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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예수 ·속죄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1.

By President Boyd K. Packer Acting President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Boyd K. Packer, “Who Is Jesus Christ?,” Liahona, Mar 2008, 12–19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열두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선임 사도인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복음 16:15~16) 베드로는 훗날, 예수님은“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라고 간증했습니다.(베드로전서 1:20) 그분께서는“태초에 아버지와 함께[계셨고], 장자[이십니다.]”(교리와 성약 93:21)
아버지의 계획, 즉 구원과 행복의 계획(앨마서 34:9 참조)이 발표되었을 때(앨마서 42:5, 8 참조), 누군가는 그 계획을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과 자비를 주기 위해 속죄를 해야 했습니다.(앨마서 34:16; 39:18; 42:15 참조) 아버지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예수로 알려지실 분께서 자발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아브라함서 3:27)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영광이 영원토록 당신의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모세서 4:2) 그 준비 과정에서, 세상이 창조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들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을 창조하였나니, 이는 나의 독생자니라.”(모세서 1:33, 또한 에베소서 3:9, 힐라맨서 14:12, 모세서 2:1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그가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누가복음 1:31~32)
그분은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로 알려졌습니다.(아브라함서 1:16, 출애굽기 6:3 참조) 선지자들은 그분의 오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곧 참으로 영원하신 아버지의 아들을 보라!”(니파이전서 11:21, 또한 요한복음 1:14 참조) 그분의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 그가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누가복음 1:31~32)
그의 여러 칭호와 이름들이 그분의 신성한 사명과 성역을 설명합니다. 그분은 친히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니라” (제3니파이 9:18) “내가 … 아버지께 대한 너희의 변호자가 됨이니”(교리와 성약 29:5, 또한 교리와 성약 110:14 참조) “나는 선한 목자라”(요한복음 10:11) “나는 메시야, 시온의 왕, … 하늘의 반석이니”(모세서7:53)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거나] … 목마르지 아니하니라.”(요한복음 6:5)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한복음 15: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25) “나는 … 광명한 새벽 별이라”(요한계시록 22:16), “너희 구속주요 위대한 자존자인 예수 그리스도[라]”(교리와 성약 29:1)
그분은 중보자이시며(디모데전서 2:5 참조), 구주이시며(누가복음 2:11 참조), 구속주이시며(교리와 성약 18:47 참조), 교회의 머리이시며(에베소서 5:23 참조), 교회의 모퉁잇돌이십니다.(에베소서 2:20 참조) 마지막 날에,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심판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2:16, 또한 몰몬서 3:20 참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한복음 3:16) “그러한즉 구속은 거룩하신 메시야 안에서 거룩하신 메시야를 통하여 임하나니, 이는 그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니파이후서 2:6)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네 종교의 기본 원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종교의 기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간증, 즉 그분은 돌아가셨고, 매장되셨으며, 삼 일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종교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은 단지 그것에 부속되어 있을 뿐입니다.”1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주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오셨습니다. 배반의 순간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를 향해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태복음 26:52~53)
모든 비웃음, 학대, 매질, 그리고 십자가에서 최후의 고문이 가해지는 동안, 주님께서는 유순함과 침묵을 유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리의 본질을 나타내는 극적인 한 순간에는 예외셨습니다. 그 순간은 재판 과정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두려움에 휩싸인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9:10)
인간은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의 그 조용한 위엄을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요한복음 19:11)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빌라도가 그것을 행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께서 그것을 받아들일 의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요한복음 10:17~18)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전이나 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이기적인 영웅적 행동으로 그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감내하신 일을 겪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인간의 범법과 모든 인간의 죄의 짐을 지셨습니다. 그것은 조화와 균형의 속죄였습니다. 그분의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자비와 공의가 화해할 수 있었으며, 영원한 율법이 지속될 수 있었고, 필멸의 인간이 구원 받는 데 반드시 필요한 중재가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세상의 모든 사악함과 부패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이기로 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이미 있었고 또 앞으로 벌어질 모든 만행, 부도덕, 타락, 부패, 중독, 살인, 고문, 폭력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육체에 제한되어 있지도, 필멸의 고통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은 사탄의 가공할 권능 앞에 정면으로 맞서셨습니다. 그것은 겟세마네에서였습니다.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필멸의 존재도 악이 그 고결한 분의 빛 앞에서 쫓겨나 부끄러움으로 숨었던 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떠한 악도 그 빛을 꺼뜨릴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성취되었을 때, 우리의 죗값이 치러졌습니다. 죽음과 지옥 모두, 회개하는 모든 이들 앞에서는 힘을 잃었습니다. 마침내 인간은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 지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은 그 빛을 따르고 구속 받도록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무한한 희생에 의해, “그리스도의 [이] 속죄를 통하여, 온 인류가 복음의 법과 의식에 순종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신앙개조 제3조)
경전에 나오는“속죄”

영어 단어 atonement(속죄)는 사실 at-one-ment의 세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가 되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다, 화해하다, 불신을 없애고 일치시키다, 죗값을 치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영문 신약에 atonement(속죄)라는 단어가 단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딱 한 번 나옵니다!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베드로의 서한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8, 10~11; 강조 첨가)
영문 신약에 atonement(속죄-한글 신약전서에는 화목으로 번역되어 있음)란 단어는 이곳에서 단 한 번 나옵니다. 모든 단어들 중 이 atonement, 즉 속죄라는 단어가 말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과 관련하여 무척 많이 쓰였던 단어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단 한 번 쓰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에 대해 알고 있는 설명은 한 가지입니다. 몰몬경을 살펴보면, 니파이는 성경이 한때“열두 사도가 증거한 … 주의 충만한 복음[을 싣고] 있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간증했습니다. “[이 말씀이]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손에 의해 유대인들부터 이방인들에게 나아가고 나서, 너는 저 크고 가증한 교회가 형성됨을 보나니, 이는 다른 모든 교회보다 가장 가증한 것이니라. 이는 보라 그들이 어린양의 복음에서 명백하고 극히 귀한 많은 부분들을 제하여 버렸음이요, 주의 많은 성약을 또한 제하여 버렸음이라.”(니파이전서 13:24, 26)
야곱은 크고 가증한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그런즉, 시온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멸망하리니, 이는 그들이 온 땅의 창녀인 자들임이라. 이는 나를 위하지 않는 자들은 나를 대적하는 자들임이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니파이후서 10:16)
니파이는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에서 제하여진 많은 명백하고 귀한 것들로 인해, … 실로 심히 많은 자들이 실족하여 넘어지며, 참으로 그 결과 사탄이 그들 위에 큰 권능을 가짐[이라].”(니파이전서 13:29) 그리고 그는 귀한 것들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니파이전서 13:34~35 참조)
그리고 그것들은 회복되었습니다. 몰몬경에는, atone(속죄하다)이라는 낱말이 39번 나옵니다. 이 중 앨마서에 나오는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이에 이제 속죄가 행하여지지 않고서는 자비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지라, 그러므로 자비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세상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시나니, 이는 하나님이 완전하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자,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고자 함이라.(앨마서 42:15, 강조 첨가)
신약에는 단 한 번이지만 몰몬경에는 39번 등장합니다. 몰몬경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또 하나의 성약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증거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atone, atoneth(속죄하다), atonement(속죄)라는 단어는 교리와 성약에 다섯 번 나오고 값진 진주에는 두 번 나옵니다. 47개의 참조 성구가 그 중요성을 반증합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기타 수백 개의 성구들이 속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선택의지

속죄의 값은 주님에 의해 강요당하지 않고 치러졌습니다. 선택의지가 가장 중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계획에 따르면, 선택의지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태초부터,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역시 존중되었습니다.
“주가 에녹에게 이르되, 이 네 형제들을 보라, 그들은 내 손으로 지은 것이니, 내가 그들을 창조하던 날에 그들에게 그들의 지식을 주었고, 에덴 동산에서 내가 사람에게 그의 선택의지를 주었느니라.”(모세서 7:32)
에덴 동산에서 그 외 어떤 일이 일어났든, 죽음을 각오한 그 시험의 순간에, 아담은 선택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신 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할지라도 네가 스스로 택할 수 있나니, 이는 그 일이 네게 주어졌음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그것을 금한 것을 기억하라. 네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임이니라”(모세서 3:17)
인간에게 강제로 필멸성을 갖게 하는 것에는 너무 많은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계획의 본질적인 법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영의 자녀 각자에게 필멸의 육신과 시험 받을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담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에 따라 선택을 했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사람이 존재하게 하려 함이요,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니파이후서 2:25)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명함 받은 대로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 위해 과감히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그들의 육신의 창조는, 별도의 창조로서, 구원의 계획에 매우 중요했습니다. 뒤따른 그들의 타락은 필멸의 상태를 가져오고 구원의 계획을 진행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속죄의 필요성

니파이는“무한한 속죄”가 없으면 우리의 육신과 영에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의 영은 필연 … [악마]같이 되었으리[라]”(니파이후서 9:7~10 참조)
저는‘절대적으로’라는 단어를 거의 쓰지 않습니다. 그 말이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단어를 두 번 사용하고자 합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속죄는 부활이 진행되어 필멸의 사망을 극복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속죄는 인간이 스스로를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둘째 사망,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영적 사망을 극복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경전은 우리에게 부정한 것은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여덟 번이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니파이전서 10:21, 15:34, 앨마서 7:21, 11:37, 40:26, 힐라맨서 8:25, 제3니파이 27:19, 모세서 6:57 참조)
“그러할지라도 네가 스스로 택할 수 있나니, 이는 그 일이 네게 주어졌음임이니라.”(모세서 3:17)라는 경전의 말씀은 아담과 이브와 그 후손들에게 필멸성이 지닌 모든 위험 요소를 알려 주었습니다. 필멸의 상태에서 인간은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되며, 각각의 선택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아담의 선택은 불순종의 대가로 사망을 요구하는 공의의 법을 발동시켰습니다.
그러나 재판 중에 주께서 하신“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요한복음 19:11)라는 말씀은 자비 또한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빚을 갚고 인간을 자유케 하기 위해 구속주가 보내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계획되어 있었습니다.
앨마의 아들 코리앤톤은 죄를 지으면 죗값을 치르고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오한 교훈을 통해, 앨마는 그의 아들과 우리들에게 구속의 계획을 가르쳤습니다. 앨마는 속죄에 대해 말하면서“이제 영원한 형벌이 없이는 사람들에게 회개가 임할 수 없었나니” (앨마서 42:16)라고 전했습니다.
형벌이 회개가 요구하는 값이라면, 그 값은 무척 싼 것입니다. 회개의 결과는, 그것이 고통스러운 결과일지라도, 우리를 보호합니다. 아이가 손가락을 불에 데었을 때 아파서 우는 것과 같은 아주 간단한 이치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칩니다. 고통이 없다면, 그 아이는 불에 타 죽을 것입니다.
회개의 축복

저는 회개 없는 세상에서는 화평도, 행복이나 안전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꺼이 고백합니다. 만약 제가 저지른 잘못을 지울 길이 없다면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고통은 제가 감당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게는 그렇습니다.
속죄는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회개하기만 한다면 항상, 범법과 사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회개는 면책 조항입니다. 회개는 감옥 문을 안에서 열수 있게 하는 열쇠입니다. 우리는 그 열쇠를 우리의 손에 쥐고 있으며, 그것을 사용할 선택의지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유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선택의지는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루시퍼는 죄와 그 결과에 대해 우리를 속이며 교묘하게 우리의 선택을 조종하려 합니다. 그와 그의 천사들은 우리를 유혹하여 합당하지 못하게, 즉, 사악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자신의 동의 없이는 우리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토록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의 모든 권능을 동원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선택의지가 속죄 없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파괴를 부르는 치명적인 선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형상대로 창조됨

우리는 창세기, 모세서, 아브라함서, 몰몬경, 그리고 엔다우먼트를 통해 인간의 필멸의 육신은 별도의 창조 과정을 거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배웁니다. 창조가 다른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타락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그저 단순한 동물이라면,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가 더 논리적일 것입니다.
학자들 가운데, 인간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인간보다 낮은 차원의 동물들과 돌들을 살펴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영혼을 찾기 위해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물을 수천, 수백만 단위의 시간으로 측정하는 훈련을 하고, 인간이라고 불리는 동물은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도 그렇게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도 선택의지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선택의지는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이상의 더 높은 것을 바라보고,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며, 사물을 시대, 영겁, 경륜, 영원으로 측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압니다! 모든 것이 “창세 이전”부터 계획되었습니다.(교리와 성약 38:1, 또한 교리와 성약 49:17, 76:13, 39, 93:7, 아브라함서 3:22~25 참조) 창조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이르는 사건들은 우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택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계획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단순한 진리를 압니다! 창조와 타락이 없었다면, 속죄도 필요 없었을 것이고 우리를 중재할 구속주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도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속죄의 상징

구주께서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피 흘리셨습니다. 이보다 수세기 전에, 상징과 앞으로 있을 일의 예표로서 유월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지켜져야 할 의식이었습니다.(출애굽기 12장 참조)
죽음의 역병이 애굽에 선포되었을 때, 각 이스라엘 가정은 흠 없는 첫 새끼인 숫양을 취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유월절 양은 뼈를 부러뜨리지 않고 죽여야 했으며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야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가 칠해져 있는 집을 지나칠 것이며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은 양의 피에 의해 구원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희생의 법은 더 이상 피흘림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히브리인들에게 가르친 것같이“단번에 …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히브리서 10:10, 12)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그때 이후로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 곧 회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성찬을 통해 영원히 기념될 것입니다. 성찬을 취함으로써 우리는 침례 성약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어린양의 살과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의 피를 기억합니다.
이 상징이 지혜의 말씀에 다시 언급된 것은 간과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지혜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 세대의 성도들이 건강과 지식의 위대한 보화를 얻을 것이라는 약속 이외에도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더 주셨습니다. “나 주는 그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주노니, 멸하는 천사가 이스라엘의 자녀에게 한 것같이 그들을 지나칠 것이요, 그들을 죽이지 아니하리라.”(교리와 성약89:21)
저는 속죄에 대한 저의 느낌에 대해 태연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속죄에 대해 저는 마음속 깊이 감사와 은혜를 느낍니다. 저의 영혼은 이를 이루신 그분, 곧 제가 증거하는 이 그리스도, 우리의 구주를 따라갑니다. 그분에 대한 저의 간증을 드립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구속주,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변호자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저는 우리의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을 경배하기 위해 무릎 꿇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게 선택의지가 있으므로, 저는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