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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회개·신권·구원

신권 의식과 신권 조직을 통해 시온을 건설함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14.

영 대관장은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 시온을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온
은 신권을 통해 인도되어야 하는데, 그는 이것을“하나님의 아들의 운영 조직”(주간 데
져렛 뉴스, 1864년 8월 10일, 2쪽)이라고 생각했다. 영 대관장은 성도들이“단순하면서
도 신성한 운영 조직”(데져렛 뉴스: 주 2회 간행물, 1870년 11월 8일, 3쪽)에 따라“모
든…활동과 노력에 있어서 한 마음 한 뜻이 될”(데져렛 뉴스: 주 2회 간행물, 1868년 1
월 21일, 2쪽)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교회 회원들은 신권 의식에 참여해야만 성결하
게 될 수 있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신권 의식과 신권 조직은 그의 가르침과 지도력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영 교회 회장과 십이사도는 1844년부터 1846년까지 나부 성전 완공을 최우선 과제로 삼
았다. 엔다우먼트와 인봉 의식은 공사가 끝나기 전부터 집행되어 왔다. “성도들은 의식
을 무척 받고 싶어했고 우리는 의식을 행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나는 전적으로 성
전에서 주님의 일을 하는 데 낮과 밤을 바쳤으며, 잠도 하루에 평균 4시간 이상 자지를
못했다. 집에도 일주일에 한번밖에 못갔다.”라고 영 회장은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
다.(브리감 영의 역사 기록, 10쪽) 1845년 12월 10일과 1846년 2월 7일 사이에, 약 5,615
명의 성도들이 엔다우먼트 의식을 받았으며 많은 가족이 인봉을 받았다. 그로부터 1년
후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영 대관장은 이 부지를 솔트레이크
성전이 들어설 장소로 지정했다. 이곳은 시의 중심지이면서 동시에 성도들의 삶의 구
심점이 될 곳이었다. 짓는 데 40년이 걸린 이 웅대한 성전은 영 회장의 생전에는 완
공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그 밖의 몇몇 거룩한 장소들을 성전이 완공되길 기다리며 지
내는 사람들을 위해 성전 엔다우먼트와 인봉이 행해질 수 있는 곳으로 지정했다
. 1877
년 1월 1일 세인트 조지 성전의 저층들을 헌납하는 자리에서 — 이로부터 몇 달 후 그
는 죽음을 맞았다 — 영 회장은 죽은 자를 위해 의식을 재개하는 일에 대해 열심히
강조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저는 우뢰와 같은 음성이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해
일깨워 주길 바랐습니다. — 조상들이 우리 없이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
습니다. 우리 또한 그 분들 없이 구원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밀레니얼

성전 의식은 여러 세대를 서로 묶어 주는 데 있어서 중요하며 거룩한 진리가 한 세
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데도 중요했다. 19세기 후반에 태어났거나 개종한 후기
성도들은 미주리 주에서 있었던 박해를 경험한다든지 개인적으로 예언자 요셉 스미스
를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기 성도들처럼] 개척을 하는 사람들
도 거의 없어질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시온을 건설하는 것에 관한 거룩한 진리를
배워야 할 것이다. 영 회장은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일을 장려했다.
또한 그는, “지상에서 의와 진리를 사랑하며 유지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훈육하겠다.”
(대관장단 메시지, 2:288)는 소망으로, 교회 조직을 잘 정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을
위해 1849년에 처음 정립된 와드 주일학교는 1867년부터 중앙 위원회의 감리 하에 하
나로 단결하여 일을 시작했다. 영 회장의 요청에 따라, 그의 딸들을 시작으로 청녀들
이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한층 절제된 생활을 하도록 강화하기 위한 조직체가 1869년
에 결성되었다. 1875년에도 이와 유사한 조직을 만들어 청남들을 가르치며 지도력을
키우게 했다.
영 회장은 자매들 없이는 시온을 건설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예언자 요셉 스미스
가 나부에서 한 것 처럼, 1867년에 상호부조회를 재조직했다. 자매들은 감독을 도와 가
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물품을 나눠주고, 가족을 격려해 가정에서 필요한 것을 만
들게 했으며, 서로 복음을 가르치고, 청녀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모았다.
영 회장은 말년에 신권 정원회를 정비했다. 스테이크를 나누어 재조직함으로써, 스
테이크 수를 여덟에서 열 여덟으로 늘렸다. 장로 정원회의 조직을 감리하면서 장로들이
현세적이고 영적인 임무를 잘 수행하게 했다. 그는 와드를 교회 활동의 기본 조직으로
강조했고, 감독의 역할을 와드의 장으로 확대시켰다. 지역의 단위 조직을 관리해 온 십
이사도 정원회 회원들은 그 직에서 해임시켜 모든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
한 증인으로 그 부름을 수행하게 했다. 그리하여 1877년 8월 29일 영 회장이 별세할
무렵에는 교회가 오늘날 대부분 성도들이 알고 있는 바로 그런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개척을 통해 시온을 건설하려는 영 회장의 헌신, 사업, 거룩한 성전 의식과 신권
조직 정비 등에 대해서는 그의 설교 말씀을 통해 알 수가 있다. 한 가지 설교로는 그가
본 광범위한 시현의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어느 한 설교의 끝 부분에서 이
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위대한 복음 설교의 일부 언저리만을 슬쩍 건드렸을 뿐입니
다”. 그는 충만한 복음은 규칙에 규칙을 더해 조금씩 가르쳐진다고 믿었다. 계속해서
그는“하나님 아들의 복음은… 영원 무궁합니다. 마음에 시현이 열렸을 때 여러분은 그
것에 대해 많은 부분을 볼 수는 있지만, 연사가 회중의 얼굴만을 보고 말을 하듯이, 여
러분도 보이는 부분만을 볼 뿐입니다. 사람들과 완전히 친해지겠다고 생각하면서, 각
개인을 쳐다보고 말하되 한 사람 당 겨우 5분을 할애한다 해도, 이는 많은 시간이 소요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영원 무궁함에 관
한 시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보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설명하기란 쉽
지 않습니다.”(주간 데져렛 뉴스, 1854년 10월 26일, 2쪽) 영 회장은 지도력과 가르침
을 통해 성도들이 늘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보고 이해하도록 도우려 했다.
브리감 영의 삶은 복음을 가르치고 하나님 왕국을 건설해 유지시켜 나가는 데 중심
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늘 왕국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
한 대상입니다.”(주간 데져렛 뉴스, 1864년 7월 27일, 2쪽)
브리감 영이 보여 준 지도력에 대해서는 아마 그가 사망할 당시 사도로 봉사했던 사
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언자 요셉의 순교 이후 33년간 교회를 인
도하면서 흔들린다든지 불안해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두려워 움츠려든 적도 없습니
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이 닥쳐와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강한
확신과 신앙을 보여 줬고, 모든 사람을 위로하고 돕기 위해 격려의 말을 해줌으로써,
사람들에게서 사랑과 칭송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를 용기로써 축복하셨음은 물
론이고 많은 지혜를 주시기도 했습니다. 구원은 영 회장의 권고를 따른 사람들에게
다가왔으며, 관리자와 행정가로서 그를 앞설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가 열심히 헌신한 대가로 크나큰 성공을 안겨 주셨고, 그의 말을 존중하
고 성취시켜 주셨으며, 그의 권고를 들은 사람들 또한 축복과 지지를 받게 해주셨습니
다. 그가 후기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회장이 된 것이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지목
될 순간이 다가올 것입니다.”(대관장단 메시지, 2:298)
(브리감 영의 생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