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5월초에 로렌조 스노우는 일리노이 주 나부에서 성도들과 합류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고 그 달에 나부를 떠났다. 출발 전에 스노우 장로는 시간을 내어 영국에서 이미 선교 사업을 하고 있는 아홉 사도 중 몇몇의 가족들을 찾아갔다. 브리검 영의 가족을 찾아간 로렌조는 그들이 사는 통나무 오두막에 나무 틈새가 벌어져 그들이 “바람과 폭풍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영 자매는 키우던 젖소를 잃어버려 이를 찾아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막 돌아온 터여서 지쳐 있었다. 형편이 말이 아니었지만 영 자매는 스노우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처지를 보셨겠지만 [그이에게는] 저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세요. 저는 그이가 명예롭게 해임될 때까지 임지에 남아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스노우 장로는 영 자매가 감당하고 있는 “처절한 가난과 옹색한 형편”에 동정심이 일어 도움을 주고 싶었다. “나는 임지까지 가는 총 경비의 십 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밖에 없었고, 모자란 돈을 구할 가망도 없었으며, 그날은 임지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주머니에서 얼마를 꺼내 드렸지만 …… 자매님은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재차 드렸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그때 반은 고의로, 반은 우연히 돈을 마루에 떨어트렸는데, 그 돈은 헐거운 판자 틈새로 들어가 버렸다. 그로써 실랑이는 끝이 났다. 나는 작별 인사를 하고, 돈은 시간이 있을 때 꺼내 쓰시도록 그대로 두고 나왔다.” 스노우 장로는 일리노이에서 뉴욕까지 간 후, 그곳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배를 탔다. 42일에 걸친 항해 동안 극심한 폭풍우가 세 차례나 몰아쳤다. 승객들은 두려움에 울기도 했으나 스노우 장로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리라 믿었기에 평정을 유지했다. 배가 영국 리버풀에 정박하자 스노우 장로의 가슴은 “하나님께서 지상의 나라들에 구원의 성역자로 불러 파견한 이들을 보호하고 지탱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찼다.” 영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지 4개월이 지난 후, 스노우 장로는 다른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현 지방부 회장 부름과 흡사한 런던 컨퍼런스(London Conference) 회장으로 봉사하도록 지명되었고, 복음을 계속 전파하면서도 지역 내 지부 회장 등의 신권 지도자들을 감독했다. 스노우 장로는 그 부름에서 봉사하는 동안 십이사도 정원회 일원이자 선교부 회장이었던 팔리 피 프랫 장로에게 종종 보고를 올렸다. 그는 보고서에 “구원받을 방법을 묻는” 많은 사람들과 일요일 모임을 하는 방에 “넘치도록 모인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 주님이자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개종자들]을 침례 주는 기쁨”에 대해 적었다. 그 일에 열정적이고 낙관적이던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횡포와 사악함 속에 둘러싸여 있지만, 시온은 이를 뚫고 나가기 시작했으며, 머지않아 이 도시를 밝히는 등불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스노우 장로가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런던 컨퍼런스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는 이러한 성공을 기뻐했지만, 그런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 히버 시 킴볼 장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노우 장로는 “이러한 과제들이 [그가] 이전에 해 보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도록” 자신을 이끌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킴볼 장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과 [윌포드] 우드럽 장로님은 이 시간이 제게 경험의 장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그 말이 맞았습니다. …… 제가 이곳에 온 이래, 성도들 사이에서 새로운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스노우 장로는 새로운 책임에 임하면서 곧바로 알게 된 진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나님께서 많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 조지 에이 스미스 장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비슷한 심경을 토로했다. “제가 이룬 작은 일들은 조금도 제가 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교사로서 제 직분을 영화롭게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제가 온전히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감리하도록 임명된 지도자들의 지시나 권고를 따르지 않고서는 어떤 성도도 결코 번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한, 주 하나님께서는 제가 직분을 수행하는 동안 저를 지탱하고 지지해 주신다고 굳게 믿습니다. …… 그분 앞에서 겸손히 길을 가면, 계시의 영을 지니고 의롭게 권고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런던 컨퍼런스 회장으로 봉사하는 것 이외에도, 스노우 장로는 선교사들이 회복된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종교 소책자, 혹은 팸플릿을 만들었다. The only Way to Be Saved[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이 소책자는 후에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19세기 후반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스노우 장로는 1843년 1월까지 영국에서 봉사했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그는 브리검 영 회장으로부터 받은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일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스노우의 일지 한쪽 여백에 짧게 남겨진 것이 전부이다. “브리검 영 회장님의 요청대로 몰몬경 두 권을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에게 전함.” 스노우 장로는 영국을 떠날 때 나부로 이민하는 한 무리의 영국 후기 성도들을 인도했다. 일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나는 250명에 달하는 부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중 상당수는 내가 지도자로 있던 시절에 성약 안으로 들어온 친한 벗들이었다. 친구들에 둘러싸여 다시 대서양을 건너게 되었다. 2년 반 전에 외롭게 홀로 서 있던 때에 비해 이는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스완턴 호에서 겪은 일화에서는 스노우 장로의 지도력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다음 일화는 로렌조 스노우의 일지에서 옮긴 것이다. “나는 [성도들을] 모두 불러 서로 간의 합의에 따라 소대와 분대로 나누고 적합한 사람을 각각 소대장과 분대장으로 임명하였고, 각 무리들을 관리하기 위한 자치 규약을 만들었다. 우리 가운데는 대제사 몇 명과 서른 명 정도의 장로들이 있었다. 나는 몇몇 장로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소 구분될 정도로 작은 일이라도 맡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바람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든 그렇게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나는 그들이 할 일을 직접 나서서 정해 주기로 작정했다. 나는 이런저런 직책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을 임명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모두가 어떤 책임을 갖게 했다. 주중에는 기도를 [위해] 밤마다 모든 사람을 모았다. 일주일에 두 번 설교 시간이 있었고, 일요일에도 따로 모임을 하고 성찬을 취했다. 내가 친분을 쌓기 바라던, 우리 배의 선장은 매우 냉담하고 말을 삼가는 듯이 보였으며 …… 마음속에 우리에 대한 편견이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바다로 나온 지 약 2주가 지났건만, 바다에서 통상 일어나는 일 외에는 주목할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다 다음과 같은 일이 발생했다. 선장 휘하인 젊은 독일인 승무원이 사고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워졌다. 품행이 단정하고 착실하며 규율을 잘 지키는 그 젊은 승무원은 선장과 여러 차례 항해를 함께했으며 선장, 항해사, 선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다. 성도들 또한 그와 매우 가까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 배 전체가 슬픔과 비통함에 휩싸였다. 그는 입에서 피를 토했고, 심한 발작과 경련을 일으켰다. 여러 치료법을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그가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어 보였다. 선장은 선원들에게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사람씩 선실에 가서 그에게 작별을 고하라고 했으며, 선원들은 다음 날 아침 살아 있는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선장의 지시에 따랐다. 선실에서 나오는 선원들의 눈은 대부분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 배에 탔던 후기 성도 중 한 사람인] 마틴 자매는 환자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에게서 병자 축복을 받으면 회복될지도 모르니 축복을 받는 게 어떠냐고 환자에게 물었다. 이 제안을 환자는 흔쾌히 수락했다. 나는 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를 필요로 한다는 전갈이 와서 시계를 보니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곧바로 일어나 선실로 가다가 일등항해사를 만났는데 그는 환자를 막 보고 오는 길이었다. 나를 지나치자마자 그는 스테인스 형제를 만나 스노우 씨가 선원에게 가서 안수를 할 것이라고 알려 주면서 ‘하지만 그 모든 게 소용없을 거예요. 이제 불쌍한 그 친구는 끝났어요.’ 라고 [슬픈 어조로] 말했다. 스테인스 형제가 ‘오, 아닙니다. 안수를 하면 주님이 회복시켜 주실 수도 있어요.’라고 대답하자 그 선원은 ‘……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소박하게 반문했다. 나는 통로를 따라가다가 선실 문 앞에서 선장을 만났는데,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스노우 씨, 와 주셔서 기쁩니다. 곧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아무 소용없겠지만 말이죠.’라고 말했다. 나는 승무원의 방으로 들어가 침대 곁에 앉았다. 그는 숨이 몹시 가빴고 거의 죽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소리 내어 말을 할 수도 없었기에 축복을 해 달라는 뜻만 겨우 보였다. 그에게는 독일 함부르크에 부양해야 할 아내와 두 자녀가 있었고, 그 가족들을 남겨놓고 떠난다는 생각에 몹시 상심한 듯싶었다. 나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병자 축복을 했고, 축복이 끝나자마자 그는 일어나 앉더니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의 병을 낫게 해 주신 주님을 소리 높여 찬미했다. 곧이어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선실 밖으로 나가 갑판 위를 걸어갔다. 다음 날 아침, 그 승무원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으며, 평소처럼 일을 할 수 있는 그의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원들은 하나같이 기적이라고 외쳤고, 성도들은 그 일을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했다. 선장도 이를 굳게 믿었고 깊은 감사를 느꼈을 뿐 아니라 그 이후로 그의 마음은 우리의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 또한 자신의 권한으로 해 줄 수 있는 모든 호의와 관용을 우리에게 베풀었으며, 끊임없이 우리의 편의를 살폈다. 게다가 우리가 여는 모든 모임에 참석하고, 우리 책을 사서 읽었다. 항해사들 역시 그 같이 행동했으며,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에서 헤어질 때에는 침례를 받겠다고 약속했다. 약 1년 후, 그들 중 일등항해사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고 알려 주었다. 선장 또한 언젠가 복음을 받아들여 성도들과 함께 생활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 승무원은 우리가 뉴올리언스에 도착했을 때 침례를 받았으며, 나는 그와 헤어질 때 그가 선물했던 성경책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스노우 장로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스완턴호를 떠날 때 몇몇 선원들은 눈물을 흘렸다. 실로 우리 모두는 매우 엄숙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스노우 장로는 뉴올리언스에서 동행한 성도들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1843년 4월 12일 나부에 도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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