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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말씀·경전

저 광대한 제국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4.

2011년, 그들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최초의 스테이크가 세워지는 중요한 전기를 맞았다. 수천 명이 넘는 교회 회원, 선교사, 친구들은 함께 모여 기뻐하며, 새로운 지도자들을 지지하고, 조국의 수도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여러 시온의 스테이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다. 야코프 보이코가 스테이크 회장으로, 블라디미르 아스타스카브와 빅토르 크레멘쿠그가 보좌로 부름받고 지지되자 기대감이 높아졌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부름받은 내국인 축복사이자 스테이크 축복사로 비아케슬라프 프로토포포브가 소개되었을 때 회중은 감격해했다. 지지를 위해 그의 이름이 호명되자 회원들은 손을 번쩍 들었고, 일부는 기쁜 나머지 손뼉을 치기도 했다. 세계 다른 곳의 스테이크에서 후기 성도들이 누리는 열쇠와 권세를 이제 러시아 신권 지도자들도 받게 된 것이다. 모스크바의 교회 지도력이 러시아인들의 손에 확고히 놓이면서, 러시아 교회 역사의 새 장이 열렸다.
예언
러시아 교회 역사에서 이 중대한 날이 있기까지 그 연원을 살펴보면, 회복의 초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43년,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조지 에이 애덤스와 십이사도 정원회의 올슨 하이드 장로에게 러시아로 가서 선교 사업을 하여 각국의 개척자들“복음의 충만함을 저 광대한 제국의 사람들에게 소개하도록” 부름을 주었고, 또한 “후기에 하나님 왕국의 진보와 건설에 관해서 지금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달려 있[다고]”설명했다. 그러나 1844년에 선지자가 순교하면서 그 계획은 중단되었고, 복음과 관련된 “저 광대한 제국”의 운명을 좌우할 선지자의 계획은 완수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었다.

준비
러시아에 최초의 선교사가 발을 내디딘 날부터 최초의 스테이크가 확립될 때까지 168년이란 세월이 있었지만, 그 시간 동안에도 각국에서 온 후기 성도들이 러시아 국민들과 복음을 나눌 길을 계속해서 예비하고 있었다. 1895년, 스웨덴인 선교사 오거스트 호그룬드가 요한 린드로프를 가르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왔다. 린드로프가 스칸디나비아 선교부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고국인 핀란드에서 교회에 대해 알고 난 후에 선교사를 보내 주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호그룬드 장로를 만나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요한과 그의 아내 알마는 이틀 만에 침례를 받게 해 달라는 요청을 하게 된다. 1895년 6월 11일, 호그룬드 장로는 그들과 함께 네바 강 둑으로 갔다. 침례식을 거행할 조용하고 인적 없는 장소를 찾을 수 없어서, 일행은 주님께 무릎을 꿇고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배들과 사람들이 그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침례를 받은 후 린드로프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 행복해요! 주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알아요.”그렇게 요한과 알마는 러시아에서 침례 받은 첫 번째 개종자가 되었다.몇 년이 흐른 후, 린드로프 부부의 개종과 더불어 러시아 정부의 사회 개혁 계획에 고무되어, 십이사도 정원회의 프랜시스 엠 라이먼(1840~1916) 장로가 제정 러시아로 선교사를 파견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1903년 당시 유럽 선교부 회장이었던 라이먼 장로는 제정 러시아로 가서 복음 전파를 위해 그 땅을 헌납했다. 8월 6일과 9일, 라이먼 장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주님께 그 땅의 지배자와 “핏줄에 이스라엘의 피가 풍부하게 흐르는” 이 제국의 수많은 이들을 축복해 주시도록 기도로 간구했다. 또한 라이먼 장로는 기도에서 “진실하고 정직한 이들이 마음을 돌이켜 진리를 찾도록 해 주실 것을, 그리고 그들의 언어로 러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지혜와 신앙이 충만한 종들을 보내 주실 것을 주님께 간청했다.”
라이먼 장로는 선교사 미하일 마르코프를 당시 제정 러시아 영토였던 라트비아 리가로 보냈으며, 러시아에 선교사들을 파견해 달라는 편지를 교회 본부로 발송했다. 한편, 솔트레이크시티의 교회 지도자들은 당시에 러시아 정교에 배치되는 어떠한 것도 전도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던 러시아에 선교사들을 보내는 문제는 더욱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마르코프 장로는 지방 관료의 명령으로 곧 리가를 떠났다. 결국, 증폭된 사회적, 정치적 갈등이 제1차 세계대전의 중압으로 악화되고, 뒤이어 혁명과 내란이 이어지면서 러시아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소련의 형성과 그 결과로 생긴 냉전으로, 선교사들을 러시아로 보내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소련 시절에도 후기 성도들은 러시아에 회복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계속해서 준비했다. 그중 한 사람은 우크라이나 오데사에서 이민 온 안드레 아나스타시안이다. 1918년에 침례를 받은 이후 그는 몰몬경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970년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안드레는 이렇게 기록했다. “밤에 두 차례나 붉은 광장에 서서 이 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남루한 차림에 머리를 숙이고 무리를 지어 움직이는 이 러시아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길이 열리도록 주님께 애원했다.” 안드레의 번역을 기반으로 한 러시아어 몰몬경 첫판은 1981년에 출판되었다. 이윽고, 수많은 러시아인들이 몰몬경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각자 자신의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그들의 희망과 기도가 완수되도록 돕는 개척자가 되었다.
개척자
1989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레닌그라드로 불림.)에 살던 유리와 리우밀라 테레베니언은 딸인 안나와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했다. 그때 한 후기 성도 친구가 그들을 교회로 초대했고, 그들은 그곳에서 영을 느껴 선교사들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은 침례를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들은 유일한 교회 회원으로 지냈으나 그런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온 교회 회원들이 이미 러시아인들과 복음을 나누고 있었는데, 러시아에서 침례 받은 최초의 러시아인 개종자 안톤 스크립코도 그 가운데에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적 변화를 겪었고,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일하던 미국인들은 러시아인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다가갔다. 도흔 손턴은 1989년에 갈리나 곤차로바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은 종교를 주제로 자주 토론을 벌였다. 손턴 형제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다. “[갈리나]에게 몰몬경과 조셉 스미스 소책자를 건네주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방의 모든 빛이 책을 비추는 듯했습니다. 영이 우리를 감쌌고 [그녀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갈리나는 손턴 형제에게 책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1990년 6월에 침례를 받아, 모스크바에서 침례 받은 최초의 개종자가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비보르크, 모스크바, 그 외 도시에서도 러시아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면서 러시아 교회 역사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1990년 4월 26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거의 1세기 전에 라이먼 장로가 러시아를 위해 했던 헌납을 재확인하는 재헌납 기도를 드리며 복음의 축복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간구했다.

성장
1903년에 라이먼 장로가 드린 헌납 기도대로 지도자들이 “지혜와 신앙”으로 인도하는 가운데, 교회는 1990년 초반에 선교사들이 파견된 이래로 꾸준하게 성장했다. 충실한 러시아인들이 친구와 이웃에게 봉사하라는 책임을 받아들였다. 많은 도시에 지방부가 세워졌고, 피드러스 카스뷰린 같은 지도자들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영감을 주고 지원했다. 1994년에 교회에 들어온 캬스뷰린 형제는 1995년부터1990년 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타마라 이피마프는 친구의 집에서 만난 선교사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의 아버지 뱌체슬라프 이피마프는 그 청년들이 하나님에 관해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리라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들이 나누는 복음 메시지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이 기회를 통해 그 동안 품어 왔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셨고, 우리 각자 모두 부활하게 될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뱌체슬라프와 그의 아내 갈리나, 그리고 타마라는 그해 6월에 침례를 받았다. 이피마프 형제는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러시아 최초의 내국인 선교부1997년까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초대 지부 회장으로 봉사했고, 그후 러시아 로스토프 지방부 회장으로 부름받았다. 그는 지방부 회장으로서 가족 강화를 강조했으며, 청소년을 위한 봉사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 청소년들이 선교사로 봉사하고 장차 성전에서 결혼할 준비를 하도록 도왔다.

성전
러시아 후기 성도들은 조국에 성전이 없다는 것에 위축되지 않고, 주님의 집에서 의식에 참여했다. 15년 이상 그들에게 가장 가까운 성전은 스웨덴 스톡홀름 성전과 독일 프라이부르크 성전이었다. 한편 동부 끝자락에 사는 러시아인들은 계속 한국 서울 성전에 참석하고 있다. 비자, 장거리, 여행 비용 등의 문제로, 이들에게 성전 참석은 자주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1991년 12월, 비보르크에 사는 안드레이와 마리나 세미오노프 부부는 성전에서 가족 인봉을 받은 첫 번째 러시아인 가족이 되었다. 세미오노프 형제는 이렇게 말했다. “스웨덴 스톡홀름 성전에서 영원토록 인봉되고 난 후 저희의 삶에는 특별한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스웨덴 성전에 참석하는 모든 러시아인 일행들과 동행했다.
후에 선교부 역원들은 성전 여행을 할 그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93년 9월, 핀란드 헬싱키 성전을 헌납함으로써 러시아는 성전과의 거리가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2010년,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이 우크라이나 키예프 성전을 헌납하자 러시아 전역의 후기 성도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곳은 과거 소련의 영토를 통틀어 최초로 지어진 성전이었으며, 이로써 충실한 러시아인 성도들은 더 쉽게 성전 축복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러시아 전역의 회원들은 이러한 성전 방문을 가장 중요한 헌신으로 받아들였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 사는 베르쉬닌 가족은 2000년에 스웨덴 스톡홀름 성전을 처음 방문했다. 세르게이와 베라, 그리고 그들의 딸 이리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다른 여러 도시에서 온 러시아 후기 성도들과 합류하여 버스와 배를 타고 성전으로 향했다. 성전에서 이리나는 죽은 자를 위한 침례를 받았고, 또 부모에게 인봉되었다. 이리나는 “그 여행을 통해 우리는 간증을 얻고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회상한다. “각자 개별적으로 작은 간증들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러한 간증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또 영적 성장을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6년,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이회원들은 러시아에서 펼쳐질 교회의 미래에 대해 더욱 굳건한 희망을 품게 되었다. 키예프 성전 헌납 후에 모스크바에서 온 블라디미르 카바노비는 “교회가 계속 성장하여 여기 [러시아]에 시온의 스테이크들이 자리 잡아 갈 것을 상상”13한다고 말했다. 1년도 채 안 되어서 그 비전은 실현되었는데, 십이사도 정원회의 러셀 엠 넬슨 장로가 러시아 모스크바 스테이크를 조직한 것이다. 이듬해인 2012년 9월, 넬슨 장로는 두 번째 스테이크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조직했다.
이러한 순간들은 러시아 후기 성도들이 20년간 애써 온 개척자와 같은 봉사와 발전이 정점을 이룬 것들이지만, 이것은 러시아 지역 교회 역사의 서막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것에 불과하다. 2012년 6월, (러시아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 성도들을 방문한 후, 십이사도 정원회의 디 토드 크리스토퍼슨 장로는 주님께서 그곳에서 그분의 사업을 이끌고 계시다고 간증했다. “그분의 영이 이 지역에 충만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14 러시아 후기 성도 개척자들이 봉사를 계속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에 따라 생활하며 성전에 집중한다면, 더 많은 스테이크가 세워질 것이며, 교회는 러시아에서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광대한 제국에서 후기에 펼쳐질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시현이 성취되고 있는 과정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제임스 에이 밀러20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