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리검 영 회장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피난처를 건설함개척자들이 처음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했을 때, 그 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매우 외지고 고립되어 있는 땅이었다. 그들이 두고 떠난, 물이 풍부한 동부의 농장과 비교하면 그 곳은 사막이나 다름없었다. 그 곳에 정착하는 데는 신앙과 노력이 요구되었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1847년 말까지 이천 명이 넘는 성도들이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했으며, 네브래스카 윈터쿼터스와 아이오와에 있는 다른 임시 정착촌에 만이천 명 가량의 사람들이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합류할 날을 기다렸다. 브리검 영 회장의 영감 받은 지휘 하에, 후기 성도들은 계속해서 록키 산맥으로 집합했으며, 사막을 정복하고, 안전한 정착지를 만들고, 용기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상에 있는 많은 나라에 전파했다. 서부로 이주하는 교회한 겨울에 나부를 떠나 힘들게 아이오와를 횡단한 후에 성도들은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서쪽으로 이주를 함으로써 솔트레이크 계곡에 새로운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새로운 생활 여건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들은 동부의 가장 가까운 정착지로부터 1,600킬로미터나 떨어졌고, 태평양 연안에서도 1,280킬로미터나 떨어진 이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 곳의 기후를 겪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이 곳에서 농작물을 길러 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 곳에서 아직 어떠한 건물도 지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미시시피 강가의 아름다운 도시에서 쫓겨나 이 서부의 사막으로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전과 계시의 말씀에서 나온 시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이사야 11:12)”(성도의 벗, 1997년 7월호, 64쪽) 그 후 50년 동안 선지자 브리검 영, 존 테일러, 및 윌포드 우드럽이 내세운 “열방을 향한 이 기치”는 커다란 저항과 시련은 말할 것도 없고 평화와 성장의 세월을 겪었다. 선교사업은 멕시코, 미국의 서부, 폴리네시아, 및 유럽의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세인트 조지, 로간, 맨타이, 솔트레이크 성전 등 네 개의 성전이 완공되고 헌납되어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영원한 의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초등회가 조직되었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공되어 유타의 성도들은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교회와 몇몇 회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표면화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선교사들이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우리의 유산, 98쪽 참조) 성도들은 복수 결혼을 한 사람들의 여러 가지 권리 박탈은 물론 성전을 포함하여, 교회의 재산권까지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는 일을 겪었다. 1890년에 주님께서는 윌포드 우드럽 회장에게 복수 결혼의 관행을 종식시킬 때가 되었다는 것을 계시해 주셨다. 제일회장단의 계승교회의 차기 회장을 선택함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순교 당했을 때 많은 회원들은 교회의 운명에 대해 걱정했다. 누가 선지자를 계승하여 교회를 이끌 것인가?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최초의 제일회장단 계승이 있었을 때, 회복된 교회는 겨우 14세된 어린이에 불과했습니다. 수세기 동안 선지자도, ‘시현’도 없었습니다. 카테지에서의 탄환이 교회, 계시, 선지자와 같은 값진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한 분의 생을 끝나게 했을 때 사람들이 의심에 가득차 있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이 선교지역에서 돌아와서 그들의 돌아가신 선지자를 땅에 묻고나서 그들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을 때, 모든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선임 사도가 이미 모든 열쇠를 갖고 모세와 같이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습니다.”(Conference Report, 1970년 4월, 119) 제일회장단의 계승1. “선지자 조셉과 하이럼 스미스가 카테지 감옥에서 살해되었을 때, 십이사도 정원회의 많은 회원들과 다른 지도자들은 나부를 떠나 선교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이 지나서 그 소식을 들었다. 브리검 영은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신권 지도자의 열쇠가 여전히 교회에 있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 열쇠들은 십이사도 정원회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회원들은 주님의 선지자요, 선견자요, 계시자로서 누가 조셉 스미스의 후임자가 될지 전혀 몰랐다.” 2. “제일회장단 제1보좌였던 시드니 리그돈은 1844년 8월 3일에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나부로 왔다. 그 이전에 시드니 리그돈은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권고에 어긋나는 길을 걷기 시작하여 교회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는 이미 나부에 도착해 있던 세 명의 사도와 만나기를 거절하고, 그 대신 일요일 예배에서 성도들이 모였을 때 말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아무도 조셉 스미스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자신이 받았던 시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교회의 보호자가 지명되어야 하며, 그 보호자는 시드니 리그돈,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를 지지하는 성도들은 거의 없었다.” 3. “1844년 8월 6일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이 나부로 돌아왔다. 그는 누가 교회를 이끌어야 하는가에 관해 오로지‘하나님의 뜻’을 알기만을 원한다고 선언했다. 십이사도 정원회는 1844년 8월 8일 목요일에 모임을 소집했다. 시드니 리그돈은 아침 모임에서 한 시간 이상 말씀을 했다. 소수의 사람만이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4. “다음으로 브리검 영이 일어나서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간결하게 말했다. 브리검 영이 말씀을 할 때 조지 큐 캐넌은‘바로 조셉의 음성이었으며, 사람들의 눈에 선지자 조셉이 직접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상했다. 윌리엄 시 스테인즈는 브리검 영이 선지자의 음성과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고 간증했다. 스테인즈는‘나는 그가 바로 조셉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말씀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윌포드 우드럽 역시 그 놀라운 순간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일 내가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가 조셉 스미스가 아니었다고 확신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간증할 수 있다.’많은 사람들이 목격한 이 기적적인 나타내심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주님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브리검 영을 조셉 스미스의 후계자로 선택하셨음을 확신했다.” 5. “오후 모임에서 브리검 영은 다시 말씀했으며, 선지자 조셉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열쇠를 갖도록 십이사도를 성임했다는 것을 간증했다. 그는 십이사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번성하지 못할 것이며, 오직 사도들만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6. “영 회장은 말씀을 마친 후, 시드니 리그돈에게 말씀을 부탁했으나 그는 하지 않았다. 윌리엄 더블류 펠프스와 팔리 피 프랫이 말씀을 한 후 브리검 영이 다시 말씀했다. 그는 나부 성전을 완공하는 것, 광야로 가기 전에 엔다우먼트를 받는 것과, 경전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는 그는 조셉 스미스에 대한 사랑과 선지자의 가족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했다. 그런 후 성도들은 만장일치로 십이사도를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다.” 7. “소수의 다른 사람들이 교회 제일회장단의 권리를 주장하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후기 성도들에게 승계의 고비는 지나갔다. 선임 사도이자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이끌도록 선택한 사람이었으며, 사람들은 일치하여 그를 지지하였다.”(우리의 유산, 66~67쪽) 서부로의 대이동초기 개척자들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현재를 살펴보고 미래를 내다보는 힘을 얻기 위해 과거를 돌이켜 보는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어떤 일이 앞을 가로막고 있든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우리보다 앞서 간 사람들의 덕성을 살펴보는 일은 훌륭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별로 얻는 것도 없이 열심히 수고한 사람들의 노고를 돌이켜 보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과 그들이 세운 초기의 계획들은 너무나 잘 가꾸어져 우리가 그 훌륭한 수확을 누리고 있습니다.”( “The Faith of the Pioneers,”Ensign, 1984년 7월호, 3쪽) 성도들이 일리노이에서 그레이트 솔트레이크로 이주한 이야기는 모든 종교 역사에서 감동적인 이야기의 하나가 될 것이다. 브리검 영 회장이 나부에서 솔트레이크까지 15,000명 이상의 성도들을 인도한 것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이주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박해와 어려움과 고난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영감과 기적과 구원, 그리고 하나님과 나라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1845년부터 1847년 사이에 일어난 일을 공부하면서 이러한 상황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자신에게 묻는다. 나부를 떠날 준비를 함1.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1834년부터 성도들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록키 산맥 서쪽으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탐험가들과 함께 실제적인 부지에 대해 토론하고, 정착할 만한 적절한 장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연구했다. 1845년 말에 교회 지도자들은 서부에 관해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 2. “나부에서의 박해가 심해져 감에 따라 성도들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명백해졌다. 1845년 11월에 나부는 떠날 준비로 한창이었다. 이주하는 동안 성도들을 이끌도록 백인 조장, 오십인 조장, 십인 조장이 부름 받았다. 100개의 그룹이 각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마차 공장을 세웠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과 목수와 가구 제작자들은 밤늦게까지 재목을 다듬고 마차를 만들었다. 쇠를 구입하기 위해 회원들을 동부로 파견하였으며, 대장장이들은 여행에 필요한 물건과 새로운 시온을 개척하는 데 필수적인 농기구를 만들었다. 가족들은 식료품과 가정용품을 모았으며, 저장 용기에 말린 과일과 쌀과 밀가루와 약품을 채워 넣었다. 그들은 공익을 위해 함께 일하였으며, 그토록 짧은 기간에 할 수 있는 이상의 일들을 달성했다.”(우리의 유산, 69쪽) 겨울 여행의 시련3. “원래는 1846년 4월에 나부를 벗어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의 민병대가 성도들이 서부로 떠나는 것을 막으려 하는 위협 때문에 십이사도들과 지도층에 있던 다른 시민들은 1846년 2월 2일에 서둘러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즉시 서부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며, 2월 4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브리검 영의 지휘 하에 성도들의 첫번째 그룹이 간절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커다란 시험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늦겨울의 날씨와 뜻밖의 봄비로부터 쉴 수 있을 영구적인 야영지에 이르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었다.” 4. “수많은 성도들은 박해자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먼저 넓은 미시시피 강을 건너 아이오와 땅으로 가야 했다. 여행 길의 위험은 황소가 수많은 성도들을 실어 나르던 보트를 발로 차서 구멍을 내 보트가 잠길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한 목격자는 그 불운한 승객들이 깃털 침구와 나무 막대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판자, 또는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서, 차갑고 무자비한 파도가 움직이는 대로 물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였다. …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마차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서 보트에 있던 소들이 목적지의 강기슭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좀더 편하게 있었다.’[Juanita Brooks, ed., on the Mormon Frontier: The Diary of Hosea Stout, 2권. (1964) 1:114; 또한 1:117 참조]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배 위로 구조되어 건너편 강기슭에 닿았다.” 5. “처음으로 강을 건넌 지 2주 후, 그 강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얼음이라서 미끄럽긴 했지만 마차와 말의 무게를 감당해 주어서 보다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눈 속을 걸어갈 때 성도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몹시 어려움을 겪었다. 강 건너편의 슈가 크리크 야영지에서는 계속 바람이 불어 눈이 거의 20센티미터 정도의 높이로 쌓였다. 그 후 눈이 녹는 바람에 땅바닥은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계속 진행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텐트와 마차와 서둘러 지은 오두막에서 웅크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늘과 땅 주변의 모든 요소가 어울려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6. “여행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아이오와를 통과하는 초기 단계였다. 호세아 스타우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밤을 지내기 위해 침대 천으로 임시 천막을 지었다. 이 때 아내는 거의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고, 어린 아들도 고열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의식이 없었다.’[Juanita Brooks, on the Mormon Frontier: 1:117] 다른 많은 성도들도 역시 엄청나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우리의 유산, 69~70쪽) 모든 것 잘되리7. “성도들은 이러한 신앙과 용기와 결심을 통해 추위와 굶주림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이겨나갔다. 윌리엄 클레이튼은 불과 한 달 후에 첫 아기를 낳을 아내 디안사와 그녀의 부모들을 두고, 나부를 떠나는 첫번째 그룹에 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내가 잘 있는지 염려하면서 진흙 길을 걷고 추운 텐트에서 야영한 탓에 그는 신경이 몹시 쇠약해졌다. 두 달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내가 안전하게 출산했는지를 알지 못했으나 마침내‘건강하고 통통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윌리엄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고 여러 세대 동안 교회 회원들에게는 영감과 감사의 송가가 될 노래를 썼다. 그것은‘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라는 노래로서 유명한 그 가사에는 그의 신앙과, 역경 가운데서‘모든 것 잘되리! 모든 것 잘되리!’[James B. Allen, Trials of Discipleship: The Story of William Clayton, a Mormon(1987), 202쪽 참조]라고 노래했던 수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그들의 뒤를 따랐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의 왕국에서 희생하고 순종한 것에 대한 대가로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우리의 유산, 71쪽) 윈터쿼터스8. “성도들이 나부로부터 499킬로미터 떨어진 서부 아이오와의 정착지에 도착하는 데는 131일이 걸렸다. 그 곳은 그들이 1846년에서 1847년까지의 겨울을 지내고 록키 산맥으로 여행할 준비를 할 곳이었다. 그 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1,609킬로미터나 되는 미국의 거대한 평원을 보다 빨리 건너가는 데 도움이 될 여행 지식을 많이 익혔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111일 정도 걸려 그것을 해냈다.” 9. “많은 성도들이 미주리 강의 양쪽을 따라 정착했다. 가장 큰 정착지는 윈터쿼터스였는데 서부의 네브라스카에 있었다. 그곳은 약 3,5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에게 금세 안식처가 되었다. 성도들은 통나무 집이나 버드나무와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살았다. 또한 미주리 강의 아이오와 쪽에 있는 케인스빌이란 곳과 그 주위에는 2,500명 정도의 성도들이 살았다. 이 정착지의 생활에서 그들은 여행 중에 겪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여름에는 말라리아 열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겨울이 되어 신선한 음식을 전혀 구할 수 없을 때는 전염성 콜레라, 괴혈병, 치통, 야맹증, 심한 설사로 고통을 겪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계속되었다. 남편인 새뮤얼이 스코틀랜드로 선교사업을 떠난 메리 리차즈의 말에 의하면, 여인들은 여전히 청소하고, 다림질하고, 세탁하고, 바느질하고, 편지도 쓰며, 부족한 식료품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을 돌보는 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신학 토론, 춤, 교회 모임, 파티 및 개척자 재연과 같은 활동을 포함하여 메리는 윈터쿼터스에서의 성도들의 생활을 밝게 기록했다.” 11. “남자들은 함께 일했으며, 종종 만나서 여행 계획과 미래의 정착지에 대해 토의했다. 그들은 질서있게 협력하여 캠프 외곽의 초원에서 가축을 몰아 풀을 먹였다. 또 들판에서 일하고 정착지 주변을 지켰으며, 제분소를 만들어 움직였고, 여행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으며, 종종 과로와 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그들 중 몇몇은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들판을 갈아서 뒤따라올 성도들이 수확하게 될 작물을 심었다.” 12. “[로렌조] 영의 아들인 존은 윈터쿼터스를‘몰몬의 밸리 포지’라고 불렀다. 그는 그 곳의 공동 묘지 가까이에 살았으므로‘너무나 자주 문 앞을 지나가는 작고 슬픈 모습의 행렬’을 목격하였다. 그는 옥수수 빵과 소금에 절인 베이컨과 소량의 우유로 차려진 자기 집의 식사가‘얼마나 초라하고 늘 똑같아’보였는지 회상하면서, 걸쭉한 옥수수 죽과 베이컨에 너무나 식상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마치 약을 먹는 것과 같았고, 음식을 삼키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Russell R. Rich, Ensign to the Nations (1972), 92쪽 참조] 오직 성도들의 신앙과 헌신만이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게 해 주었다.” (우리의 유산, 71~72쪽) 몰몬 대대13. “성도들이 아이오와에 있는 동안 미 육군 병사 모집대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1846년 5월에 시작된 멕시코 전쟁에 참가할 파견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나중에 몰몬 대대로 불리게 된 이들은 미국 남부를 가로질러 캘리포니아로 행군해 가야 했으며, 돈과 의복과 양식을 받게 되어 있었다. 브리검 영은 나부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모으고 각 병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한 돈을 조달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써 남자들에게 참가하도록 격려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통해 정부와 협력하는 것은 국가에 교회 회원들의 충성심을 보여 주고, 또 그들이 공유지와 인디언 지역에 임시로 거주하는 정당한 이유를 대 주는 일이었다. 결국 541명의 남자들이 지도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입대했다. 33명의 여인과 42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14. “그 어려운 시기에 아내와 자녀들을 홀로 두고 떠나는 슬픔 때문에 대대원들에게 있어 전쟁터로 나가는 시련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윌리엄 하이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5. “이 어려운 시기에 가족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여름엔 불볕 같은 햇빛이 내리비치고, 겨울이 오면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 댈, 황량하고 쓸쓸한 외딴 평원에 마차를 제외하고는 집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16. “‘내겐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연로한 부모와 남동생 한 명과 함께 남았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가족과 헤어졌다. … 그들과 다시 만날 때가 언제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불평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in Readings in LDS Church History: From Original Manuscripts, ed. William E. Berett and Alma P. Burton, 3 vols. (1965), 2:221] 17. “몰몬 대대는 부족한 식량과 물, 그리고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미흡한 의료 혜택, 급속한 행군으로 고통을 겪으며, 남서쪽의 캘리포니아로 3,267킬로미터를 행군해 갔다. 그들은 샌디에이고와 산루이스 및 로스엔젤레스에서 점령군으로 주둔했다. 병적 기간이 끝나자 그들은 제대하여 가족들에게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대한 수고와 충성으로 인해 그들을 지휘하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8. “제대한 후, 많은 대원들이 잠시 동안 캘리포니아에 머물면서 일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북쪽의 아메리카 강으로 가서 존 셔텨 제재소에서 일했는데, 그 곳에서는 1848년에 금이 발견되어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의 골드 러시를 재촉했다. 그러나 후기 성도 형제들은 그러한 행운을 잡기 위해 캘리포니아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힘들게 아메리카의 평원을 가로질러서 서쪽의 록키 산맥으로 가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제임스 에스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했다.” 19. “‘그 이래로 나는 지상의 부가 있는 그 장소를 결코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후회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언제나 금보다 더 고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분간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땅에서 부를 보았고, 그대로 머물라는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4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고 돌아봅니다. 사람들은‘바위 밑에도 언덕 위에도 시냇물 속에도 어디에든 금이 있어 … 자넨 곧 혼자 설 수 있는 재산을 모을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무를 떠올렸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으며, 우리는 서약을 맺었고, 지켜야 할 원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그의 왕국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광야와 처녀지와 사막에 있었습니다. 누가 그들의 상태를 알겠습니까?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즐거움과 부보다 의무가 먼저였으며, 그러한 느낌으로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James S. Brown, Giant of the Lord: Life of Pioneer(1960), 120] 이 형제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의 어떤 물질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우리의 유산, 72~74) 브룩클린 호의 성도들20. “대부분의 성도들이 나부에서 육로를 통해 록키 산맥으로 갔지만, 미국 동부의 어떤 성도들은 바다를 통해 여행했다. 1846년 2월 4일에 70명의 남자와 68명의 여자, 그리고 100명의 어린이들이 브룩클린 호를 타고 뉴욕 항에서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27,358킬로미터를 여행했다. 그 항해 동안 애틀랜틱과 퍼시픽이라는 이름의 어린이 두 명이 태어났고, 12명이 죽었다.” 21. “6개월 동안의 여행은 몹시 힘들었다.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 승객은 몹시 붐볐고, 음식과 물도 모두 형편없었다. 케이프혼을 돈 후 그들은 후안 페르난데즈 섬에 상륙하여 5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캐롤린 아우구스타 퍼킨스는‘다시 한 번 단단한 땅을 보고 밟는 것은 선상 생활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그 순간을 즐겼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은 신선한 물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았으며, 과일과 감자를 모으기도 하고, 물고기와 뱀장어를 잡기도 하고, ‘로빈슨 크루소 동굴’을 탐험하며 섬을 돌아다니기도 했다.”[Caroline Augusta Perkins, quoted in “The Ship Brooklyn Saints,”Our Pioneer Heritage (1960), 506] 22. “1846년 7월 31일에 그들은 심한 폭풍우와 부족해지는 식량과 오랫 동안의 항해로 점철된 여행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곳에 머물러서 뉴호프라는 이름의 거주지를 세웠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레이트 베이진에 있는 성도들과 합류하기 위해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갔다.”(우리의 유산, 74~75) 계속되는 집합23. “미국 전역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충실한 개종자들이 말을 타거나 걷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교통 수단을 통해 자신의 나라와 고향을 등지고 성도들과 합류하여 록키 산맥으로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24. “1847년 1월에 브리검 영 회장은 영감 받은‘이스라엘 진영에 관한 주의 말씀과 뜻’(교리와 성약 136:1)을 발표했다. 그것은 서부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을 다스리는 헌법이 되었다. 대대가 조직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도록 책임이 주어졌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악과 탐욕과 다툼을 버려야 했다. 또 그들은 즐거우면 음악과 기도와 춤으로 감사를 보여야 했다. 주님은 영 회장을 통해 성도들에게‘가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대로 행하고 너희 원수를 두려워 말라’(교리와 성약 136:17)고 하셨다.” 25. “첫번째 개척자 그룹이 윈터쿼터스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팔리 피 프랫이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존 테일러가 영국 성도들의 선물을 갖고 뒤따라 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테일러 형제가 영국 회원들의 사랑과 신앙의 증거로써 여행자들을 돕기 위해 보낸 십일조를 갖고 도착했다. 그는 또한 개척자들이 행로를 계획하고 주위 환경에 대해 알게 해 주는 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고 입증된 과학 기구를 가져 왔다. 1847년 4월 15일에 브리검 영이 이끄는 첫번째 대대가 출발했다. 그 후 20년에 걸쳐 대략 62,000명의 성도가 그들을 따라 시온에 집합하기 위해 마차와 손수레로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26. “도중에는 어려움 뿐만 아니라 놀라운 풍경도 이 여행자들을 기다라고 있었다. 조셉 모이너는 솔트레이크 계곡에 들어가기 위해‘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버팔로 떼와 커다란 삼나무 언덕과 같이 이전엔 결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광대한 지역에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27. “또한 성도들은 육체적인 피곤을 잊을 수 있도록 신앙을 고무시켜 주는 일들을 경험했다. 하루 종일 여행하고 모닥불에 요리한 음식을 취하고 나서, 남자와 여자들은 무리지어 모여서 그 날의 활동을 논의했다. 그들은 복음 원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며 춤도 추고 함께 기도했다.” 28. “성도들이 서서히 서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죽음이 자주 그들을 찾아왔다. 1850년 6월 23일에 크랜달 가족의 수는 열다섯이었다. 그 주가 끝날 때까지 심한 전염성 콜레라로 가족 중 일곱 명이 죽었다. 다음 며칠 동안에 다섯 명이 더 죽었다. 그 후 6월 30일에 크랜달 자매가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 29. “성도들은 비록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여행하는 중에 많은 시련을 겪기는 했지만 단합, 협동, 낙천적인 정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신앙과 주님에 대한 헌신으로 함께 결합하여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찾았다.”(우리의 유산, 75~76) 이 곳이 바로 그 곳이다30. “1847년 7월 21일에 첫번째 개척자 대대의 올슨 프랫과 에라스터스 스노우가 이주자들을 앞에서 이끌고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람이 간신히 헤치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풀과 농사 짓기에 좋은 땅과 계곡 전체를 흘러 다니는 여러 개의 작은 냇물을 보았다. 3일 후에 장티푸스를 앓고 있던 브리검 영 회장을 태운 마차가 계곡으로 들어서는 협곡 입구에 닿았다. 영 회장은 그 광경을 둘러보면서 그들의 여행에 대해 예언적인 축복을 해 주었다. ‘충분하다. 이 곳이 바로 그 곳이다.’” 31. “뒤따르던 성도들도 산에서 빠져나오자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부의 태양에 어슴프레 빛나는 소금 호수가 있는 그 계곡은 시현과 예언의 대상이었으며, 그들과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땅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피난처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록키 산 중의 강대한 백성이 될 것이었다.” 32. “몇 년 후에 영국에서 온 개종자인 리오 그리피스 베이커는 그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시는 … 네모들을 불러 모은 것처럼 네모지게, 혹은 구획으로 반듯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구획은 10에이커였으며 그것은 8개의 지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지구에 집이 한 채씩 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내 느낌을 잘 분석할 수는 없지만 아마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하는 동안 나와 나의 가족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느낌이 가장 컸던 것 같다.’”[ “Jean Rio Griffiths Baker Diary,”1851년 9월 29일; in LDS Church Archives] (우리의 유산, 76~77쪽) 오늘날 사람들이 몰몬 개척자들이 간 길을 따라갈 수 있는가?몰몬 개척자들이 걸어간 대부분의 길은 오늘날 추적할 수 있으며, 관심있는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지도와 함께 안내 책자도 마련되어 있다. 여행로 주변에 있는 재산의 일부는 교회 소유이며, 여행자들이 길을 찾도록 돕기 위해 곳곳에 방문자 센터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행로는 주 및 지방 정부의 소유로 되어 있거나, 개인 재산으로 되어 있다. 이들 중 일부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소유를 돌아보게 허락해 준다. 이 길을 따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지방 정부의 법을 준수해야 하며, 재산을 소유한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유타에서 성도들을 정착시킴1. “평원을 가로질러 성도들의 첫번째 일행을 성공적으로 유타로 인도해 온 브리검 영 회장은 이제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에 관심을 돌렸다. 그의 비전과 지도력으로 인해, 한때 허허벌판이었던 사막이 성도들을 위한 번성하는 문명과 안식처가 되었다. 그의 솔직 담백한 지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에 대한 가능성을 꿈꾸게 하였으며, 그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길을 찾아 떠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 “첫번째 성도들의 일행이 도착한 지 이틀 후, 브리검 영 회장과 몇 명의 십이사도는 영 회장이 나부를 떠나기 전에 시현으로 보았던 산 중턱에 있는 둥그런 절벽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절벽 아래로 펼쳐진 광활한 계곡을 내려다 보면서 세계의 열방이 이 곳에서 환영받을 것이며 성도들이 번영과 평화를 누릴 곳이 바로 여기라는 예언을 했다. 그들은 그 언덕을 엔사인(기치)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사야의 약속의 말씀에서 딴 것이다.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이사야 11:12)” 3. “영 회장의 첫번째 공식적인 업무 수행은, 1847년 7월 28일에 성전을 건축할 중심 부지를 선정하여 사람들에게 성전의 설계와 건축에 대한 계획에 착수하도록 한 것이었다. 자신의 지팡이를 선정한 부지에 꽂고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곳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칠 성전을 지어야 하는 곳입니다.’이 선언은 바로 얼마 전 나부를 떠날 때 강제적으로 성전 예배 의식을 중단해야 했던 성도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4. “8월에 교회의 지도자들과 첫번째 개척자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 해에 그들의 가족들을 계곡으로 데려갈 준비를 하기 위해 윈터쿼터스로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온 직후에, 브리검 영과 십이사도 정원회는 제일회장단을 재조직할 때가 되었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이었던 브리검 영이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 받았다. 그는 히버 시 킴볼과 윌라드 리차즈를 보좌로 선택했으며, 성도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우리의 유산, 81~82쪽) 계곡에서의 첫번째 해5. “1847년 여름이 가기 전에 두 그룹의 성도들의 일행이 솔트레이크 계곡에 더 도착했으며, 약 2,000명의 회원들로 솔트레이크 스테이크가 조직되었다. 때에 늦게 곡식을 심어 수확이 아주 적었으므로, 이듬해 봄까지 많은 사람들이 부족한 식량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존 알 영은 이렇게 기록했다.” 6. “‘초목이 자랄 때까지 기근으로 인한 고통은 극심했다. 몇 달 동안 우리는 빵 한 조각 없이 지냈다. 쇠고기, 우유, 돼지풀, 시고 릴리, 엉겅퀴가 우리의 일상 식품이 되었다. 나는 가축을 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가축들을 지켜보면서, 엉겅퀴 줄기를 먹곤 하였다. 마치 소처럼 배가 꽉 찰 때까지 먹곤 했다. 마침내 굶주림이 너무 극심하면 아버지께서는 나뭇가지에 걸려 새들이 쪼아 댄 쇠가죽을 걷어서 요리를 해 주셨는데, 그것은 맛있는 수프가 되었다.’[John R. Young, Memories of John R. Young(1920), 64] 정착민들은 서로 돕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러한 힘든 시기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었다.” 7. “1848년 6월까지 정착민들은 5~6천 에이커의 땅을 경작했으며, 계곡은 점차 녹색으로 변해가고, 수확도 풍성해졌다. 그러나 성도들은 식량 위에 내려 앉은 거대한 메뚜기 떼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도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그들은 도랑을 파서 물줄기를 메뚜기 떼로 돌려 놓기도 하고, 메뚜기 떼를 막대기와 빗자루로 쳐서 죽이거나 불에 태워 버리려 하였으나, 이 모든 노력이 다 소용없었다. 메뚜기 떼들은 계속해서 엄청나게 몰려왔다. 솔트레이크 스테이크 회장인 축복사 존 스미스는 하루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도록 요청했다. 얼마 있지 않아서 거대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하늘에서 나타나 메뚜기 떼 위로 내려 왔다. 수잔 노블 그랜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그 갈매기들은 거의 굶주린 것처럼 메뚜기 떼들을 마구 휘저으며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습니다.’ [in Carter E. Grant, The Kingdom of God Restored(1955), 446] 성도들은 기쁨과 경이의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생명을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8. “성도들은 그들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앙으로 힘을 내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곧 큰 발전을 가져왔다. 1849년 9월 캘리포니아로 여행하던 한 여행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찬사를 보냈다. ‘저는 이전에 이분들보다 더 질서있고, 성실하며, 근면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 황무지인 이 곳에서 그들이 이처럼 많은 일을 해 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4~5천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에서, 저는 단 한 명의 게으른 사람도, 그리고 부랑자와 같은 그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습니다. 곡식 수확에 대한 그들의 전망은 좋았으며, 모든 면에 있어서 영과 힘이 있었는데, 이는 제가 가 보았던 그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in B. H. Roberts, Life of John Tailor (1963), 202]”(우리의 유산, 82~83쪽) 탐험9. “1848년 늦은 여름, 브리검 영 회장은 윈터쿼터스로부터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다시 여행을 했다.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했을 때, 그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환경에서 어떠한 자원이 유용한 것인지 배워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 많은 것들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로부터 구했지만, 영 회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을 탐험대로 보내 약초와 이용 가능한 천연 자원을 발견하도록 하였다.” 10. “그는 다른 정착지를 알아보도록 다른 탐험대도 보냈다. 탐험대는 이렇게 여행하는 동안 정착지로 적합한 지역뿐 아니라 광물 자원과 풍부한 목재와 수원과 초원 지대 등을 발견했다. 땅 투기를 방지하기 위해,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할당된 토지의 일부를 떼어 타인에게 매매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땅은 그들을 지켜 주는 청지기와 같았으므로, 재정적인 이득을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되었으며, 현명하고 부지런하게 잘 관리되어야 했다.” 11. “1849년 가을, 영 회장의 지시 하에 영구적인 이민 기금이 제정되었다. 그것의 목적은 교회의 중심지로 합류하기 위해 여행하는 데 재정적인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큰 희생으로 많은 성도들이 그 기금을 조성하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 결과 수천 명의 성도들이 솔트레이크 계곡까지 여행해 올 수 있었다. 솔트레이크 계곡까지 올 수 있게 되면, 도움을 받았던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재정적인 도움을 다시 갚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금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상호 부조의 노력으로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삶을 축복해 주었다.”(우리의 유산, 83~84쪽) 손수레 부대12. “1850년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최대한 많은 이주자들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줄 수 있도록 경비를 줄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손수레 부대를 만들었다. 이 방법으로 여행했던 성도들은 수레에 100파운드의 밀가루와 제한된 양의 식량과 소지품만 실은 다음, 수레를 끌며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1856년에서 1860년 사이에 10개의 손수레 부대가 유타로 여행해 갔다. 그 중 8개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달했지만, 마틴과 윌리 두 부대는 일찍 들이닥친 겨울 때문에 그들 가운데 많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13. “이 불운한 부대의 일원이었던 넬리 푸셀은 평원에서 열 살이 되었다. 그녀의 양친은 모두 여행 중에 세상을 떠났다. 부대가 록키 산맥에 가까이 감에 따라 날씨는 더욱 추워졌고 식량은 더울 줄어들었다. 그리고 성도들은 굶주림으로 너무나 약해져서 계속 행군할 수 없었다. 넬리와 그녀의 언니도 쇠약해졌다. 그들이 거의 희망을 포기했을 때, 부대의 지휘자가 그들을 마차로 데려갔다. 그는 넬리를 마차에 태우고 매기에게는 마차 옆에서 계속 침착하게 걸어가라고 말했다. 매기는 억지로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다행히 동상에 걸리지 않았다.” 14. “그들이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하여 평원을 횡단하면서 닳아버린 넬리의 신발과 스타킹을 벗겼을 때 동상으로 인해 다리의 피부도 함께 벗겨졌다. 이 용감한 소녀는 고통스럽게 발을 절단했으며 그녀는 평생동안 무릎으로 걸었다. 그녀는 후에 결혼하여 여섯 자녀를 낳았으며 자신의 집을 돌보고 자녀들을 훌륭하게 길렀다. [ “Story of Nellie Pucell Unthank,”Heart Throbs of the West, comp. Kate b. Carter, 12 vols.(1939~1951) 9:418~420 참조] 자신의 상황을 극복한 그녀의 결심과 그녀를 돌보아 준 사람들의 친절은 초기 교회 회원들의 신앙과 기꺼이 희생하는 마음에 대한 좋은 예이다. 그들의 모범은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모든 후기 성도에게 훌륭한 유산이다.” 15. “마틴 손수레 부대의 일원으로 평원을 횡단하여 오랫동안 유타에 살았던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이전에 손수레 부대가 지급한 것 말고는 더 이상의 보급품이나 보호도 없이 평원을 횡단하도록 허락했던 것에 대해 교회 지도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 노인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귀를 기울이다가 마침내 일어나서 감정에 벅차 다음과 같이 말했다.” 16. “‘나는 그 부대의 일원이었습니다. 내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우리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고통을 겪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부대의 생존자가 비난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 [우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에 대해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살아 계신다는 절대적인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17. “‘나는 병과 모자라는 음식 때문에 한 쪽 발을 다른 쪽 발 앞으로 내밀 수도 없을 만큼 약해져 있을 때 손수레를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앞을 바라보니 모래밭과 경사진 언덕이 보였습니다. ‘나는 저 곳까지 가서는 포기해야겠다. 왜냐하면 짐을 끌고 그 곳을 지나갈 수 없으니까.’라고 말했습니다. … 나는 그 모래밭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이르렀을 때 수레가 나를 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가 수레를 미는지 보기 위해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 곳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18. “‘손수레 부대로 오기를 선택한 것에 대해 내가 후회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때도 그 이후의 어떤 때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알게 되기 위해 치른 대가는 치러야 할 특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마틴 손수레 부대에 속하게 된 특권을 누린 것에 감사합니다.’”[William Palmer, quoted in David O. McKay, “Pioneer Women,”Relief Society Magazine, 1948, 1월호, 8쪽] 19. “찬송가 책에는 용감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문명의 변경 지대에서 살기 위해 멀리 여행했던 초기 교회 회원들에 대한 노래들이 실려 있다. 20. “그대, 왕국의 건설자들이여, 길을 따라 개척하며 매일의 모든 행위, 후세가 따를 길일지니 새롭고 굳건한 기초를 짓고 거친 개척지로 헤쳐 나갔네 명예로운 개척자여, 축복있을지니 전진하라, 언제까지나!” 21. “그들의 모범은 우리에게 우리의 나라에서 더욱 충실하고 용기있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22. “언제나 봉사하며, 사랑으로 이끌리어 용기와 꺼지지 않는 빛으로 모든 곳 비치네. 날마다 짐을 가볍게 하고 날마다 마음을 밝혀주고 날마다 희망을 안겨주니 축복있을지니, 명예로운 개척자여!”[ “They, the Builders of the Nation,” 찬송가, 36장(영문)], (우리의 유산, 77~78, 80쪽) 선교사들이 부름에 응함23. “일에 활기를 띠고 생활이 점차 안정되자, 브리검 영 회장은 관심을 교회로 돌렸다. 1849년 10월 6일 연차 대회에서, 그는 새로 부름 받은 선교사들과 함께 몇몇 십이사도 회원들에게 외국에서 선교 사업을 행하도록 임무를 주었다. 그들은 그들의 가족들과 새 집, 그리고 아직 끝마치지 않은 일들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지만 이 부름을 받아들였다. 에라스터스 스노우와 몇몇 장로들은 스칸디나비아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했으며, 로렌조 스노우와 조셉 토론토는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애디슨과 루시아 번즈 프랫은 소사이어티 군도에 있는 에디슨의 이전 선교 지역으로 돌아갔다. 존 테일러는 프랑스와 독일로 부름 받았다 선교사들은 동쪽으로 여행하는 동안, 록키 산맥에서 새로운 시온으로 향하는 성도들과 만났다.” 24. “선교 지역에서 선교사들은 기적을 보았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어 교회로 인도했다. 훗날 교회 회장이 된 로렌조 스노우는 이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중에, 세 살짜리 사내 아이가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것을 보았다. 그는 그 때가 그 어린이를 병으로부터 고쳐 주어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날 밤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 지시해 주시기를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했다. 다음날 그와 동반자는 그 사내 아이를 위해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 날 오후 그들은 그 아이에게 병자 축복을 해 주었으며, 그들의 사업을 도와 주시도록 조용히 기도드렸다. 그 아이는 밤새 평온하게 잠이 들었으며, 기적적으로 완쾌되었다. 아이를 고쳐 주었다는 소문이 이탈리아 피드몬드 지역의 여러 계곡으로 퍼져 나갔으며, 선교사들에게 문이 열리고, 그 지역에서 첫번째 침례가 나왔다.” [Francis M. Gibbons, Lorenzo Snow: Spiritual Giant, Prophet of God (1982), 64쪽 참조] 25. “1852년 8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서, 106명의 장로들이 전 세계로 선교 사업을 나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이 선교사들은 후에 부름 받은 선교사들처럼 남미, 중국, 인도, 스페인, 오스트레일리아, 하와이 그리고 남태평양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뿌려 놓은 씨앗들로 말미암아 훗날 선교 사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26. “에드워드 스티븐슨 장로는 스페인 지브랄타 선교부로 부름을 받았다. 이 부름은 그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그의 고향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회복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으며, 그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 중 한 명이 거의 개종될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 당국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얼마 동안 감옥에서 보냈다. 석방된 후에 그는 두 명에게 침례 주었고, 1854년 1월까지 열 명의 회원을 둔 지부를 조직했다. 그 해 7월에는 여섯 명의 회원들이 아시아에 주둔한 영국 군대로 군복무를 하기 위해 떠났지만, 그 지부에는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도력을 주는 한 명의 칠십인, 한 명의 장로, 한 명의 제사, 그리고 한 명의 교사를 포함한 열여덟 명의 회원들이 있었다.”[ “The Church in Spain and Gibraltar,”Friend, 1975년 5월, 33쪽 참조] 27. “1852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지방 정부는 선교사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개종한 성도들은 1892년 전도 활동이 재개될 때까지 교회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티호니 장로와 마이헤아 장로가 특히 용감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감옥 생활과 다른 많은 시련들을 견뎌냈다. 그들 각자는 성도들이 활동적이고 복음에 충실하도록 노력했다.” [R. Lanier Britsch, Unto the Islands of the Sea: A History of the Latter-day Saints in the Pacific(1986), 21~22쪽 참조] 28. “미국 이외의 지역에서 교회에 가입한 회원들에게는 이 시기가 시온으로 집합하는 시기였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배를 타고 미국으로 여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엘리자베스와 찰스 우드 부부는 1860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항해해 왔는데, 그들은 이 항해를 위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한 부잣집에서 가정부로 일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필요한 돈을 마련할 때까지 벽돌 공장에서 일했다.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은 지 24시간 후에 바로 배를 탔으며, 선장이 그의 침실을 그녀에게 내 주어 좀더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녀는 여행 중에 병이 들었고,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마침내 유타 주 필모어에 도착해 그 곳에서 정착해 살았다.” 29.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봉사한 나라의 성도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조셉 에프 스미스는 1857년 하와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끝나갈 무렵, 심한 열병에 걸려 3개월 동안이나 선교 사업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행히 하와이의 충실한 성도인 마 마우히이 자매의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녀는 조셉을 마치 자신의 친자식처럼 극진히 돌보았으며, 이 두 사람 간에는 강한 유대감이 형성되었다. 후에 조셉 에프 스미스가 교회의 회장이 되었을 때, 호놀룰루를 방문하게 되었다. 호놀롤루에 도착한 바로 직후에 그는 한 눈 먼 여인이 인도되어 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녀는 선물로 줄 탐스런 바나나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이오세파, 이오세파(조셉, 조셉)’하고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는 즉시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껴안으며, 그녀의 볼에 수 차례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 어머니, 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Charles W. Nibley, “Reminiscences of President Joseph F. Smith,”Improvement Era, 1919년, 1월호, 193~194쪽 참조] (우리의 유산, 84~86쪽) 개척지로의 부름30. “유타, 남 아이다호, 그리고 후에 아리조나, 와이오밍, 네바다 및 캘리포니아에 포함된 지역에서 많은 공동체들이 연차 대회에서 부름 받은 개인이나 가족들에 의해 세워졌다. 브리검 영 회장은 수천 명의 새로운 정착민들이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이러한 공동체를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31. “브리검 영 회장의 생애 동안, 솔트레이크 계곡의 모든 곳과 주변의 많은 지역이 개척되었다. 브리검 영 회장이 세상을 떠난 1877년까지, 350여 곳 이상의 개척지가 건설되었으며, 1900년까지는 거의 500여 곳에 달했다. 초기에 교회의 관리 역원이었던 브리검 헨리 로버츠는, 몰몬들이 개척지를 성공적으로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영 회장이 주었던 부름을 수행하면서 보여 주었던‘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그들 각자의 비이기적이고 헌신적인 희생’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Russell R. Rich, Ensign to the Nations(1972), 347쪽에서 인용] 개척자들은 주님의 선지자를 따르기 위하여 물질적인 안락함이나 친구들과의 교제,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생명까지도 희생했다.” 32. “연차 대회에서, 영 회장은 외진 곳으로 이주할 부름을 받게 될 형제들과 그 가족들의 명단을 읽었다. 이 개척자들은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그들이 해임될 때까지 지명된 곳에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생필품들을 가지고 자비를 들여 그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여행하였다. 그들의 성공 여부는 그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주변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들은 그 지역을 조사하고, 땅을 개간하며, 방앗간을 짓고, 대지로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관개수로를 파고, 가축을 보호하기 위해 목장 둘레에 울타리를 치며, 새로운 길을 닦았다. 그들은 곡물을 재배하고 채소를 가꾸며, 교회와 학교를 짓고, 인디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출생이나 사망 그리고 결혼식뿐 아니라 병이 들었을 때에도 서로 도우며 살아갔다.” 33. “1862년, 찰스 워커는 남 유타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였다. 그는 부름 받은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이 곳에서 오랫동안 잊을 수 없는 원리를 배웠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내게 순종이 하늘 아래나 땅 위에서 얼마나 위대한 원리인가를 보여 주었다. 나는 이 곳에서 지난 7년 동안 무더위나 추위, 굶주림과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며 생활하였으며, 마침내 곧 탐스러운 수확을 하게 될 많은 과실수가 있는 집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러한 모든 것을 남겨 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떠나야 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로 내게 요구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한다.’”[Diary of Charles Loewll Walker, ed. A. Karl Larson and Katharine Miles Larson, 2 vols. (1980), 1:239] 34. “십이사도 정원회의 일원인 찰스 시 리치 또한 개척지로 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브리검 영은 그와 몇몇 다른 형제들에게 그들의 가족을 데리고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241킬로미터 떨어진 베어 레이크 계곡에 정착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그 계곡의 정상은 매우 높았으며, 겨울 동안에는 눈이 덮여 있는 매우 추운 곳이었다. 리치 형제는 최근 유럽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왔으며, 그의 가족들을 떠나 다시 한번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부름을 받아들였으며, 1864년 6월, 베어 레이크 계곡에 도착했다. 그 다음 해 겨울부터 봄까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생활했는데, 다른 몇몇 형제들은 그 곳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리치 형제는 이 추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다음과 같이 말했다.” 35. “‘이제까지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제가 인정하는 것은 … 우리가 이것들을 함께 도우며 이겨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것을 빼앗고 싶지 않습니다. … 그러나 저는 저 혼자만 남게 되더라도 이 곳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영 회장님이 저를 이 곳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이 저를 해임하고 이 곳을 떠나라고 하실 때까지 이 곳에 남아 있겠습니다.’리치 형제는 그의 가족과 함께 실제로 그 곳에 남았으며, 그 다음 몇 십 년 동안 번영하는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는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일을 돕기 위해 기꺼이 그의 지도자들에게 순종했다. [Leonard J. Arrington, Charles C. Rich(1974), 264쪽 참조]”(우리의 유산, 86, 88~89쪽) 인디언들과의 관계36. “개척자들은 변방 쪽으로 더 나아가면서 인디언들과 자주 교류를 했다. 서부의 다른 정착민들과는 달리, 브리검 영 회장은 회원들에게 원주민인 인디언 형제 자매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그들을 교회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도록 가르쳤다. 인디언 사이에서의 선교 사업이 아이다호 준주에 있는 새먼 강 지역의 포트 림하이와 유타 주 경계 지역 내의 콜로라도 강 상류에 있는 엘크 산에서 시도되었다. 영 회장은 또한 상호부조회 자매들에게 바느질을 하여 인디언 형제 자매들을 위한 의복 등을 만들도록 권고하였으며, 인디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돈을 모금하도록 지시했다.” 37. “성도들과 매우 가깝게 지낸 비회원 인사였던 토마스 엘 케인의 아내 엘리자베스 케인이 유타 주를 여행하고 있었을 때, 그녀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한 몰몬 여인의 집에 머물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직접 그 몰몬 여인이 인디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기 전까지는 그 여인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여인은 준비한 저녁 식사에 손님들을 부르면서, 한편으로는 기다리고 있던 인디언들에게도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여인이 인디언들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그 여인의 아들에게 물어보았는데, 그 아들이 대답하기를, ‘이 손님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이분들께 드릴 음식만 차렸거든요. 지금 여러분들의 음식도 준비 중이니까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엘리자베스는 믿을 수가 없었으며, 그 여인이 그 인디언들에게 정말 음식을 줄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에게 대접해 드린 것과 꼭같이 저들을 위해 식탁에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그 여인은 인디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시중을 들며 그들을 대접했다.[Elizabeth Wood Kane, Twelve Mormon Homes Visited in Succession on a Journey through Utah to Arizona(1974), 65~66쪽 참조]”(우리의 유산, 89~90쪽) 신권 및 보조 조직의 기능38. “영 회장은 말년에, 몇 가지 중요한 신권 책임을 설정하고 공표했다. 그는 십이사도들에게 모든 스테이크에서 대회를 열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유타 전역에 7개의 새로운 스테이크와 140여 개의 새로운 와드가 생겨났다. m스테이크 회장단, 고등 평의원, 감독단 및 정원회 회장단들의 임무가 분명히 정의되었으며, 수백 명의 형제들이 이 직책에 부름 받았다. 그는 교회 회원들이 십일조와 금식 헌물과 기타 다른 헌금을 바치고 질서있게 생활해 가도록 그들을 권고했다.” 39. “1867년 선지자는 조지 큐 캐논을 주일학교 책임자로 불렀으며, 수년 내에 주일학교는 교회의 영구적인 조직이 되었다. 1869년 영 회장은 그의 딸들을 모아 놓고 검소하게 살도록 특별한 지침을 주기 시작했다. 그는 1879년 절제회 설립과 함께 이러한 권고를 교회의 모든 청녀들에게 적용했다. 이것이 청녀 조직의 시초이다. 1877년 7월 그는 첫번째 스테이크 상호부조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유타 주 옥든으로 여행했다.”(우리의 유산, 90~91쪽)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는 솔트레이크에 있는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1848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은 충실한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었지만, 신앙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유혹이었다. 동부에서 금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물결은 평원을 가로질러 솔트레이크 계곡을 지나갔다. 계곡에서의 열악한 환경을 불편하게 여긴 일부 교회 회원들은 마차에 짐을 싣고 떠날 차비를 했다. 브리검 영 회장은 이렇게 권고했다. “하나님께서는 이곳을 그분의 성도들의 집합 장소로 정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금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는 이 곳에 있는 편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 금과 은, 그리고 지하에 풍부하게 묻힌 광물 자원에 관한 한 이 나라와 견줄 나라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에게 맡겨 두시고 다른 사람들이나 그것을 찾게 하세요. 우리는 땅을 개간할 것입니다.”(in Brown, Giant of the Lord, 132~133) 일부 사람들은 캘리포니아로 떠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장의 뜻을 충실히 따른 탓으로 그 해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어 들였다. 1849년에 있었던 유명한 골드 러시는 솔트레이크 계곡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직접적인 축복이 되었다. 상품들을 싣고 캘리포니아로 가던 상인들은 솔트레이크시티에 도착하여, 그들이 배로 보낸 식품, 의복 및 연장 등이 이미 그 곳 시장에 도착했음을 알고는, 그들의 상품들을 성도들에게 헐값으로 팔았다. 금을 캐러 가던 사람들도 성도들에게 마차 수리를 의뢰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솔트레이크에서는 빈 마차를 끄는 일행을 파견하여 금광으로 빨리 가기 위해 짐을 가볍게 하고자 사람들이 길가에 버린 물건들을 모아 실어오게 하였다. 브리검 영 회장의 유산후일의 모세제일회장단 보좌였던 조지 큐 캐넌 회장은 브리검 영 회장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렇게 전하였다. “여러분이 가서 영 회장의 설교를 읽고 그가 선지자였다는 것을 지금 믿지 못한다면, 저는 여러분이 그것을 읽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에 그가 선지자였다는 것을 확신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장래 일에 대해 선지자가 그의 백성들에게 말하듯이 말했고, 그의 말씀은 하나님과 같은 지혜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는 평생 동안 끊임없이 흐르는 물처럼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Gospel Truth, 1:328) 브리검 영 회장의 죽음과 유산1. “지도자로서 브리검 영 회장은 실천적이고 정열적이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가르침과 용기를 주기 위해 교회의 모든 정착지를 여행했다. 말씀과 모범으로써, 그는 회원들이 교회에서 그들의 부름에 충실하도록 가르쳤다.” 2.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영 회장은 뉴욕시의 한 신문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썼다.” 3. “‘지난 26년 동안 저의 노력의 결과를 간단히 요약해서 말씀드리자면, 약 10만 명 정도의 후기 성도들이 이 경계 내에 거주하고 있고, 우리가 세운 2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에 성도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 우리의 공동체를 향상시키고 이롭게 하기 위해 학교와 공장과 제분소와 기타 필요한 시설을 세웠습니다.’” 4. “‘저는 온 생애를 바쳐 전능하신 하나님께 봉사했습니다.’”(Hinckley, Truth Restored, 127~128쪽에서 인용함) 5. “1876년 9월, 영 회장은 구주에 대해 강한 간증을 하였다. ‘저는 예수께서 이 세상의 그리스도이시며, 구주요, 구속주라는 것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왔고, 그분의 약속을 저의 삶에서 확실히 이해했으며, 이 세상의 지혜로 얻을 수도 없고, 이 세상의 지식이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Journal of Discourses, 18:233] 6. “1877년 8월, 영 회장은 매우 심한 병에 걸렸으며, 의사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그의 나이 76세였으며, 교회를 이끌어 온 지 33년이 되는 해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를 현대의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온 정열적인 선지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설교는 종교가 매일매일의 경험의 일부라는 것을 분명하게 해 주었으며, 일상의 모든 면에서 감동을 주었다. 그는 서부 변경 지역에 대한 이해와 현명한 지침으로, 하늘의 축복으로써 사막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것과 같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과업을 성취하도록 성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우리의 유산, 91쪽) 브리검 영의 가르침과 간증7. 마태복음 5장 48절과 관련하여, 브리검 영 회장은 이렇게 말씀했다. “우리는 이 문장의 표현을 이렇게 고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할 수 있는 만큼 온전하라’그 이유는 기록에 의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온전해질 수 있을 만큼만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방도를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충실히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천사들처럼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됩니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 80쪽) 8. 선지자 조셉 스미스가 죽은 지 약 삼 년쯤 지난 후에, 브리검 영은 꿈 또는 시현에서 조셉 스미스를 보았다. 영 회장은 선지자에게 교회 회원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느냐고 물었다. “조셉이 나에게 나아와서 매우 진지하지만 즐거운 모습으로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겸손하고 충실하여 항상 주님의 영을 간직하면, 그로 인해 올바른 길로 인도받을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십시오. 작고 조용한 소리에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음성은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 줄 것입니다. … 그들은 주님의 영과 기타 모든 영을 식별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영은 그들의 영혼에 기쁨과 평화를 속삭여 줄 것입니다. 주님의 영은 그들의 마음에서 악의와 미움과 다툼과 모든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고 의를 이루며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무엇보다 그들의 소망으로 이끌 것입니다.’” (Manuscript History of Brigham Young, 1846~1847, comp. Elden J. Watson[1971], 539쪽) 9. “내가 이 백성들에 대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그들이 이 땅에서 큰 부를 얻고,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잊으며, 살찌고, 자신들을 교회에서 걷어차 지옥으로 빠지게 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은 폭도의 습격과 강탈, 가난, 온갖 박해를 다 견디어 낼 수 있으면서도 진실하였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부에도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킴볼, 용서가 낳는 기적, 51쪽) 10. “여러분이나 제가 기도하고 싶은 기분인지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할 시간이 되면 기도하십시오. 만약 우리가 기도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는 기도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 영이 기도하도록 명령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결코 기도다운 기도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 44) 11.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2천 년 전 또는 5천 년 전의 시절로 되돌아가 경전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고 경전을 읽으십니까? 경전을 기록한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경전을 읽고 계십니까? 이러한 느낌을 느끼시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일상의 대화나 산책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것처럼 …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여러분의 특권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검 영, 119쪽) 12. “저는 이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과신한 나머지 그들을 하나님이 인도하는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여쭤보지도 않는 우를 범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목적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무모한 확신에 의지하여, 자신의 영원한 운명을 그들의 지도자의 손에 맡긴 채 맹목적인 자기 안전 상태에 안주하고 있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의 계시를 통해 올바른 길로 인도되고 있는지를 스스로 알게 될 경우, 그들이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지 않을까 하고 염려됩니다.” (Discourses of Brigham Young, 135) 13. “사람들은 왜 배도를 합니까?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는 지금 ‘시온의 정든 배’를 타고 있는 것입니다. 배는 바다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폭풍이 불어옵니다. 선원들이 말한 대로 배는 몹시 고전을 합니다. 한 탑승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기 안 있을 테야. 이 배는 시온의 배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바다의 한 복판에 있는 걸. 상관 없어. 여기 안 있을 테야.’그는 이같이 말하면서 상의를 벗고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갑니다. 이 사람은 빠져 죽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배는‘시온의 정든 배’입니다. 우리들은 이 배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합시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브리검 영, 83쪽 ) 14. “저는 조셉 스미스를 생각할 때마다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께서 세우시고 성임하셨으며, 지상에 하나님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열쇠와 권세를 받으신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 (Discourses of Brigham Young, 458~459) 15. “누가 조셉 스미스에 대적하는 일을 옳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누구 못지않게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부모님들이 나보다 그를 더 잘 안다고 믿지 않습니다. 나는 이 지구상에서 어떤 사람도 나보다 그를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조셉 스미스가 이 지상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 중에서 예수를 제외하고는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의 증인입니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 459) 16. “회장들과 사도들과 장로들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도록 맡기신 일을 하고, 그들에게 주신 권고에 순종하게 합시다. 그러면 왕국은 계속해서 전진하게 되며, 왕국의 힘과, 그 중요성과, 그 규모 및 권세와, 지혜와, 예지와 영광이 계속 커질 것입니다. 아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하나님이 세우신 왕국으로서 창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한하신 지혜와 권세로 지지해 오신 왕국이기 때문입니다.”(Discourses of Brigham Young,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