그들은 쉬운 일만 맡고 힘든 일은 모두 저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 저는 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9 아홉 살이 되면서 스펜서는 매일 소 젖을 짜고 말에게 물을 주는 동안 신앙개조, 십계명, 그리고 교회 찬송가에 나오는 노래 대부분을 외웠다.

스펜서가 11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것은 스펜서가 유년 시절에 겪은 가장 큰 시련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가족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 이후로도 여러 차례 느낀 것이지만, 사람은 거의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0 얼마 후 앤드류 킴볼은 재혼을 했고, 조세핀 클러프가 스펜서의 계모가 되었다. “조시” (그녀의 친구들이 불렀던 이름)가 스펜서의 삶에서 올리브의 자리를 온전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유능했고 인내심을 보이며 킴볼 가족을 안정시키는 데 일조했다.

청소년 시절 동안에 스펜서는 거친 땅에서 기본적인 근면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훗날 인생에서 더 큰 봉사를 하도록 준비시켜 주었던 여러 기술들을 습득했다. 그는 성악과 음악 지휘를 배워 15살 때 스테이크 지휘자로 지명되었다. 비록 자신이 “짧고 오동통한”11이라고 묘사한 손가락을 갖고 있었으나, 그는 악보를 읽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데 열중했다. 그는 향상을 거듭하여 마침내 찬송가를 연주하고 작은 오케스트라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주례 모임에서 해롤드 비 리 장로와 돌아가며 반주자로 봉사했다.

다음 이야기에도 나와 있지만 스펜서는 대부분의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스펜서의 어머니는 아이들이 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학교를 다니기에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셨다. 따라서 스펜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일년 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 보통 그는 정오에 학교에서 세 블록 떨어진 집으로 뛰어 와 가축들을 위해 펌프질로 물을 긷고, 돼지를 먹인 후에, 점심 식사를 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쉬는 시간인데 집에 와서 뭐하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는데’ 그는 정신 없이 다시 학교로 달렸다. 반 친구들은 쉬는 시간을 막 끝내고 교실에 와 있었다.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선생님은 그날 스펜서가 다른 모든 2학년 학생보다 학업이 앞서 있어서 그의 나이 또래 반으로 월반하게 된다고 발표했다.”12

초등학교를 마친 후에 스펜서는 교회 소유의 힐라 아카데미에 다녔다. 거기서 그는 꾸준하게 좋은 성적을 보였고, 운동에 참여했으며, 학생회 간부로 활동했다.

스펜서는 또한 교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성장했으며 거의 완벽한 출석 기록을 보였다. 다음 이야기에서 나타나듯이, 신권 임무 지명의 완수는 최우선 과제였다. “집사들은 그들이 맡은 임무의 일환으로 매달 금식일 전에 말을 마차에 매고는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금식 헌물을 수집하러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과일, 밀가루, 호박류, 꿀, 때로는 50센트나 그 밖의 동전 등이 담긴 병들을 모아다가 감독님께 갖다 드렸다. 아버지 앤드류도 아들에게 그 의무를 가르치는 데 열성이었기에 그날만큼은 그 어떤 다른 일도 스펜서가 헌물을 수집하러 다니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했다. 킴볼 가의 말과 마차는 집사 정원회의 일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수집 임무 지명을 받은 다른 소년이 나오지 않는 경우, 스펜서는 혼자 가서 그 일을 수행했다.”13

집과 학교 그리고 교회에서 맡은 책임 이외에도 스펜서는 아버지를 위해 비서 역할도 했다. 앤드류는 많은 편지를 썼는 데, 하루에 평균 여섯 통이었다. 스펜서는 아버지가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쓴 후 편지를 타자했다.

스펜서는 인생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이런 경험들을 통해 일의 가치, 즉 그가 평생 적용하고 가르친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훗날 70대의 나이에 사도로서 신체적으로 몹시 피곤함을 느꼈던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런 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적었다. “힘들게 하루를 시작해 어떻게 그 날을 보낼 수 있을지 스스로 궁금해지는 경우에도, … 일에 몰두하여 자신을 잊다 보면 보람찬 하루가 되었다.” (스펜스 더블류 킴볼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