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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랑·감사·자비

낯선 사람을 섬김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1. 3.

한국을 떠날 날이 다가오자 걱정이 되었다. 내가 떠나면 누가 이모를 돌봐줄까?

나는 어머니가 언젠가 복음을 받아들이리라고 느꼈지만, 내 기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생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한국 전쟁 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온 생애를 희생하셨던 굳센 여성이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주기가 되었을 때, 나는 아내와 함께 어머니의 침례와 확인을 집행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성전에 갔다. 어머니가 기쁘게 복음과 의식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강한 영을 방안에서 느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한국의 어느 병원에 있던 당신의 여동생을 돌봐 달라고 부탁하셨다. 나와 가족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던 터라, 애석하게도 어머니의 연민 어린 마지막 소망을 지킬 길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나는 예기치 않게 직장 일로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그 때문에 1년 동안 가족을 떠나 있게 되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점이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치매로 병원에 입원해 계신 이모와 아버지를 뵙고 싶었다.
가족을 떠나 살게 되어 나는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다. 한국에서 지낼 시간을 생각하며 아버지와 이모, 그리고 성전을 매주 방문하고 식구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기로 다짐했다.
한국에 오자 새 와드의 감독님은 나를 청남 회장과 복음 교리반 교사로부르셨다. 아버지와 이모가 입원한 병원과 와드가 서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직업상 신경 써야 할 일도 많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부름을 영화롭게 하고 내 결심을 지키도록 힘과 체력을 축복해 주셨다.
이모를 문병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이모를 찾아오는 사람이 좀처럼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주말에 이모를 모셔와 별도의 방이 딸린 내 숙소에서 지내게 해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일요일에 이모를 모시고 교회로 가야 하나? 이모는 모임에 흥미가 없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는데다, 교회 모임 후에도 내가 다른 모임이나 임무를 마치도록 여러 시간을 기다리셔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모를 모셔 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주 일요일에 이모를 모시고 갔는데, 예상대로 이모는 모임 후에 나를 기다려야 했다. 모든 모임을 마치고 이모를 숙소로 다시 데려와 뭘 드시게 하려고 하는데, 이모의 손에 웬 봉투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뭐냐고 묻자 이모는 어떤 자매님이 간식이라며 주었다고 하셨다.
내가 교회 모임 후에 다른 일을 볼때마다 우리 이모를 잘 알지도 못하시는 그 자매님은 늘 이모에게 간식을 주었다. 어느 주일, 주일학교 공과를 가르치는데 자진해서 성구를 읽는,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모가 자진해서 읽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는데, 이모 곁에 앉은 어떤 자매님이 이모에게 읽어 보라고 부추겼던 것이다. 이모는 병원에 격리되어 있던 기간 탓에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반원들은 모두 이모를 친절하게 맞아 주고 담소를 나누었다.
나는 일요일마다 이모를 병원에 다시 모셔다 드리면서 다음 주말에 다시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럴 때마다 이모는 얼굴에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어느 날, 한 친구는 내가 한국을 떠나면 방문이 갑자기 끊어져서 이모가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했다. 한국을 떠나기로 예정된 날이 다가오자, 나는 가족을 다시 만난다는 기쁨과 이모를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괴롭고 슬픈 심경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나는 이모에게 앞으로는 자주 찾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 드렸다. 순간 한숨을 짓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실망했음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이모는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 1년 내에 다시 올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아버지께 이 여인을 도와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보낸 일요일에 감독님은 일요일에 이모를 차로 모셔올 수 있겠는지를 와드 회원들에게 물어보셨다. 그분은 회원 몇 분이 정규적으로 이모를 방문할 용의가 있다고 하셨다. 그 수는 순번을 정해야 할 정도로 많았다. 감독님의 제안은 꿈만 같았다. 내 기도는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응답되었다.
회원들이 이모네 병원에서 먼 곳에 살고 있었기에 기름 값으로 쓰라고 얼마간의 돈을 남기려 했지만, 회원들은 사양했다. 회원들은 돌아가며 한 달에 한 번만 방문할 거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매주 방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 신실한 자매님은 금요일마다 이모를 모셔와 종교 교육원에 참석시키고 점심을 대접했다. 그 자매님은 이모를 미용실에 모시고 가기까지 했다. 두 십 대 자녀를 둔 다른 한 홀어머니는 일요일 아침마다 이모를 모셔오겠다고 자원했다. 그 자매님은 이모에게 음식을 만들어 주고 산책을 시켜 주었으며, 함께 음악을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자매님은 친구가 되어 주려 했으며, 그러자 이모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그 자매님과 다른 회원들과 더불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감독님은 일요일 저녁마다 오랜 시간 교회 모임과 다른 임무들을 마치고 이모를 회원의 집에서 병원으로 다시 데려다주셨다. 그분은 목요일마다 이모에 대한 천상의 봉사를 이메일로 친절히 알려 주신다.
나는 충실한 후기 성도들이 어머니의 여동생을 섬기는 모습을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셨으리라고 믿는다. 이제 나는 어느 때보다도 우리가 교회의 동료 회원들을 왜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지를 더 분명하게 알고 있다. ◼
글쓴이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산다.
박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