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브리검 영 회장이 돌아가신 후, 존 테일러 회장이 관리하는 십이사도 정원회가 3년 동안 후기 성도들을 인도하였다. 1880년 10월 10일, 존 테일러는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되었다. 테일러 회장은 천부적인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였는데, 그는 속죄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으며, 타임즈 앤드 시즌즈와 더 몰몬을 포함한 교회의 매우 중요한 정기 간행물을 편집하였다. 그는 여러 면에서 회복된 복음에 대한 그의 헌신과 용기를 보여 주었다. 한 예를 들면, 그는 자발적으로 그의 형제들과 함께 카테지 감옥에 갇혔으며, 그 곳에서 네 발의 총탄을 맞기도 했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 신조인‘하나님의 왕국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함축하고 있다.”(우리의 유산, 93쪽) 선교 사업2. “테일러 회장은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1879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그는 사도로 부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세스 대처 장로를 멕시코의 멕시코시티에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을 주었다. 대처 장로와 다른 두 명의 선교사는 1879년 11월 13일 멕시코시티에 첫번째 교회 지부를 조직했는데, 지부 회장으로는 플로티노 시 로다카나티 박사가 부름 받았다. 로다카나티 박사는 스페인어 판 몰몬경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 테일러 회장에게 교회에 관한 추가적인 정보를 요한다는 편지를 보낸 후 개종한 사람이다.” 3. “십이사도 중 한 명과 세 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회복된 복음이 서서히 멕시코 사람들 사이에서 전파되기 시작했다. 1881년 4월 6일에 대처 장로와 페라모르즈 영 장로와 파이스 형제는 해발 4,742미터에 이르는 포파카테페텔 산에 올라가 간단한 헌납식을 가졌다. 대처 장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멕시코 백성들이 그들의 목자인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멕시코 백성들과 멕시코 땅을 헌납하였다.” 4. “대처 장로는 솔트레이크시티로 돌아와 몇몇 선교사들이 추가로 더 멕시코에서 봉사하도록 추천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훗날 제일회장단의 일원이 된 앤소니 더블류 어빈스를 포함한 몇몇 젊은이들이 멕시코에서 봉사하기 시작했다.” 5. “밀턴 트레조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떠한 종교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필리핀에서 군복무를 할 때, 그는 록키 산맥의 몰몬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 후에 그는 심한 병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유타를 방문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병이 완쾌되었을 때, 솔트레이크시티로 여행을 했다. 그는 브리검 영을 만났으며, 복음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한 그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페인어로 된 몰몬경을 읽을 수 있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 영적으로나 지적으로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6. “테일러 회장은 또한 미 서부에 사는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불렀다. 아모스 라이트의 선교 사업은 와이오밍 주 윈드 리버 인디언 보호 구역에 거주하는 쇼숀 족 가운데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단 몇 개월만의 봉사로 라이트는 와사키 추장을 포함한 300여 명 이상의 인디언들을 침례 주었다. 또한 후기 성도 선교사들은 애리조나 주와 뉴멕시코 주에 거주하는 나바호 족, 푸에블로호 족 및 주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윌포드 우드럽은 호피 족, 아파치 족 및 주니 족 등과 같은 인디언들에게 1년 정도 선교 사업을 하였다. 암몬 엠 테니는 100명 이상의 주니 족 인디언들에게 침례를 주는 데 도움을 주었다.” 7. “선교사들은 영국과 유럽에서도 복음을 계속 전했다. 1883년, 유타 주 리하이에 살고 있던 독일 태생의 토마스 비싱거는 유럽 선교부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와 폴 해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로 보내졌다. 그 지역은 당시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선교사들은 법률로 전도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화들은 종종 종교적인 주제로 화제가 바뀌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전도한 지 채 한 달도 못 되어, 비싱거 장로는 체포되어 두 달 동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석방된 후, 비싱거 장로는 자신을 고발했던 안토닌 유스트를 침례 주는 축복을 받았다. 유스트 형제는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후기 성도가 되었다.”[Kahile Mehr, “Enduring Believers: Czechoslovakia and the LDS Church, 1883~1990”Journal of Mormon History(Fall 1992), 112~113쪽 참조] 8. “복음은 폴리네시아에도 전파되었다. 두 하와이 선교사인 키모 펠리오 장로와 사무엘 마노아 장로는 1862년에 사모아로 파송되었다. 그들은 약 50명의 사람들을 침례 주었으며, 마노아 장로는 사모아에서 25년 동안이나 자신이 개종시켰던 사람들과 함께 살았다. 1887년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의 조셉 에이치 딘은 사모아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마노아 장로와 그의 충실한 아내는 딘 장로와 그의 아내 플로랜스 자매를 그들의 집으로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마노아 장로에게 있어서 실로 20년 만에 사모아 지역 외의 교회 회원을 만나게 된 특별한 일이었다. 딘 장로는 얼마 있지 않아 14명을 침례 주어 교회로 인도하였으며, 약 한 달 뒤에는 사모아 말로 첫 설교를 하였다. [R. Lanier Britsch, Unto the Islands of the Sea: A History of the Latter-day Saints in the Pacific (1986), 352~354쪽 참조] 그리하여 선교 사업은 그 섬에서 다시 한 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9. “1886년으로 접어들면서, 하와이 정부 관리들은 나병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병에 걸린 환자들을 몰로카이 섬의 카라우파파 반도로 격리시켰다. 후기 성도였던 조나단과 키티 나펠라는 1873년에 그 곳으로 추방당했다. 키티 자매만 병에 걸렸으나, 솔트레이크 엔다우먼트 하우스에서 부부로 인봉된 조나단은 키티 자매 혼자 그 곳에 내버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후에 조나단도 병에 결렸으며, 9년 후에 그의 친한 친구가 그를 방문했을 때는 예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는 변해 있었다. 얼마 동안 그는 1900년까지 200여 명 이상이던 반도의 성도들을 관리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심한 병으로 고생하던 충실한 성도들을 잊지 않았으며, 그들의 영적인 필요 사항을 돌보기 위해 자주 그 지부를 방문하였다.[Lee G. Cantwell, “The Separating Sickness,”This People (Summer 1995), 58쪽 참조]”(우리의 유산, 93~96쪽) 50주년 연차 대회10. “1880년 4월 6일, 교회 회원들은 교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했다. 그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 50년마다를 희년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그 행사를 50년절이라고 불렀다. 테일러 회장은 생활이 궁핍한 회원들이 교회에 진 빚을 모두 면제해 주었다. 교회는 또한‘도움을 필요로 하는 극빈자들’에게 300마리의 소와 2000마리의 양들을 나누어 주었다. [Roberts, Comprehensive History of the Church, 5:592 참조] 교회의 상호부조회 자매들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35,000부셀의 밀을 나누어 주었다. 테일러 회장은 또한 교회 회원들에게 특히 대공황기 중에 진 개인적인 빚을 면제해 주도록 강조했다. ‘지금은 50년절의 기간입니다.’라고 테일러 회장은 선언했다. [Roberts, Comprehensive History of the Church, 5:593] 후기 성도들 사이에는 용서의 정신과 기쁨이 가득했다.” 11. “1880년 4월 50주년 기념 연차 대회의 마지막 날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십이사도 중 열한 명이 대회 기간 동안 간증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초대 회원 중 한 사람이었던 올슨 프랫은 교회 회원 모두가 뉴욕 주 페이에트의 피터 휘트머 일세의 집에 모였던 이야기를 했다. 그는 후기 성도들의 시련과 집합, 박해와 고통에 대해 회상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아직도 함께 하고 있는 사실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주 하나님께서 지난 50년 동안 행하셨던 위대한 사업’에 관하여 간증했다. [Roberts, Comprehensive History of the Church, 5:590~591] 프랫 장로는 몇 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으며, 다른 충실한 후기 성도들처럼 끝까지 견딘 것에 대해 기쁨을 느꼈다.” 12. “50주년 기념 행사가 있기 2년 전, 존 테일러 회장은 어린이들에게 종교를 가르칠 조직을 설립하도록 지시하였다. 첫번째 초등회 모임이 유타 주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북쪽으로 15마일 떨어진 파밍턴에서 시작되었다. 188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후기 성도 정착지에 초등회가 조직되었다. 초등회는 전세계의 수백만 어린이들이 속해 있는 조직으로 성장해 오고 있으며, 어린이들은 초등회에서 매주 복음의 가르침을 받으며, 음악과 교제를 통해서 축복받고 있다.”(우리의 유산, 96쪽) 계속되는 박해13. “1830년대 초에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아브라함, 야곱, 다윗 그리고 구약의 다른 지도자들이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선지자는 이에 대해 이해력을 주시도록 기도 드렸으며, 특정한 때에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하늘의 율법에 따라 하나님께서 복수 결혼을 허용하시고 지시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조셉 스미스는 또한 하나님의 승인에 따라 곧 신권의 권능에 의해 선택된 후기 성도들이 한 명 이상의 처와 결혼하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몇몇 후기 성도들이 나부에서 복수 결혼을 시작했으나, 이 교리와 그 시행에 대해서는 1852년 8월에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공식적으로 공표되었다. 그 대회에서 브리검 영 회장의 지시를 받은 올슨 프랫 장로는 한 남자가 한 명 이상의 처를 갖는 것을 실시하는 것은 주님의 만유에 대한 회복의 일부(사도행전 3:19~21 참조)라고 발표하였다.” 14. “미국의 많은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은 부도덕하고 반기독교적이라고 여기는 복수 결혼 체제를 유타 주에 살고 있는 후기 성도들이 장려한다는 것을 알고 몹시 분개하였다. 교회와 회원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미 의회는 후기 성도들의 자유를 구속하고 교회에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는 법률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률안에 따라 결과적으로 관리들은 한 명 이상의 처를 둔 남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들에게서 투표권과 가정에서의 사생활 보장권 및 기타 시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였다. 수백 명의 충실한 후기 성도들과 몇몇 여성들이 유타, 애리조나. 네브래스카, 미시간 그리고 사우스 다코타 주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5. “복음을 전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인 많은 회원들에게도 박해가 심해졌는데, 특히 미국 남부 지역이 심했다. 예를 들면, 1878년 7월에 조셉 스탠딩 장로는 조지아 주 롬 근처에서 복음을 정하던 중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후에 사도가 된 그의 동반자 루저 클로슨 장로는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 솔트레이크시티에 사는 성도들은 스탠딩 장로의 살해 소식에 매우 비통해 했으며, 수천 명이 솔트레이크의 태버내클에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16. “존 깁스, 윌리엄 베리, 윌리엄 조운스 및 헨리 톰슨 장로는 교회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바꿔보기 위해 테네시 전역을 여행했다. 1884년 8월 어느 일요일 이침, 그들은 테네시 주 케인 크릭 근처에 있는 제임스 콘도의 집에서 휴식하고 있었다. 깁스 장로가 말씀을 준비하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있을 때, 폭도 한 명이 숲에서 뛰어나와 그에게 총을 쏘았다. 그로 인해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가 목숨을 잃었다. 학교 교사였던 깁스 장로에게는 아내와 세 자녀가 있었는데, 그들은 깁스 장로의 죽음으로 인해 매우 애통해 하였다. 깁스 자매는 43년 동안 미망인으로 지냈으며,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해 산파 일을 하였다. 그녀는 남편과 다시 만날 재회의 기쁨을 고대하면서 복음 가운데에서 생을 마쳤다. 많은 선교사들이 살해당하던 당시에 선교부 회장 대리로 봉사하고 있던 브리검 헨리 로버츠는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깁스 장로와 베리 장로의 시신을 무덤에서 몰래 파내어 유타로 옮겨 왔다. 유타 주의 많은 와드에서는 두 장로에게 경의를 표하는 추모식을 거행했다.” 17.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은 피가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채찍질 당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들이 채찍질로 인한 심한 상처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당시에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복수 결혼한 사람들을 수색하는 연방 보안관들의 체포망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 많은 가족들은 이 보안관들이 늦은 밤 집으로 침입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조지 큐 캐논 회장, 로렌조 스노우, 루드가 클로슨, 브리검 헨리 로버츠, 조지 레이놀즈와 다른 많은 성도들이 투옥되었으며, 그들은 감옥에서 책을 저술한다든지, 감옥 내 학교에서 가르친다든지,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존 테일러 회장은 솔트레이크에서 북쪽으로 32킬로미터 떨어진 유타 주 케이스빌로 강제 추방당하였는데, 그는 1887년 7월 25일에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는 이 지상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전하고 주님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의 생을 다 바친 충실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우리의 유산, 97~98쪽) 존 테일러의 간증과 가르침19. “여러분은 가정에서 기도를 하십니까? … 여러분은 기도할 때 감정없이 기계적으로 합니까? 아니면 겸손하게 고개 숙이고 성실한 소망으로 여러분 자신과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기를 간구합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의 영을 키우며,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그분의 축복을 구할 수 있는 길입니다.” (성도의 벗, 1984, 1월호,14~15쪽 ) 20. “여러분이 자신의 부름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무를 다했을 경우 구원할 수도 있었을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여러분에게 물으실 것입니다.”(in Journal of Discourses, 20:23) 21.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에게 대항하는 영향력에 맞설 수 있게 해 주는 우리의 모든 신앙, 우리의 모든 힘, 우리의 모든 신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모든 믿음을 요구하는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 우리는 자신의 예지를 믿을 수 없으며, 자신이 소유한 부를 믿을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내하고, 지휘하고, 인도하고, 가르치고 지시하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Joseph Fielding Smith, Essentials in Church History, 23판, [1969], 495쪽에서 인용) 22. “하나님의 성도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는 종교에 따라 생활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만큼 모든 일이 잘 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성도들이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일은 곤란해지고 뒤틀어지며 제멋대로 돼 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며 종교에 따라 생활하고 계명을 지킬 때, ‘그들의 평화는 강물처럼 흐를 것이며, 의는 바다의 물결처럼 밀려올 것입니다.’”(in Journal of Discourses 26:71) 23. “누구든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 평화로움이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가슴에 평화를 길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확실한 평화는 오로지 합법적인 규율과 하늘의 권능, 그리고 그 율법에 대한 순종이 있을 때에 한해 지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The Gospel Kingdom: Selections and the Writings and Discourses of John Tailor, sel. G. Ho,,er Durham[1943], 319) 24.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지 않는 한 올바르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한 같은 영의 일부를 지니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올바르게 들을 수 없으며,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Gospel Kingdom, 337~338) 25. 연차 대회에서 낭독한 1885년 4월 서한에서 제일회장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과거에도 종종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시온을 세우셨으며, 그분의 사업은 계속 전진할 것이고, 그 일에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은 모두 멸망될 것이라는 사실을 후기 성도들과 온 세상에 엄숙히 간증드립니다.”(in James R. Clark, Comp., Messages of the First Presidency of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6권, [1965~1975, 3:12] 26. “저는 이러한 간증을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의 뼛속에 있는 불처럼 느끼고 있으며, 여러분이 그 동안 찾고 있었던 그 축복들을 전파하고자 하는 기회를 갖고, 하나님께서 후일에 세상의 구원을 위해 계시해 주신 영광스러운 것들을 우리와 함께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in B. H. Roberts, The Life of John Tailor(1963), 78) 제일회장단 재조직브리검 영 회장이 별세하자, 십이사도 정원회는 정원회 회장인 존 테일러의 지시를 받고 교회를 인도했다. 제일회장단이 재조직되었으며, 1880년 10월에 연차 대회에서 지지를 받았다. 테일러 회장이 별세하자, 윌포드 우드럽을 정원회 회장으로 한 십이사도 정원회가 다시 교회를 관리하였다. 2년 후, 1889년 연차 대회에서 윌포드 우드럽을 교회 회장으로 하는 제일회장단이 재조직되었다. 우드럽 회장은 별세하기 약 6년 전에, 십이사도 정원회 회장인 로렌조 스노우 회장과 개별적으로 만났다. 우드럽 회장은“생각을 많이 한 끝에 힘을 내어” 스노우 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이 이행해 주었으면 하는 중요한 부탁이 있습니다. 몇 달 전 세인트 조지를 방문했을 때, 저는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저는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얼마를 더 살지도 모릅니다. 스노우 형제님, 제가 죽게 되면, 지체하지 말고 제일회장단을 조직하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다. 우드럽 회장은 그에게 이것을 계시로 간주하기를 바랐다. ( “Memorandum in the Handwriting of President Lorenzo Snow,”Elders’Journal, 1906년 12월 1일, 110~111쪽) 1898년 9월 2일에 우드럽 회장이 별세한 후에, 스노우 회장이 성전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데, 구주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는 우드럽 회장의 뒤를 이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교회 제일회장단을 즉시 재조직하고, 이전의 회장들이 사망한 후에 그랬던 것처럼 기다리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in LeRoi C. Snow, “Remarkable Manifestation to Lorenzo Snow,”Church News, 1838년 4월 2일, 8쪽) 우드럽 회장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십이사도들은 모임을 갖고 로렌조 스노우를 교회 회장으로 지지했다. 오늘 날까지, 회장이 사망한 후, 새로운 교회 회장은 빠른 시간 내에 지지를 받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