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과거 동독의 츠비카우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열한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정치적 반대자로 의심을 받아 감시가 심해지자 부모님은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 외에는 안전한 길이 없다고 느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소유물을 버려둔 채, 각기 다른 시각에 다른 경로를 통해 서독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버님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으셨기에 베를린을 통과하는, 가장 짧은 경로를 택하셨습니다. 형들은 북쪽으로 갔다가 헤어져서 각자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이곳에 있는 상당수의 여러분과 같은 또래였던 누나는 청녀 교사였던 헬가 파스만 자매님과 다른 몇몇 사람과 함께 짧은 시간 동안 서독을 통과하는 기차를 탔습니다. 그들은 승무원에게 돈을 주어 기차 문 하나를 잠그지 말라는 부탁을 해 두고, 기차가 서독 국경을 지나자 달리는 기차에서 자유를 찾아 뛰어내렸습니다. 저는 누나의 그 용기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저는 막내였는데, 어머니는 저와 함께 국경을 이루는 산을 걸어서 넘어가기로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마치 산행이나 소풍을 준비하듯 점심을 꾸리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멀리 기차로 간 다음, 여러 시간을 걸어서 서독 국경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국경의 감시는 삼엄했지만, 우리에게는 지도가 있었고 국경을 안전하게 넘을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알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혹 미행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주변을 유심히 살피셨습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머니의 다리와 무릎은 점점 힘이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긴 언덕을 오르는 동안 저는 어머니의 무거운 가방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 안에는 음식과 중요한 서류와 가족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분명 국경을 넘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마침내 안전하다고 느끼셨을 때, 우리는 앉아서 싸 온 점심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중 처음으로 어머니가 마음을 놓으신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국경 표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갈 길이 아직도 멀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국경 반대편인 동독에 있었습니다!
국경 수비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늘어놓은 음식을 정신없이 다시 꾸리셨고, 우리는 부리나케 산비탈을 올라갔습니다. 이번에는 국경을 넘은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히 멈출 엄두도 못 냈습니다.
가족들은 각자 매우 다른 경로를 택했고 가는 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은 모두 안전하게 서독에 도착했습니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재회했습니다. 얼마나 기쁜 날이었는지 모릅니다!방금 들려 드린 인생 경험은 제게 매우 소중한 여행담입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저는 그런 “여행”을 여러 차례 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산맥이나 정치적 경계선을 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거나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여행담과 같습니다. 저는 인생이 각각의 “여행담”이 모여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2013-04,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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