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lder Dallin H. Oaks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Dallin H. Oaks, “The Atonement and Faith,” Liahona, Apr 2008, 8–13
From an address given at the June 2001 mission presidents’ seminar in Provo, Utah.
Image
복음의 첫째 되는 원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입니다. 선지자 몰몬은 그러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의 교회의 백성으로 헤아림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모로나이서 7:39 참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은“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애굽기 20:3)였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주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며 주님을 우리 생활의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이 강력한 개념은 단순하게 보이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경전에서는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온다고 가르칩니다.(로마서 10:17 참조) 경전을 통해, 선지자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고 개인적인 계시를 통해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분의 독생자이며 우리의 구주이자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사명을 가르칩니다. 그러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기초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사랑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과 신뢰입니다.
주님에 대한 신앙은 곧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과 주님의 시간에 대한 온전한 신뢰 없이 주님에 대해 진정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 신앙으로 주님의 뜻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여러분이 원하는 방법으로 또는 여러분이 원하는 시간에 응답되지 않는 듯할 때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행사하는 것은 언제나 하늘의 질서, 즉 주님의 선하심과 뜻과 지혜와 시간을 전제로 합니다. 주님에 대한 그러한 신앙과 신뢰가 있을 때, 우리의 삶에 진정한 안전과 평화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분은 우리의 모범이십니다. 우리의 모범은 최근에 인기를 끄는 스포츠계의 영웅이나 연예계의 스타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우리에게 한시적인 것에 집중함으로써 영원한 것들을 잊게 만드는 값비싼 장난감이나 오락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범이자 우리의 최우선 순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에 대해 간증해야 하며 우리의 생활에 그분의 가르침과 모범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서로 가르쳐야 합니다.
구주는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십니다
브리검 영(1801~1877) 회장님은 우리가 따르는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실질적인 조언을 주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악마의 다른 점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고 조직하시는 반면 악마는 전적으로 파괴에 몰두한다는 것입니다.”1 이러한 대조는 실제로“모든 것에 반대되는 것이 있음”(니파이후서 2:11)을 보여 주는 중요한 예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강하게 하시며 우리를 약하게 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 예가 지니는 힘을 우리가 시간을 사용하는 데 적용해야 하며 여기에는 우리의 오락과 여가도 포함됩니다. 우리들의 인기를 얻어 유명해진 세상의 책과 잡지와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음악의 주제들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선택한 매체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강화시킵니까, 아니면 약화시킵니까?
살아오면서 제가 본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강화하고 고상하게 하는 오락이 점점 더 음울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며 파괴적인 형태의 공연과 오락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대조에 담긴 강력한 개념은 무엇이든 사람들을 강화시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사람들을 약하게 만드는 것은 사탄의 뜻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선택과 생각과 바람을 통해 주님 또는 사탄의 뜻을 지지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함으로써, 우리는 선한 것을 지지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기억하고, 주님 즉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셨고 모범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분께서 기뻐하실 만한 방법으로 행하겠다는 동기를 부여 받아야 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회개의 일부입니다
온 인류의 부활과 더불어 구주의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이며 가장 강력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종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과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삶에서 속죄의 역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이해에 있어 근간이 되는 것은 공의와 자비와 속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이 신성한 과정에서 고통과 회개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사람들에게 오는 공의의 무서운 요구, 즉 경전에 묘사된 비참함과 끝없는 고통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중단되고 제거될 수 있습니다. 한편에 위치한 공의와 속죄의 관계와 다른 한편에 위치한 자비와 속죄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 핵심 개념입니다.
몰몬경은 구주께서 죄 가운데 구속하시지는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악인은 사망의 줄이 풀리는 것 이외에는, 마치 구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같이 그대로 있게 되리니”(앨마서 11:41) 구주께서는 회개의 조건 하에, 사람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속하십니다.(힐라맨서 5:11 참조)
회개의 조건 중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며, 여기에는 그분의 속죄 희생에 대한 믿음과 의존이 포함됩니다. 앰율레크가 가르친 것처럼“회개에 이르는 신앙을 행사하지 아니하는 자는 공의의 요구의 온 율법에 드러나게 되나니, 그러므로 회개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자에게만 크고도 영원한 구속의 계획이 이루어지느니라.”(앨마서 34:16) 이는 분명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회개하는 사람은 모든 벌을 구주께서 대신 받으셨으므로 전혀 고통을 받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구주의 다른 가르침들과 상충하기 때문입니다.
앨마서 34장 16절은 회개하는 자는 구주께서 그 죄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만큼 고통을 받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하는 죄인은 어느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들의 회개와 구주의 속죄로 인해, 구주께서 감내하신 것과 같은 격렬하고 극심한 고통을 겪지는 않을 것입니다.
회개와 용서에 대해 참으로 폭넓은 가르침을 주셨던 스펜서 더블류 킴볼(1895~1985) 회장님은 개인적인 고통이 회개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에 대해 강한 고통을 겪기 전까지는 회개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는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2
구주께서는 그분의 대속을 위한 희생이“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지닌 모든 자를 위하여 율법의 목적에 부응하시나니, 그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율법의 목적이 부응될 수 없느니라”(니파이후서 2:7)고 말씀하시며 이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죄인은 죄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과 괴로움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 사람은 오직 진정으로 회개한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앨마의 말씀을 이해합니다. 앨마 이세는 확실하게 그것을 이해했습니다. 모사이야서 27장과 앨마서 36장에 나오는 그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킴볼 회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자주 사람들은 단지 안타까운 사건에 대해 슬픔과 후회를 표현한 것만으로 자신들이 회개를 했고 용서 받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3
개인적인 고통을 수반하며 회개를 이루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린도후서 7:10)은 몰몬이“주께서 그들로 하여금 죄 중에서 행복을 취함을 항상 용납하지 아니하려 하심으로 인한 정죄 받은 자들의 슬퍼함”(몰몬서 2:13)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이,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겪는 안이하고 비교적 고통 없는 슬픔 또는 잘못 때문에 겪는 슬픔과는 크게 다릅니다.
우리는 크나큰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심각한 범법을 회개하는 과정에서 왜 고통을 겪는 일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단순히 자신의 죄를 씻는 것을 회개의 결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이 견해는 불완전합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바람이 불 때 쉽게 휘어지는 나무와 같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이 나무는 너무나 깊게 땅바닥으로 구부러져서 죄를 짓듯 잎사귀가 진흙으로 뒤덮입니다. 우리가 잎을 씻어내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나무의 약한 속성, 즉 구부러지고 잎사귀를 더럽히는 일은 거듭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죄로 더럽혀진 사실을 단지 슬퍼하기만 하는 사람은 다음에 강한 바람이 불 때 또다시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쉽게 반복되는 일은 나무가 강화되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사람이 경전에서“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부르는 결과를 가져오는 과정을 겪고 나면, 구주께서는 그 사람을 단순히 죄에서 깨끗하게 하는 이상의 일을 하십니다. 주님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힘을 주십니다. 그렇게 강화되는 것은 우리가 죄를 씻는 목적 즉,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분의 면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는 깨끗함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죄를 범한 도덕적으로 나약한 사람에서, 하나님의 면전에 거할 수 있는 높은 영성을 지닌 강한 사람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전에서 말하는 것처럼“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어야]”(모사이야서 3:19) 합니다. 이것이 바로 경전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그 죄를 버린다(교리와 성약 58:43)고 설명하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은 그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이상의 일입니다. 죄를 버리는 것에는 개인의 궁극적인 변화가 수반됩니다.
베냐민 왕의 백성들은“더 이상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향이 없으며 끊임없이 선을 행하고자”(모사이야서 5:2) 한다는 말로 그러한 크나큰 변화를 묘사했습니다. 그러한 종류의 변화를 마음에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힘과 영적인 성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구원 받음이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모든 경륜의 시대에 주어진 메시지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내가 너희에게 준 복음”(제3니파이 27:13)이라고 부르신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니파이인들에게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그 계명은 이것이라, 너희 땅의 모든 끝이여, 회개하고, 내게로 와서 내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여 성신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성결하게 되어, 마지막 날에 내 앞에 흠 없이 서도록 하라.”(제3니파이 27:20)
현대의 계시를 통해 주님은 또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말을 믿지 아니하고 성신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기의 죄 사함을 위하여 내 이름으로 물로 침례를 받지 아니하는 자들은 정죄를 받을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내가 있는 내 아버지의 왕국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교리와 성약 84:74)
용서는 확실합니다
저는 희망의 메시지로 말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이 메시지는 모든 사람에게 참되지만, 특히 회개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회개는“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므로]”(로마서 3:23)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회개는 가능하며, 그런 후에 용서는 확실합니다.
킴볼 회장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때때로 죄의식 때문에 회개하려는 사람이 자기가 저지른 죄의 추악함과 가증함을 보고는 절망하여‘과연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실까? 내가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심히 낙담하고 가망이 없다고 느낄 때, 그리고 무력감 속에서 하나님께 신앙으로 간곡히 자비를 간구할 때‘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조용하고 작은 목소리가 마음속에 메아리쳐 올 것이다.”4
이런 일을 경험할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의 공덕으로 우리 마음에서 죄책감을 제하여 주시겠다고 하신 소중한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됩니다.(앨마서 24:10 참조)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라는 이사야 1장 18절의 약속은 얼마나 위안이 됩니까. “자기 죄를 회개한 자, 그는 용서 받으며, 나 주가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교리와 성약 58:42)는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께 이 말씀들이 참되며, 이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리이고,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계획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심을 간증드립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선지자에 대해 간증드리고, 조셉 스미스를 통해 이 후기에 회복된 복음에 대해 간증드립니다.
'종교 > 예수 ·속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구주 살아 계시다 (0) | 2015.11.01 |
---|---|
그리스도 구속주 (0) | 2015.10.31 |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0) | 2015.10.31 |
그리스도의 증인이 됨 (0) | 2015.10.31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0) | 2015.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