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생을 삶의 전부로 바라본다면, 그때에는 고통, 슬픔, 실패 그리고 짧은 삶이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전세의 과거와 죽음 이후의 영원한 미래까지 멀리 펼쳐지는 영원한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때에는 일어나는 모든 일 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시련을, 성취할 수 있도록 책임을,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도록 일을, 그리고 영혼을 시험할 수 있도록 슬픔을 주시는 것에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힘을 강화할 수 있도록 유혹에,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질병에, 불멸의 존재가 되고 영광스럽게 될 수 있도록 죽음에 노출되어 있지 않 습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병자가 고침을 받는다면, 그리고 모든 의로운 사람들이 보호를 받고 악인들이 멸망 당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전체 프로그램은 백지화 될 것이며 복음의 기본적인 원리인 선택의지는 파멸되고 말 것입니다. 아무도 신 앙으로 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기쁨과 평화와 보상을 즉시 받는다면, 악은 있을 수가 없고, 모든 사람들은 선을 행하겠지만 선을 행하려는 의로움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힘에 대한 시험과 성품의 발전, 권능의 성장, 선택의지는 없을 것 이며 오직 악마의 통제만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과 제한된 이해에 따라 우리의 모든 기도가 즉시 응답을 받는다면, 그때에는 고통, 슬픔, 절망 심지어는 죽음도 거의 또는 아예 없을 것이 며,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또한 기쁨, 성공, 부활도 없고 영생과 신의 경지에 이 르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것이 있음이 꼭 필요함이라 … 의로움 … 간악함 … 거룩함 … 비참함 … 선 … 악 …”(니파이후서 2:11) 인간인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뇌를 몰아내고 지 속적인 평안과 위안에 대한 확신을 받으려고 하지만, 만일 우리가 슬픔과 재난에 대해 문을 닫아 버린다면, 우리의 가장 훌륭한 친구들과 은인들을 배제시키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인내와 오래 참음과 자제심을 배우면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 저는“굳도다 그 기초”의 이런 가사를 좋아합니다.나 너를 불러 깊은 물 건너나 슬픔의 강물이 넘치지 못하리 나 너 함께 하고 근심 덜어주며 네 깊은 곤경을 불태워 없애리 [찬송가, 35장 참조] 그리고 제임스 이 탈매지 장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지상의 남자나 여자가 자 신이 겪게 되는 어떠한 번민이라도, 인내로 맞는다면 … 반드시 보상의 결실을 보 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연약함, 불평, 비판에 굴복한다면 이러한 것들이 강력한 영향으 로 우리는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떠한 고통도, 우리가 경험하는 어떠한 시련도 헛된 것이 아닙 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육 및 인내, 신앙, 강인함, 겸손함과 같은 자질의 발전에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 모든 것과 인내하는 모든 것을, 특히 참을성 있 게 견뎌 낼 때, 성품을 키우고, 마음을 순화시키고, 영혼을 키우고, 더욱 다정하 고 인정 많게 되며,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기에 더욱 합당하게 됩니다. … 그리고 우리가 이곳에 와서 더욱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될 수 있도록 받는 교육은 바로 슬픔과 고통과 수고와 환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올슨 에 프 휘트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괴로움과 끝없는 아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바라 보면서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불친절, 무관심, 불공평에 대해 주님을 탓합니다. 우리는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도 불완전합니다! … 신권의 권능은 제한이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현명하게 우리 각자에게 어떤 제 한을 두셨습니다. 제가 제 삶을 완전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신권의 권능을 발전시 킬 수는 있으나 신권을 통해 아픈 모든 사람을 고칠 수 없다 해도 저는 감사한 마 음을 갖습니다. 어쩌면 저는 죽어야 할 사람들을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 면 고통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을 그 고통에서 구해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저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킬까 두렵습니다. 비전과 이해력은 제한적인데 무한한 권능이 제게 있었다면, 아마도 저는 아빈 아다이가 기둥에 묶여 화형당할 때 그를 화염에서 구했을지도 모르며, 그렇게 하 여 아빈아다이에게 되돌릴 수 없는 피해를 입혔을 수도 있습니다. 아빈아다이는 순교자로 죽었으며, 순교자의 보상, 즉 승영을 받았습니다.제 권능에 그 한계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을 그의 고통에서 보호했을지도 모 릅니다. 저는 분명 그의“육체[의] 가시”[고린도후서 12:7]를 낫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저는 주님의 계획을 방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세 번 기 도를 드려 주님께“가시”를 없애 주실 것을 간청했으나 주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 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2:7~10 참조] 만일 바울이 언변이 좋고, 멋지 고, 잘생겼거나, 그를 겸손하게 만든 것들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바울은 여러 차례 자기 자신을 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 제가 1844년 6월 27일에 카테지 감옥에 있었더라면 선지자 조셉과 축복사 하이럼의 몸을 관통했던 총알들을 빗나가게 했을지도 모르기에 두렵습니다. 제가 고통과 고난에서 그들을 구할 수도 있었겠으나, 그렇다면 조셉과 하이럼은 순교 자로서의 죽음과 보상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그런 결정을 할 필요가 없 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제한 없는 그런 권능으로 겟세마네의 고통, 모욕과 가시관, 법정에서의 무례함, 육체적 상해로부터 그리스도를 보호해야겠다고 분명 느꼈을 것입니다. 그 분의 상처를 치료하여 낫게 하고 그분에게 식초 대신에 시원한 물을 드렸을 것입 니다. 고난과 죽음에서 그분을 구해 드렸을 수도 있는데, 그랬다면 그분의 속죄의 희생은 세상에 없었을 것입니다.저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목숨을 돌려주는 책임을 감히 짊어지고 싶지 않습 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의 잔이 자신에게서 거두어지도록 기도하시면서, 자신 의 뜻과 아버지의 뜻 사이의 차이점을 친히 인정하셨으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 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복음 22:42]7 (스펜서 더블류 킴볼의 가르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