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감 영 대관장은 후기성도들을 나부에서 로키 산맥의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인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도들은 결집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것은 오하이오, 미주리, 일리노이에선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영 대관장은 1847년 7월 24일 그레이트 솔 트레이크의 계곡을 바라보면서 요셉 스미스가 서부에 있으리라 예견했던 성도들을 위 한 보금자리가 바로 이곳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시현을 통해 이곳이 바로 그 장소임을 보았다. 영 대관장은 이렇게 기록했다. “빛의 영이 내게 임하더니 계곡 위에 도 감돌았으며, 나는 성도들이 그 곳에서 안전하게 보호 받게 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 습니다.”(브리감 영의 역사 기록, 564쪽) 성도들은 이곳에서 그들 스스로를 속세와는 먼 사람들로 입지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서부로의 집합은 1847년 7월 영 대관장과 개척자 부대가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수십 년 간 계속되었다. 철도를 통해 더 쉽게 여행할 수 있게 된 1869년 이전에 어려운 서부 이주를 감행한 성도는 무려 8만 명이나 되었다. 그 후로도 성도들은 정든 집을 떠나 어 느 때는 가족까지 뒤에 두면서까지 시온으로 집합했다. 그들의 지리적 이동은 세상으 로부터의 영적인 이주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영 대관장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세상의 모든 구석으로부터 불러모아 …한 마음이 한 뜻이 되어 모든 일을 행하고, 권 능과 위대한 영광 가운데 오실 인자의 재림에 대한 준비로 지상에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세우게 하셨다.”(데져렛 뉴스: 주 2회 간행물, 1868년 1월 21일, 2쪽)라고 선언 했다. 그는 영적이고 현세적인 시온을 세우는 데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리라고 기대했 고 또 그러길 요구하기도 했다. 성도들은 산 꼭대기까지 간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놓아 후발로 도착하는 다른 성도들을 돕게 했다. 성도들은 영 대관장의 지시 하에 솔트레이크 계곡을 떠나 서부에 약 4백 개의 정착 촌을 세웠다. 이들은 먹을 것을 재배했고,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자기 지역에 서 상업에 종사함으로써 경제 자립을 기했다. 나아가서 주님과 서로에게 의지하는 법 을 배우기도 했다. 영 대관장이 성도들에게 수행하도록 한 사업이 다 성공한 것은 아니다. 사실 경제적 성공이 그의 주요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는 가축을 기른다거나 돈을 버는 일보다는 서 로를 도와 거룩한 백성이 되는 데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영 대관장은 과거 경험을 통 해 사람은 열심히 일하며 자신의 임무를 받아들임으로써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 다. 그는 1856년 솔트레이크시티에서 회중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사람들을 성 도로 만들기에 좋은 장소입니다.”(주간 데져렛 뉴스, 1856년 9월 10일, 5쪽) 브리감 영은 수년 간 데져렛(나중에 유타 주에 편입됨)이라는 지역에서 준 주지사 및 인디안 문제 담당 감독관으로 봉사했다. 얼마 안가 이 자리는 연방 정부가 임명한 관리가 맡게 되었다. 영 대관장은 성도들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문제를 두고 벌어진 후기 성도들과 연방 정부간의 갈등을 해결하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다른 종파의] 성직자들, 언론인, 개혁주의자들 및 정치인들이 퍼붓는 비난과 조롱을 잘 참아냈다. 이 들은 영 대관장과 성도들의 종교적 믿음 및 정치.사회.경제적 관행을 빌미삼아 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사람들을 성도로 만들”필요가 있다는 영 대관장의 확 고 부동한 생각을 바꿔놓지는 못했다. 영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후기성도들의 지역 사회를 시현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하늘의 한 거대한 가족처럼 조직되어 있었습 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맡은 분야에서 몇 가지 임무를 행하면서 자기만의 발전보다는 전체의 유익을 위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는 사람의 마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질서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여 의로움이 지상을 덮는 것의 훌륭한 결과에 대해서도 보았습니다.”(데져렛 뉴스: 주 2회 간행물, 1868년 1월 21일, 2쪽) (브리감 영의 생애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