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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교회사·경전 안내

제6장-신앙의 발자취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8.

나부를 떠날 준비를 함

  교회의 지도자들은 적어도 1834년부터 성도들을 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록키 산맥 서쪽으로 이주시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지도자들은 오랫동안 탐험가들과 함께 실제적인 부지에 대해 토론하고 정착할 적절한 장소를 찾기 위해 지도를 연구했다. 1845년 말에 교회 지도자들은 서부에 관해 입수할 수 있는 가장 최신의 정보를 손에 넣었다.

  나부에서의 박해가 심해져 감에 따라 성도들이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명백히지게 되었다. 1845년 11월에 나부는 떠날 준비로 한창이었다. 이주하는 동안 성도들을 이끌도록 백인 조장, 오십인 조장, 십인 조장이 부름을 받았다. 100개의 그룹이 각자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마차 공장을 세웠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과 목수와 가구 제작자들은 밤늦게까지 재목을 다듬고 마차를 만들었다. 쇠를 구입하기 위해 회원들을 동부로 파견하였으며 대장장이들은 여행에 필요한 물건과 새로운 시온을 개척하는 데 필수적인 농기구를 만들었다. 가족들은 식료품과 가정용품을 모았으며 저장 용기에 말린 과일과 쌀과 밀가루와 약품을 채워 넣었다. 그들은 공익을 위해 함께 일하였으며 그토록 짧은 기간에 가능한 이상의 일들을 달성했다.

  

겨울여행의 시련

  원래는 1846년 4월에 아부를 벗어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의 민병대가 성도들이 서부로 떠난는 것을 막으려 하는 위협 때문에 십이사도들과 지도층에 있던 다른 시민들은 1846년 2월 2일에 서둘러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즉시 서부로 출발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으며, 2월 4일에 출발하기로 했다.  브리감 영의 지휘 하에 성도들의 첫 번째  그룹이 간절한 마음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열망은 커다란 시험에 직면했다. 왜냐하면 늦겨울의 날씨와 뜻밖의 봄비로부터 쉴 수 있을 영구적인 캠프에 이르기 전에 가야 할 길이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었다. 

  수 많은 성도들은 박해자로부터 안전하게 되기 위해 먼저 넓은 미시시피강을 건너 아이오와 땅으로 가야 했다. 여행길의 위험은 황소가 수많은 성도들을 실어 나르던 보트를 발로 차서 구멍을 내 보트가 잠길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한 목격자는 그 불운한 승객들이 깃털 침구와 나무 막대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모았다. "그들은 판자 또는 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잡고 매달려서 차갑고 무자비한 파도가 움직이는 대로 물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였다. ...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잠기지 않은 마차 꼭대기로 기어 올라가서 보트에 있던 소들이 목적지의 강기슭으로 헤엄쳐 가는 동안 좀더 편하게 있었다." 마침내 모든 사람들이 보트 위로 구조되어 건너편  강기슭에 닿았다. 

  처음으로 강을 건너 지 2주후, 그 강은 한동안 얼어 붙었다.
얼음이라서 미끄럽긴 했지만 마차와 말의 무게를 감당해 주어서 보다 쉽게 가응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눈 속을 걸어갈 때 성도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몹시 어려움을 겪었다. 강 건너편의 슈가 크리크 야영지에서는 계속 바람이 불어 눈이 거의 20센티미터 정도의 깊이로 싸었다. 그후 눈이 녹는 바람에 땅바닥은 진흙탕이 되어 버렸다. 계속 진행하라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탠트와 마차와 서둘러 지은 오두막에서 웅크리고 있는 서오들에게 하늘과 땅 주변의 모든 요소가 함께 상황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여행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아니오와를 통과하는 초기 단계였다. 호세아 스타유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밤을 지내기 위해 침대 천으로 임시 천막을 지었다. 이 때 아내는 거의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고 어린 아들도 고열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거의 의식이 없었다. 다른 많은 성도들도 역시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것 잘되리

  성도들은 이러한 신앙과 용기와 결심을 통해 추위와 굶주림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이겨 나갔다. 윌리암 클레이톤은 불과 한 달 후에 첫아기를 낳을 아내 디안사와 그녀의 부모들을 두고, 나부를 떠나는 첫 번째 그룹에 속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아내가 잘 있는지 염려하면서 진흙 길을 걷고 추운 텐트에서 야영한 탓에 그는 신경이 몹시 쇠약해졌다. 두달이 지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아내가 아기를 안전하게 출산했는지를 알지 못했으나 마침내 "건강하고 통통한 아들"이 태어났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윌리암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저 앉아서 그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줄 뿐 아니라 여러 세대 동안 교회 회원들에게 영감과 감사의 송가가 될 노래를 썼다. 그것은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라는 노래로서 유명한 그 가사에는 그의 신앙과 역경 가운데서 "모든 것 잘되리!" 라고 노래했던 수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다. 그들의 뒤를 따랐던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하나님의 왕국에서 희생하고 순종한 것에 대한 대가로 기쁨과 평화를 느꼈다.

 

윈터 궈터즈

  성도들이 나부로부터 301마일 떨어진서부 아이오와의 정착지에 도착하는 데는 131일이 걸렸다. 그 곳은 그들이 1846년에서 1847년까지의 겨울을 지내고 록키 산맥으로 여행할 준비를 할 곳이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그들은 1,000마일이나 되는 미국의 거대한 평원을 보다 빨리 건너가는 데 도움이 될 여행 지식을 많이 익혔기 때문에 이듬해에는 111일 정도 결려 그것을 해냈다. 

  많은 성도들이 미주리 강의 양쪽을 따라 정착했다. 가장 큰 정착지는 윈터 궈터즈였는데 서부의 네브라스카에 있었다. 그 곳은 약 3,500명 정도의 교회 회원들에게 금새 안식처가 되었다. 성도들은 통나무 집이나 버드나무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살았다. 또한 미주리 강의 아이오와 쪽에 있는 켄스빌이란 곳과 그 주위에는 2,500명 정도의 성도들이 살았다. 이 정착지의 생활에서 그들은 여행 중에 겪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다. 여름에는 말라리아 열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겨울이 되어 신선한 음식을 전혀 구할 수 없을 때는 전염성 콜레라, 괴혈병, 치통, 야맹증, 심한 설사로 고통을 겪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은 계속되었다. 남편인 사무엘이 스코틀랜드로 선교사업을 떠난 메리 리차즈의 말에 의하면 여인들은 여전히 청소하고 다림질하고 세탁하고 바느질하고 편지도 쓰며 부족한 식표품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가족들을 돌보는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신학 토론, 춤, 교회 모임, 파티 및 개척자 재연과 같은 활동을 포함하여 메리는 윈터 쿼터즈에서 성도들의 생활을 밝게 기록했다.

  남자들은 햠께 일했으며 종종 만나서 여행 계획과 미래의 정착지에 대해 토의했다. 그들은 질서있게 협력하여 캠프외곽의 초원에서 가축을 몰아 풀을 먹였다. 또 들판에서 일하고 정착지 주변을 지켰으며 제분소를 만들어 움직였고 여행을 위해 마차를 준비했으며, 종종 과로와 병으로 고통을 겪였다. 그들 중 몇몇은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들판을 갈아서 뒤따라올 성도들이 수확하게 될 작물을 심었다. 

  브리감 영의 아들인 존은 윈터 쿼터즈를 "몰몬의 밸리 포지"라고 불렀다. 그는 그 곳의 공동 묘지 가까이에 살았으며 "너무나 자주 문 앞을 지나가는 작고 슬픈 모습의 행렬"을 목격하였다. 그는 옥수수 빵과 소금에 절인 베이컨과 소량의 우유로 차려진 자기 집의 식사가 "얼마나 초라하고 늘 똑같아"보였는지 회상하며 걸쭉한 옥수수 죽과 베이컨이 너무너 식상해서 식사를 하는 것이 마치 약을 먹는 것과 같았고 음식을 삼키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오직 성도들의 신앙과 헌신만이 이 어려운 시기를 통과하게 해주었다.

 

몰몬 대대

  성도들이 아이오와에 있는 동안 미육군 병사 모집대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1846년 5월에 시작된 멕시코 전쟁에 참가할 파견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몰몬 대대로 불리게 된 사람들은 미국 남부를 가로질러 캘리포니아로 행군해 가야 했으며 돈과 의복과 양식을 받게 되어 있었다. 브리감 영은 나부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모으고 각 병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한 돈을 조달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써 남자들에게 참가하도록 격려했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통해 정부와 협력한 것은 국가에 교회 회원들의 충성심을 보여주었고, 또 그들이 공유지와 인디언 지역에 임시로 거주하는 정당한 이유를 대 주었다. 결국 541명의 남자들이 지도자의 권고를 받아들여 입대했다. 33명의 여인과 42명의 아이들이 그들을 따라갔다. 

  그 어려운 시기에 아내와 자녀들을 홀로 두고 떠나는 슬픔 때문에 대대원들에게 있어 전쟁터로 나가는 시련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윌리암 하이드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가족을 두고 떠난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었으며, 불볕같은 햇빛이 내리비치고, 겨울이 오면 12월의 차가운 바람이 불어댈 황량하고 쓸쓸한 외딴 평원에 마차를 제외하고는 집도 없는 처지에 있었다.
  "내겐 아내와 어린 두 아이가 있었는데 그들은 연로한 부모와 남동생 한 명과 함께 남았다. 대부분의 대원들이 가족과 헤어졌다. ... 그들과 다시 만날 때가 언제인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불평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몰몬 대대는 부족한 식량과 물 그리고 충분하지 못한 휴식과 의학 관리, 급속한 행군으로 고통을 겪으며 남서쪽의  캘리포니아로 2,030마일을 행군해 주둔했다. 병적 기간이 끝나자 그들은 제대하여 가족들에게 돌아가도록 허락 받았다. 그들은 미국 정부에 대한 수고와 충성으로 인해 그들을 지휘하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제대한 후, 많은 대원들이 잠시 동안 캘리포니아에 머물면서 일했다. 그 중 많은 사람들은 북쪽의 아메리카 강으로 가서 존 셔텨 제재소에서 일했는데 그 곳에서 1848년에 금이 발견되어 그 유명한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를 재촉했다. 그러나 말일성도 형제들은 그러한 행운을 잡기위해 캘리포니아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힘들게 아메리카의 평원을 가로질러서 서쪽의 록키 산맥으로 가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인 제임스 에스 브라운은 이렇게 설명했다. 

  " 그 이래로 나는 지상의 부가 있는 그 장소를 결코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후회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는 언제나 금보다 더 고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익을 분가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땅에서 부를 보았고 그대로 머물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40년 이상이 지난 후에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고 돌아 봅니다. 사람들은 "바위 밑에도 언덕 위에도 시냇물 속에도 어디에든 금이 있어... 자넨 곧 혼자 설 수 있는 재산을 모을 수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무를 떠올렸습니다. 우리의 명예가 걸린 문제였으며, 우리는 서약을 맺었고, 지켜야 할 원리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하나님과 그의 왕국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친구와 친척들이 광야와 처녀지와 사막에 있었습니다. 누가 그들의 상태를 알았겠습니까? 우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즐거움과 부보다 의무가 먼저였으며 그러한 느낌으로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 이 형제들은 하나님의 왕국이 지상의 어떤 물질보다 더욱 가치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에 따라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브룩클린 호의 성도들

  대부분의 성도들이 나부에서 육로를 통해 록키 산맥으로 갔지만 미국 동부의 어떤 성도들은 바다를 통해 여행했다. 1846년 3월 4일에 70명의 남자와 68명의 여자 그리고 100명의 어린이들이 브룩클린 호를 타고 뉴욕 항에서 캘리포니아 해안으로 17,000마일을 여행했다. 그 항해동안 애틀랜틱과 퍼시픽이라는 이름의 어린이 두명이 태어났고 12명이 죽었다. 

뉴욕항에서 1846년 2월 4일 말일성도 238명을 태우고 175일간의 서부이동을 한 브루클린호

서부이동의 때를 같이 하여, 
뉴욕항에서는 1846년 2월 4일 브루클린(Brooklyn)호에 말일성도 238명이 승선하여 남미를 돌아 175일(6개월) 만인 1846년 7월 29일에 캘리포니아, 여바브에나(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 일부는 여기에 정착하고 140명은 1848-1850년 사이에 1,100여km를 행군하여 유타주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 전에 이미 도착한 성도와 합류했다.

말일성도 238명을 태운 브루클린호의 175일간의 서부이동 항로

1846년 1월 브리감 영은 동부 여러 주에 있는 성도들에게 서부로의 대이동에 참가하거나 아니면 배로 남미를 돌아 캘리포니아까지 오라고 일렀다.
교회 뉴욕지부의 활동적인 지도자 사뮤엘 브래넌 형제가 캘리포니아로 항해하는 성도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좌측 지도 참조>
항로: 뉴욕항-인도양-남미-태평양-하와이-샌프란시스코 항구
항해기간: 175일(약 6개월)
승선 말일성도: 238명

  6개월 동안의 여행은 몹시 힘들었다. 열대 지방의 더위 속에서 승객은 몹시 붐볐고 음식과 물도 모두 형편없었다. 케이프혼을 돈 후 그들은 후안 페르난데즈섬에 상륙하여 5일 동안 휴식을 취했다. 캐롤린 아우구스타 퍼킨스는 "다시한번 단단한 땅을 보고 밟는 것은 선상 생활에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감사하게 여겼으며 그 순간을 즐겼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은 신선한 물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빨았으며 과일과 감자를 모으기도 하고 물고기와 뱀장어를 잡기도 하고 "로빈스 크루소 동굴"을 탐험하며 섬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1846년 7월 31일에 그들은 심한 폭풍우와 부족해지는 식량과 오랫동안의 항해로 점철된 여행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 머물러서 뉴호프라는 이름의 거주지를 세웠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그레이트 베이진에 있는 성도들과 합류하기 위해 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갔다.

 

계속되는 집합

  미국 전역과 다른 많은 나라에서 충실한 개종자들이 말을 타거나 걷거나 또는 다른 여러 가지 교통 수단을 통해 자신의 나라와 고향을 등지고 성도들과 합류하여 록키 산맥으로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1847년 1월에 브리감 영 대관장은 영감받은 "이스라엘의 진영에 관한 주의 말씀과 뜻"(교리와 성약136:1)을 발표했다. 그것은 서부로 이주하는 개척자들을 다스리는 헌법이 되었다. 대대가 조직되었으며 그들 가운데 있는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도록 책임이 주어졌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악과 탐욕과 다툼을 버려야 했다. 또 그들이 즐거우면 음악과 기도와 춤으로 감사를 보여야했다. 주님은 영 대관장을 통해 성도들에게 "가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대로 행하며 네 원수를 두려워 말라"(교리와 성약136:17)고 하셨다. 

  첫 번째 개척자 그룹이 윈터 쿼터즈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팔리 피 프랫이 영국에서 선교 사업을 마치고 돌아와, 존 테일러가 영국 성도들의 선물을 갖고 뒤따라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테일러 형제가 영국회원들의 사랑과 신앙의 증거로써 여행자들을 돕기 위해 보낸 십일조를 갖고 도착했다. 그는 또한 개척자들이 행로를 계획하고 주위환경에 대해 알게 해주는데 있어 매우 귀중하다고 입증된 과학 기구를 가져왔다. 1847년 4월 15일에 브리감 영이 이끄는 첫 번째 대대가 출발했다. 그 후 20년에 걸쳐 대략 62,000명의 성도가 그들을 따라 시온에 집합하기 위해 마차와 손수레로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도중에는 어려움 뿐만 아니라 놀라운 풍경도 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셉 모이너는 솔트레이크 계곡에 들어가기 위해 "힘든 시기"를 겪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버팔로 떼와 커다란 삼나무 언덕과 같이 이전에 결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광대한 지역에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또한 성도들은 육체적인 피곤을 잊을 수 있도록 신앙을 고무시켜 주는 일들을 경험했다. 하루종일 여행하고 모닥불에 요리한 음식을 취하고 나서, 남자와 여자들은 무리지어 모여서 그날의 활동을 논의했다. 그들은 복음 원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부르며 춤도 추고 함께 기도했다. 

  성도들이 서서히 서쪽으로 나아감에 따라 죽음이 자주 그들을 찾아왔다. 1850년 6월 23일에 크랜달 가족의 수는 열다섯이었다.  그 주가 끝날 때까지 심한 전염성 콜레라로 가족 중 일곱 명이 죽었다. 다음 며칠 동안에 다섯명이 더 죽었다. 그후 6월 30일에 크랜달 가족의 수는 열다섯이었다. 그 주가 끝날 때까지 심한 전염성 콜레라로 가족 중 일곱 명이 죽었다. 다음 며칠 동안에 다섯 명이 더 죽었다. 그 후 6월 30일에 크랜달 자매가 아기를 낳다가 아기와 함께 죽었다. 
  성도들은 비록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여행하는 주에 많은 시련을 겪기는 하였지만 단합, 협동, 낙천적인 정신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들은 신앙과 주님에 대한 헌신으로 함께 결합하여 고난 중에서도 기쁨을 찾았다. 

                   

여기가 바로 그 곳이다. (This Is The Place)   
1847년 7월 21일에 첫 번째 개척자 대대의 올슨 프랫과 에라스터스 스노우가 이주자들을 앞에서 이끌고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사림아 간신히 헤치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무성하게 자란 풀과 농사 짓기에 좋은 땅과 계곡 전체를 흘러다니는 여러 개의 작은 냇물을 보았다. 3일 후에 장티푸스를 앓고 있던 브리감 영 대관장을 태운 마차가 계곡으로 들어서는 협곡 입구에 닿았다. 영 대관장은 그 광경을 둘러보면서 그들의 여행에 대해 예언적인 축복을 해 주었다. "충분하다. 여기가 바로 그곳이다."

  뒤따르던 성도들도 산에서 빠져나오자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부의 태양에 어슴프레 빛나는 소금 호수가 있는 그 계곡은 시현과 예언의 대상이었으며 그들과 그들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꿈꾸었던 땅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피난처였다. 그 곳에서 그들은 록키 산중의 강대한 백성이 될 것이었다.

  몇 년후에 영국에서 온 개종자인 진 리오 그리피스 베이커는 그녀가 솔트레이크시티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기록했다. "도시는... 네모들을 불러 모은 것처럼 네모지게, 혹은 구획으로 반듯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각각의 지구에 집이 한 채씩 들어 있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내 느낌을 잘 분석할 수는 없지만 아마 길고 위험한 여행을 하는 동안 나와 나의 가족을 보살펴 주신 것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느낌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바로 이곳이다-기념공원-개척자주립공원
미국 유타주 솔트 레이크 시티의
"바로 이곳이다" 기념비

몰몬 파이오니아

1847년 후기성도들이 장장 1300마일을 포장마차와 손수레를 끌고 또는 걸어서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한 것을 기념한 개척자 기념비. 록키산맥을 넘어서 솔트레이크 분지에 내려온 계곡 첫 도착지에 있다.

후기성도 개척자들은 록키산맥 정상에서 지도자 브리감 영은 잠시 영감에 젖어 있다가 솔트레이크 분지를 내려다 보며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새로운 시온의 땅임을 알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선언한다!
"This Is The Place!" ("바로 이곳이다!" 라고... )


바로 이곳이다 기념비큰사진!

바로 이곳이다 기념비

   monh.jpg

바로 이곳이다' 기념비에 조각된 후기성도들의 이동 장면이다  

    monl.jpg

같은 기념비 밑의 많은 조각품 중의 한 장면 진흙탕과 대평원, 험준한 산맥을 넘어가는 성도들의 필사적인 탈출과정이 잘 표현되어

 

 

 

손수레 부대

  1850년대에 교회 지도자들은 최대한 많은 이주자들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줄 수 있도록 경비를 줄이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손수레 부대를 만들었다. 이 방법으로 여행했던 성도들은 수레에 100파운드의 밀가루와 제한된 양의 식량과 소지품만 실은 다음, 수레를 끌며 평원을 가로질러 갔다. 1856년에서 1860년사이에 10개의 손수레 부대가 유타로 여행해 갔다. 그 중 8개의 부대는 성공적으로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달했지만 마틴과 윌리 두 부대는 일찍 들어닥친 겨울 때문에 그들 가운데 많은 대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미국 유타주 솔트 레이크 시티
템플 스퀘어에 있는 손수레부대 기념상
바퀴 두 개가 달린 손수레를 끌며 4,800km을
걸어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한 개척자 3,000여명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