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성도는 기독교도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홀런드 장로가 설명했듯이 “우리는 성지에서 흙먼지 나는 길을 걸으셨던 역사적 예수를 믿습니다. 그분이 바로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이며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친구 여러분, 오늘날 세상에는 도덕적 타락과 죄악이 만연하여 특히 젊은 층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이 그 영향을 받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도 저 못지않게 잘 아십니다. 외설물, 빈곤, 약물 남용과 낙태,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성적 타락(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간에), 거친 언행과 폭력, 잔인함과 유혹 등에 대해 여러분과 저는 걱정을 해 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딸아이들 휴대전화기나 아들들 아이패드(iPad)만큼이나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진하여 짊어진 선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죄의 세력에 맞서 힘을 모을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믿고 담대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로마서 8:31) 여러분은 그러한 확신 아래 봉사와 전도, 가르침과 일에 힘쓰고 계시며,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로마서의 그 다음 구절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기사는 2011년 3월 10일,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가 솔트레이크시티에 모인 미국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발췌한 것이다.세상 곳곳의 모든 이가 서로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떼어 내지 않도록 더욱 힘을 기울인다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로마서 8:32, 35, 37) 신학적 대화 여태껏 개신교와 후기 성도는 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19세기 초 젊은 조셉 스미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한 시현이 있은 후, 세상에 나아가 그에 관해 담대하게 외친 이래, 우리는 상호 간의 교류에서 진정한 우정을 나누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1990년대 말 이후부터 후기 성도와 개신교 학자들, 교회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하여 고무적이며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하늘의 섭리가 일부 개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고 이해를 얻으려는 정직한 노력이었으며, 쌍방 간에 존재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나 오해를 타파하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또한 그것은 참여자들이 통상적인 종교적 교류를 했다기보다는 어떤 평온한 힘에 이끌려 깊고 심오한 자극을 주고 감동을 나누었던, 사랑의 수고였습니다. 2000년 봄,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그러한 공식적 대화의 서막이 열렸습니다. 대화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참여자들은 모종의 범례나 모형, 참고할 사항을 모색했습니다. 이때 일부 후기 성도들은 의구심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과연 대결이나 논쟁, 아니면 토론을 위한 것인가? 만남의 결과, 승자나 패자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임해 줄 것인가? ‘저쪽 사람들’은 이러한 대화를 기독교 팀에 들어가려 하는 우리의 ‘탐색전’쯤으로 여기지는 않을까? 이러한 시도는 회의적인 방관자들이 용인할 수 있도록 몰몬이즘을 ‘고쳐’ 전통적인 기독교처럼 만들려는 야심찬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일부 개신교 신도들도 회의를 품었습니다. ‘저쪽 사람들’의 의중은 진심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의 전도를 시도하려는 것인가? 전통적 기독교 대부분이 채택한 근래의 신조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저쪽 사람들’이 신약을 믿는 기독교도라고 할 수 있는가? 양쪽 모두에는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릇된 신학’을 얼마만큼 상쇄할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와 같은 주제들은 대화의 일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긴장은 누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느꼈던 형식적인 분위기는 더욱 우호적이며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의견 불일치 속에서도 친절함을 잃지 않는 진정한 모습의 형제애와 자매애, 반대 의견에 대한 존중, 다른 신앙을 따르는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의무감(꼭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즉 자기 쪽 교리와 관행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상대의 것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책임 의식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에는 “상대방의 굳은 믿음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방대한 기독교계와는 조직과 지휘 체계가 다르다고 인식했기에 후기 성도 교회는 이런 대화에 교회의 공식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았으며, 교회 입장에서의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교리적 차별성을 타협하거나 믿음을 포기할 뜻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해를 받거나, 우리에게 없는 신조로 비난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결의가 훼손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악으로 매도당하는 일이 없기를 갈망합니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일선 봉사 현장에서 함께할 수 있도록 공통된 기반과 동반자를 늘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단체들이 연합하여 가정과 결혼생활을 강화하고, 미디어에 더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며, 자연재해 시 인도적 구호 노력을 베풀고, 상존하는 빈곤 문제를 다루며, 우리 시대의 사회적 쟁점에 관한 기독교도의 양심이 걸린 문제에 대해 모두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에 개신교 친구들과 손을 잡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여러분이나 저, 또는 이 땅의 책임 있는 성직자가 연단 앞에 서서 진리라고 믿는 교리를 설파하지 못하는 날이 도래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나 신성한 결혼에 관한 문제를 위시하여 최근의 사회 정치적 행태와 그로부터 야기된 법적 움직임을 볼 때, 그 예방을 위해 우리가 단호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계가 단합하여서 한 목소리를 낼수록 우리는 이런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스스로 분쟁하는 집”, 곧 거룩하지 못한 의식을 수시로 따름으로써 더욱 단합된 적에 맞서지 못하는 집에 대한 구주의 경고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누가복음 11:17 참조)
우리가 예배하는 그리스도 이런 일부 내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의견을 달리할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 불화가 없기를 바라며, 친구 여러분께 저는 예수 그리스도후기 성도 교회가 경외하고 예배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지에서 흙먼지 나는 길을 걸으셨던 역사 속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분이 바로 구약의 거룩한 여호와이며 유일한 하나님이심을 선언합니다. 그분은 신성함에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필멸의 경험에서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이었던 아들이자 아들이었던 하나님임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몰몬경에서 표현한 대로 “영원하신 하나님”(몰몬경 표제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이 아버지와 성신과 하나이며, 그 세 분이 하나임을 증거합니다. 즉, 영으로 하나이고, 힘에서 하나이며, 목적에서 하나이고, 목소리에서 하나이며, 영광에서 하나이고, 뜻에서 하나이고, 선함에서 하나이며, 은혜에서 하나입니다. 다만 신체적 형상 면에서만 별개일 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와 단합된 면에서 하나입니다.(제3니파이 11:36 참조) 그리스도는 신성한 아버지와 동정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분으로, 열두 살 때부터 실제 그분의 아버지 사업에 임했으며, 그 일을 하는 동안 완전하고 죄 없는 삶을 사심으로써 구원을 받고자 오는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셨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드린 모든 기도, 그분이 하늘에서 이끌어 내신 모든 기적, 그리고 그분이 행하신 모든 구속 사업에 관해 증거합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그분은 우리 모두를 포함한 죄인과 그러한 죄악에 대한 대속 제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시작하여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구원을 위한 거룩한 계획을 이루려고 세상의 모든 죄와 슬픔, 질병을 짊어졌으며, 온갖 고통으로 모든 땀구멍에서 피를 흘리셨다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몰몬경 앞부분에서 한 니파이 선지자는 “보니, [예수]가 십자가 위에 들리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시더라.”(니파이전서 11:33)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바로 그 주님은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보라 내가 내 복음을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준 복음이니라-곧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므로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내가 세상에 왔느니라. 또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나를 십자가 위에 들리게 하심이요”(제3니파이 27:13~14; 또한 교리와 성약 76:40~42 참조)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그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알게”(교리와 성약 46:13) 하는 것은 영의 은사입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사흘 만에 영광스러운 불멸의 몸으로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죽음이라는 육신의 끈과 지옥이라는 영혼의 굴레를 풀고, 육신과 영혼에 불멸이라는 미래를 열어 주셨음을 선포합니다. 그런 미래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으로]” 그분과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영광과 장려함이 온전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입니다.(사도행전 4:12 참조) 우리는 그분이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이며, 이번에는 영광과 권능, 위엄 가운데 만 왕의 왕, 만유의 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것임을 선언합니다. 이분이 곧 우리가 찬양하며,음으로 양으로 그분의 은혜에 의지하는 그리스도로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베드로전서 2:25)이 되시는 분입니다.
조셉 스미스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 종교의 기본 원리는 무엇입니까?” 이어서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우리 종교의 기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간증, 즉 그분은 돌아가셨고, 매장되셨으며,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종교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것에 부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후기 성도들은 부지런한 사람들, 일에 충실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적인 제자의 본분”이라 부르는 의로운 사업은 우리 신앙의 수준을 가늠하는 정확한 잣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같이 참된 신앙은 언제나 그 충실함으로 그 자체를 드러낸다고 믿습니다.(야고보서 2장 참조) 우리는 청교도들이 성약을 믿는 백성으로서 “거룩[한] 걸[음]”(교리와 성약 20:69)을 걸어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진리에 다가갔다고 가르칩니다. 구원과 영생은 값없이 주어집니다.(니파이후서 2:4 참조) 실로 그것들은 하나님의 은사 중 가장 큰 은사입니다.(교리와 성약 6:13; 14:7 참조) 그렇더라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신앙개조 제4조)을 선포하고 실천함으로써, 즉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니파이후서 2:8; 또한 니파이후서 31:19; 모로나이서 6:4 참조)를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와 같은 은사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에게는 그와 같은 신앙의 열매로 회개, 침례를 포함한 복음 의식과 성약을 받아들이는 것, 스스로 모든 불경함을 거부하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게]”(누가복음 9:23) 하며, 계명 곧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요한복음 14:15 참조) 동기를 부여하는 감사의 마음 등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와 같이 기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7) 그와 같은 마음으로 몰몬경의 한 선지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가르치며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며 …… 이는 우리의 자손들이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하여 무슨 근원을 바라보아야 할지 알게 하[고]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 생명을 고대하[게 하려 함이라.]”(니파이후서 25:26~27) 저는 제가 오늘 여러분과 이 세상에 전하는 이 간증이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안에서 이 세상의 구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다소나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기독교도의 양심에 대한 호소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공통된 헌신과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난제들을 생각해 보면, 기독교도의 양심에 대한 국가적 또는 국제적인 호소에 부응하여 단합할 수 있는 길은 분명히 있습니다. 몇 해 전, 팀 라헤이는 이렇게 썼습니다. “종교적인 미국인들이 상호 공유하는 도덕적 관심이라는 명분에 따라 함께 일한다면, 우리 선조가 미국 헌법에서보장하는 것으로 믿었던 시민 도덕 표준을 재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사는 종교적인 모든 시민은 다른 종교 신도들과 그들의 믿음에 대한 존중심을 기를 필요가 있다. 상대의 신조를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그 사람들을 존중하며 이 나라의 세속적인 사람들에 비해 서로가 더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는 있다. 지금은 종교적으로 헌신하는 모든 시민이 공동의 적에 맞서 뭉칠 때다.” 물론 다른 사람에 관한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되면 늘 기존의 관점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우리 세계관에 대해 얼마간의 재고, 재정리, 재구성은 불가피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피부색, 인종, 사회 동료, 교회나 회당이나 사원 너머 또 신조와 신념을 담은 선언서 너머를 바라볼 때, 또한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즉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보려고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뭔가 훌륭하고 값진 일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신 그 하나님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인도되는 것입니다. 이 각박하고 어수선한 세상에서 기독교적 신념과 기독교인의 동정심, 기독교인의 이해심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없습니다. 조셉 스미스는 죽음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던 1843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제가 인류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한다면, 저는 그들을 억눌러야 할까요? 아닙니다. 제 방식이 낫다고 설득할 수 없다면 저는 그들을 그들의 방식으로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저는 제 믿음을 따르도록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이성의 힘으로 설득할 것입니다. 진리는 그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까닭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구원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기독교도들은 서로 다투고 논쟁하는 일을 그치고 그들 가운데 우정과 단합의 원리를 키워야 합니다. 복천년이 도래하여 그리스도가 그분의 왕국을 다스리기에 앞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경전 중 두 작별 인사에서 표현한 사랑을 여러분께 전하며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먼저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브리서 13:20~21). 이번에는 몰몬경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충실하라 ……. 또 그리스도께서 너를 들어 올리시기를 바라며, 또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 그의 자비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그의 영광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이 영원히 네 마음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노라. 또 그 보좌가 하늘 높이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만물이 자기에게 복종하게 되기까지 그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토록 너와 함께 계시고 또 거하시기를 원하노라. 아멘.”(모로나이서 9:25~26)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 2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