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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말씀·경전

정결한 종교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0. 3.

마태복음 11장에서 구주는 침례 요한의 제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지 않으심으로써 의미심장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태복음 11:2~5).
구주께서는 간단한 교리적 설명, 곧 자신이 참으로 “오실 그이”라고 밝히는 대신 그분이 하신 일, 즉 봉사의 모범으로 대답하셨습니다.
2014년 4월 연차 대회에서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님은 이렇게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사람들에게 의로운 영향을 미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 살았던 존재 중 가장 위대한 모범이십니다.”1
이타적인 봉사, 즉 자신을 잊고 타인의 필요 사항을 돕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자 자신의 생활을 희생하는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성이었습니다. 베냐민 왕은 구주가 탄생하시기 100년도 더 전에 “너희가 너희 이웃을 섬길 때 너희는 다만 너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모사이야서 2:17)이라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면서]”(야고보서 1:27) 타인에게 봉사할 때 “정결한 경건(religion: 종교)”의 핵심적인 면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정결한 경건(종교)”이란 믿음을 선언하는 것 이상으로, 그것은 믿음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동료 여행자를 사랑하십시오
1984년 7월 중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성전에서 결혼하고 몇 주밖에 되지 않은 때였던 그때 아내 캐럴과 저는 유타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유타에서 저는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캐럴은 대학 교육을 마칠 계획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차를 몰고 갔습니다. 두 차에 저희가 가진 물건을 모두 다 싣고 가고 있었습니다.
목적지까지 반쯤 갔을 때, 캐럴이 차를 몰고 제 차 옆으로 오더니 어떤 몸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휴대 전화나 스마트폰, 문자 메시지나 트위터 같은 것이 없던 시절입니다. 차 창문을 통해 표정을 보니 캐럴이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캐럴은 운전을 계속 할 수 있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저는 새 신부가 걱정되었습니다.
유타 주 비버라는 조그만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캐럴이 다시 차를 몰고 제 차 옆으로 왔고, 저는 아내에게 차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캐럴은 몸이 아팠고 계속 운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두 차에는 옷과 결혼 선물이 가득했지만, 안타깝게도 돈은 거의 없었습니다. 호텔 방을 얻을 예산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둘 다 비버는 초행길이었고, 뭘 해야 할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몇 분을 더 운전해 가다 공원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주차장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약간 그늘이 진 나무를 발견한 저는 거기에 담요를 깔고서 캐럴이 쉴 수 있게 했습니다.
몇 분 후, 거의 텅 빈 주차장으로 다른 차 하나가 들어와서 우리 두 사람의 차 옆에 주차를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또래의 아주머니가 차에서 내리셨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도움이 필요하냐며 말을 건네셨습니다. 아주머니는 운전을 하면서 우리를 보고는 차를 세워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을 말씀드리자, 아주머니는 자기 집으로 가서 필요한 만큼 쉴 수 있게 해 줄 테니 당장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서 시원한 지하 침실에 있는 안락한 침대에 몸을 뉘었습니다. 우리가 안정을 찾자 이 훌륭한 자매님께서는 자기는 볼 일이 아주 많아서 그러니 몇 시간 동안은 우리만 집에 있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배가 고프면 주방에서 먹을 것을 찾아 먹어도 괜찮고, 또 자기가 돌아오기 전에 가야 하면 현관을 닫고 가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참으로 절실했던, 잠을 푹 잔 후에 캐럴은 상태가 한결 나아졌습니다. 우리는 주방에 들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다시 떠났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까지 그 친절한 아주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아쉽게도 저희는 주소를 적어 놓지도 않았고, 또 가던 길을 멈추고 어려움에 빠진 낯선 사람들에게 집을 활짝 열어 주었던 우리의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세상의 누구보다도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 10:37 참조)는 구주의 훈계를 많이 실천하신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의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필멸의 여정에서 우리의 동료 여행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2
우리는 길과 가정, 놀이터, 학교, 직장, 교회 어디에서나 “동료 여행자들”을 만납니다. 그 길을 가면서 축복하고 봉사하면서 구하고, 보고, 행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구주와 같이 될 것입니다.
구하라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고귀한 구주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의 죄를 속죄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육신의 아픔과 질병과 슬픔조차 참을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앨마서 7:11~12 참조)
비록 힘은 미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분과] 같은 자’(제3니파이 27:27)가 되기 위해 진실로 노력할 수 있습니다.”3
“동료 여행자들”을 축복하고 싶다는 진정한 소망을 품고 그분과 같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들을 들어올릴 기회가 올 것입니다. 이런 기회가 더욱더 구주와 같이 되려는 우리의 참된 소망을 시험하며 우리를 불편하게 할 때도 자주 있을 테지만, 만인을 위한 구주의 가장 위대한 봉사인 그분의 무한한 속죄 역시 결코 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아버지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나는 마셨고 사람의 자녀들을 위한 나의 준비를 마쳤느니라.”(교리와 성약 19:19)
더욱더 구주와 같이 되려고 진정으로 노력할 때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희가 만난 선한 사마리아인은 영의 지시에 따라 어려운 처지에 있던 낯선 사람에게 다가올 만큼 영과 가까이 생활했습니다.
보라
영적인 눈으로 본다는 것은 곧 사물을 참으로 있는 대로 보는 것을 뜻하며, 이는 다른 방법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는 필요 사항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보면, “복 받을” 사람도 “저주를 받은” 사람도 똑같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옥에 갇힌 사람들 속에서 구주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를] 보[았나이까]”(마태복음 25:34~39, 40~44 참조)라고 물음으로써 그들이 받은 보상에 대해 반응했습니다.
다만 영적인 눈으로 보았던 이들만이 타인의 어려운 처지를 인식하고는 행동으로 옮겨 고통받는 사람들을 축복했습니다. 저희의 선한 사마리아인도 영적인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저희의필요 사항을 인식했던 것입니다.
행하라
우리는 주변에서 도움이 필요한 것을 볼 수는 있어도 우리가 주려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지레 짐작하여 우리가 나서기에는 불충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주님과 같이 되고자 노력하고 영적인 눈으로 동료 여행자들의 필요 사항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실 수 있다는 것을 신뢰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행해야 합니다.
성전에 들어가면서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 못 걷게 된” 남자와 마주쳤는데, 그 남자는 두 사람에게 구걸을 했습니다.(사도행전 3:1~3 참조)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본보기이자 권유가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사도행전 3:6~7).
우리는 시간과 재능, 친절한 말, 또는 신체적인 일을 함으로써 행할 수 있습니다. 구하고, 본다면, 우리는 행하고 축복할 수 있는 여건과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행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집으로 우리를 데려가서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눴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몬슨 회장님은 이와 똑같은 원리를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지상 생활을 해나가면서, 각자의 여리고 길을 따라 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또 나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요? 강도를 만나 나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까요? 여러분은 어떠할까요?
나는 부상당한 사람이 도움을 청하는 것을 보고도, 피하여 지나갈까요? 여러분은 어떠할까요?
또는 나는 보고 듣고 잠시 멈춰서 도울까요? 여러분은 어떠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경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에게는 결코 어느 것에도 비할 바 없는 영원한 기쁨을 주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4
구하고, 보고, 행하여 더욱더 구주와 같이 되어 가면서 우리는 베냐민 왕의 이런 말씀이 참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 이웃을 섬길 때 너희는 다만 너희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니라]”(모사이야서 2:17) ◼(더블유 크리스토퍼 와델 장로 칠십인 20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