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운 문화 때문에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워질 때, 우리는 자신과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빨리 단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습니다. 성전의 영원성은 우리가 현대의 혼돈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성전에 갈 때마다, 우리는 의식들을 통해 결혼의 자연 질서를
포함한 우주의 자연 질서로 다시금 방향을 잡게 됩니다. 고대
뱃사람처럼 우리는 방향을 잡기 위해 하늘을 봅니다. 우리는
성전을 통해 그렇게 합니다. 후기 성도 학자인 휴 니블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성전은 우주의 조직 원리를 나타내기 위해 지어졌습니다.
성전은 필멸의 존재가 이런 것들에 대해 배우는 학교입니다. …
“… 지상 성전[은] 모든 것의 중심에 있으며, … 그
둘레를 하늘의 모든 운행들이 돌며, 하늘과 땅을 함께 묶는
매듭입니다.”1
따라서, 성전은 우리 마음에 결혼과 가족 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고유 율법을 새길 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결혼
우리는 우선 성전의 태초 이야기이기도 한, 아담과 이브에
대한 이야기에서 결혼에 대한 성전 가르침을 배웁니다. 언젠가
한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복음과 성전의
중심에 계시다면, 왜 성전 엔다우먼트는 그리스도 생애 이야기를 가르치지 않지? 도대체 아담과 이브에 대한 이 모든
것은 뭐지?”
저는 그리스도의 생애란 속죄를 주시는 이야기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때로 필멸의 무시무시한
반대 속에서도 속죄를 받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받은 첫 번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새로 아기가 태어날 때 느끼는
사랑을, 자녀를 키우며 영혼의 전력을 기울이는 희생을,
자녀들이 선택 의지를 어리석게 사용하는 것을 지켜보는
괴로움을 알게 된 첫 번째 부모였습니다.
아버지 리하이는 우리에게 그들의 경험과 우리의 경험을
이해할 교리적인 배경을 제시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아담과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 말해 줍니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 그대로 머물렀을
것이라 …
또 그들은 자녀를 갖지 못하였을 것이요, 그리하여 그들은
무지한 상태에 머물렀으리니, 비참을 알지 못하매 기쁨이 없고, 죄를 알지 못하매 선을 행하지 못하였으리라.” …
“아담이 타락한 것은 사람이 존재하게 하려 함이요,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니라.”(니파이후서 2:22~23, 25)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죄와 고통, 그리고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가능해진 과정인, 기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기 위한 배경을 생성합니다.
속죄 때문에 우리는 정죄받지 않고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속죄를 받는다
함은 단순히 검은 얼룩을 지우는 것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인간이 발전할 수 있게 하는 핵심 교리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지 그들을 천진한 세계인 에덴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아무런 줄거리도,
주인공의 성장 과정도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를 붙잡고 에덴 동산을 떠나 함께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성전의 태초 이야기는 필멸의 삶 동안 계속되는 반대에
맞서도록 서로를 돕는 결혼한 부부의 이야기를 다분히 담고
있습니다. 때로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반대에 맞서야만 참된
기쁨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넓혀
주는 두 가지 함의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는 회복에서
가르치는 타락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현명한 선택을 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오직
필멸의 삶만이 그들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전통적인
기독교는 이브의 선택이 온 인류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미치도록
한 비극적인 실수라고 가르칩니다. 일부 기독교 교회에서는
여전히 여성이 어리석은 이브의 딸이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개념에 강력히 반대하며
아내가 남편에게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공정을 기하고자 남편도 아내에게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양쪽 배우자가 서로에게 독립적일 때,
그들은 오늘날의 “구속력이 없는 언약”을 받아들인 것이며,
그런 사람들은 재미가 없어지거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결혼
생활을 떠납니다.
의존 또는 독립, 어떤 쪽이 옳을까요? 어느 쪽도 옳지
않습니다. 회복된 복음은 나머지 기독교와는 달리 아담과
이브가 동산에서 한 선택이 실수나 사고가 아니라, 구원의
계획에서 신중한, 심지어 영광스러운 부분이었음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회복은 이브와 모든 여인을 남자와 완전히 동등한
고귀한 존재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브는 아담에게 종속되지도 않았고, 그로부터
독립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브와 아담은 서로에게
상호 의존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에서 “서로를 돕”는 “동등한
동반자”였습니다.2
상한 심령을 제단으로 가져감
둘째, 아담과 이브가 동산을 떠났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제단을 쌓고 희생 제물을 드리게 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난
후 한 천사가 나타나 아담에게 왜 희생 제물을 드리냐고
물었습니다. 아담이 대답하기를 "나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것 외에는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천사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
일은 … 독생자의 희생하실 모형이니라”.(모세서 5:6~7)
따라서 아담과 이브가 희생했던 동물은 아버지께서 미래에
아들을 속죄 제물로 희생하실 것을 가리키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 후 천사는 그에게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의 계획이
상반되는 모든 것, 참으로 그들의 필멸의 삶에서의 모든 경험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할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부는 아담과 이브가 희생물을 바쳤던 것처럼,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성전에 갈 것을 계명으로 받았기 때문에
오늘날 성전에 갑니다. 단순한 순종이 의식을 전혀 행하지 않는
것보다 분명 낫습니다. 그러나 천사를 보내신 주님께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 그들이 알기를 원하셨고, 저는 그분께서 우리도
왜 그래야 하는지 알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오늘날의 성전 의식도 또한 “독생자의 … 모형”입니까?
아담과 이브의 제단처럼, 성전 제단이 어떻게 기도와 희생,
성약의 제단이라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엔다우먼트의
모든 성약 안에 들어 있는 희생의 범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속죄 사명을 마치신 이후로 우리는
더 이상 희생 동물을 제물로 바치지 않지만, 그 대신
다른 방법으로 희생을 하겠다는 성약을 맺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할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니파이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내게
희생으로 드릴지니”(제3니파이 9:20; 또는 니파이후서 2:7 참조).
동물 희생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희생하시는 것을
상징하지만,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의 희생은 아들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예수님은
심장이 터져 돌아가셨습니다”.3
그와 같이 우리는 현재 우리
자신을, 다시 말해 개인적인 희생물로 상한 마음을 바칩니다.4
십이사도 정원회의 닐 에이 맥스웰(1926~2004) 장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개인적인 희생은 결코 짐승을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한 동물적인 본성을 제단
위에 놓고 그것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5
최근에 유타 세인트 조지 성전 회장으로 봉사하며, 한 젊은
부부를 인봉했습니다. 그들이 제단으로 나아오고,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았을 때, 저는 그들이 이 의식을 통해, 제단
위에 그들의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바치고자 하는
것임을, 다시 말해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희생하셨듯이,
서로와 하나님께 스스로를 사심없이 바치고자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할까요? 서로에 대한
평생에 걸친 희생을 통해, 다시 말해,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살고자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더욱더 그분처럼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들 각자는 하나님께 가까이나아오게 되며, 또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집니다. 따라서, 인봉
의식의 성약대로 산다면 그들 결혼이 성결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삶 자체가 또한 성결하게 될 것입니다.
결혼에 대한 이 이해는 오늘날 만연하는 결혼관과는
아주 확연하게 다릅니다. 선한 목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양을 돌보고 품삯을 받는 삯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리가 올 때 삯꾼은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삯꾼은 왜 달아날까요? 왜냐하면 양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한복음 10:11~15참조)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두 삯꾼 사이에 이루어지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합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삯꾼은
‘곤경’이라는 늑대에게 위협을 느낄 때 달아나고 맙니다.
부부가 삯꾼에 불과하다면, 생명은 고사하고 안락함이나
편의를 내놓으며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 굳이 위험을 무릅쓰려
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선한 목자를 본받아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결혼의 제단에 바칠 때, 우리는 성약의 양을 위해
종일토록 또는 한 번에 한 시간만이라도 우리의 생명을
내놓기로 약속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제한적인 방법으로, 구주께서 우리의 고난을 지신 모범을 따라
동반자와 자녀들의 고난과 기쁨을 이타적으로 지기로 성약을
맺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피터 휘트머에게 그의 선교 동반자인
올리버 카우드리에 대해 “그의 모든 고난 중에 너도 고난을
겪으며”(교리와 성약 30: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와 그분이 구속하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며 바로 이
구절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셨도다]” (이사야 63: 9; 또한 교리와 성약
133:53 참조).
아내가 여러 해에 걸쳐 쇠약해지는 질병을 겪은 후에
세상을 떠난 한 성전 봉사자가 제게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축복받은 50년을 함께 살아왔기에 저는 사랑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몇 년 동안 아내를 돌보려고
노력하면서 사랑이 정말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면서, 이 사람은 삯꾼이라면
결코 깨닫지 못할, 즉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동정심의 깊은
샘물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발견들의 축적으로
주님처럼 살고 죽음으로써, 선한 목자와 같이 되는, 성결하게
되는 과정을 밟아 가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삶은
우리 문화의 사회적 관심에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힘을
불어넣습니다
결혼과 진정한 기쁨
최근에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성전 인봉의 승영 약속을
받으려면 얼마나 완전에 가깝게 살아야 하는 거지?” 남편과
아내는, 특히 영원한 축복을 구하는 부부는, 서로를 잘 알기에
때로 자신들이 충분히 완전에 가깝게 살고 있는지, 혹은 자신의
배우자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 솔직히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로나이가 나눴던 작별 인사 속에 나오는 대답을
좋아합니다. “너희가 만일 모든 경건하지 아니한 것을 거부하고,
너희의 능력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니, 그의 은혜로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될지라.”(모로나이서 10:32; 강조체
추가) 우리 자신에게서 경건하지 아니함을 뿌리 뽑는 한 가지
방법은 성전 가까이에 머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 안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기]”(교리와 성약 84:20, 강조체 추가)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함은 우리 자신의 고유한 개인 역량의 한도에 이르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인
완전의 범위에 이르기까지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가 경건하지 않음을 버리고, 정직하게,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온전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가 온전하게 되는 과정을 완결지을 것입니다.
1902년에 작성된 제일회장단 서한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우리
희생을 모두 합친다면 어떻게 될지 제시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온전한 상태에 이르면 그들을 남편과 아내로 하나로
묶었던 성약을 포함한, [의]와 조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소망
외에 다른 어떤 소망도 갖지 않을 것입니다. … 첫 번째 또는
해의 왕국의 부활을 성취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순수하고
거룩해야 하며, 그들의 몸 또한 완전해야 합니다. …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모든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천사들처럼 아름다울 것이며,
… 그때에 육신의 약점들은 극복되고 잊혀질 것이며, 남자와
여자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는 율법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6
제가 아는 한 여성이 50년 전에 성전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녀와 남편은 여러 자녀를 둔 후에, 남편의 파란만장한
삶으로 인해 이혼하게 되었고, 그는 교회에서 파문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교회 회원 자격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했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전남편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딸이 어머니가 성전에 돌아올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그녀를 데리고 제 사무실로 찾아와서, 저는 그녀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정죄됨 없이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해 평온한
대화를 나눈 후에 우리는 회개와 재침례, 성전 축복의 회복
절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 후 저는 그녀에게
회복 의식을 받으면 그녀의 성전 인봉 또한 회복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요?
딸이 먼저 말했습니다. “저는 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제 아들도 조울증입니다. 우리는 그 장애에 대해 예전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도움이 되는 약을
복용합니다. 돌이켜 보면, 제 아버지도 조울증을 앓았는데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 가족의 삶에 일어난 많은 힘겨웠던 것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아빠를
판단하지 않아요.”
그 어머니는 온화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만일 언젠가 정말로
성전에 돌아갈 수 있다면, 제 인봉이 회복되게 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떠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성전과 엘리야의
인봉 권능이 자녀와 부모의 마음을 서로에게로 돌릴 뿐
아니라 아내와 남편의 마음을 서로에게로 돌리게 하는 화해의
원천임을 깨달았습니다. 후에 저는 어머니가 재침례를 받았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주신 결혼의 질서가 우리
삶에서 그 질서를 찾고, 세우고, 지키는 등의 어떤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든 간에 가치가 있음을 증거합니다. 또한 선한
목자처럼 살고자 노력하는 남편과 아내는 진정한 기쁨으로 가득
찬, 더욱더 풍성한 삶을 발견할 것이며, 서로에게 그런 삶을
주게 될 것임을 증거합니다. ◼
2014년 1월 31일,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제이 르우벤 클락 법률 협회 연례
노변의 모임에서 “결혼, 가족법, 그리고 성전”이란 제목으로 하신 말씀에서.
브루스 시 하펜 장로
1996년부터 2010년까지
칠십인으로 봉사함2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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