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사랑·감사·자비

선한 사마리아인의 잊혀진 상징물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3.

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이야기 중 영향력이 가장 큰 이야기 한 가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이다. 예수님은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한 사람에게 이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질문함으로써 대답하셨다.“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그 사람은 신명기 6장 5절과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예수께서“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약속하시자 그 사람은 도전하듯 응수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이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시며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0:25~35 참조)

 

심오한 차원의 의미

각 비유에는“귀 있는 자”(마태복음 13:9)만이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구주께서는 종종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믿지 않는 자들은 구주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단언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는 [그러한 비유]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하셨다.”그는 또한 우리가“눈을 뜨고 순수하게 읽기만 한다면 그러한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이 원리를 알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상징적인 메시지에

대해 깊이 반추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 뛰어난 이야기는 소수의 현대 독자들만이 눈치챘을 수도 있는 방법으로 구원의

계획을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 비유의 내용에서 분명히 의미하는 바는 매우 실제적이며 인상적이다. 그러나 유서 깊은 기독교적 전통에 따르면 이 비유는 또한 인류의 타락과 구속에 대한 인상적인 비유이기도 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초기 기독교적 이해는 프랑스 샤르트르에 있는 유명한 11세기 대성당에 묘사되어 있다. 이 성당의 아름다운 색 유리창 윗부분에는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모습이, 그리고 이와 나란히 아랫부분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그려져 있다. 이는“중세에 널리 퍼져 있던 그리스도의 비유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이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 궁금한 점이 생겼다. 아담과

이브의 타락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는 곧 그 해답을 찾았다. 이 비유적인 해석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대로 깊이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 후 2세기, 프랑스의 이레나이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죄로 인해 상처 입은 타락한 희생자를 구원하는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수년 후에 클레멘트의 제자 오리겐은 이러한 해석은 다음과 같이 상징을 묘사한 훨씬 더 이전의 초기 기독교인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던 사람은 아담입니다. 예루살렘은 낙원이며

여리고는 세상을 말합니다. 강도들은 적대 세력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이며

레위인은 선지자, 그리고 사마리아인은 그리스도입니다. 상처는 불순종을 나타내고, 짐승은 주님의 몸이며, 들어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받아들이는 주막은 교회입니다. … [주막]주인은 교회를 돌볼 책임을 맡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사마리아인이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했다는 것은 구주의 재림을 상징합니다.”

이와 같은 비유적인 해석은 고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전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이레나이우스와 클레멘트와 오리겐에 의해 그리고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의 크리소스톰과 밀란의 암브로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아우구스틴의 지지속에 초기

기독교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같은 해석은 프랑스의 부르주와 상에 있는 두 성당의 중세풍 색 유리창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찾아볼 수 있다.

 

구원의 계획의 예표와 그림자

독자들은 경전을 상고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게 되는데, 특히 이러한 기록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39 참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그것은 구원의 계획과 구주의 대속의 사랑과

영생을 상속받기 위한 우리의 여정에 대해

가르친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지상에 살기

위해 하나님의 면전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그 의미는 후기의

선지자를 통해 회복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볼 때 가장 분명해진다.

 

그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어떤 사람.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사람을 아담에 비유했다. 이

관계는 현대의 번역보다는 고대 언어에서 더 명백히 드러난다.

히브리어에서 아담이라는 단어는“인간, 인류”,“ 인간의 복수

형태”뿐만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아담”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 비유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우리 모두”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참으로 우리는 아담과

이브처럼 이 지상에 내려와 위험과 필멸의 생의 변천을 겪는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 ”(고린도전서 15:22)

 

내려가다. 초기 기독교인 작가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에서

아담이 동산에서 이 세상으로, 즉 영광에서 세속으로, 불멸에서

필멸로 내려가는 것으로 보았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이 여행에서 만나게 될

위험을 알면서도 자의적으로 내려왔음을

의미한다. 아무도 그를 강제로 여리고로

내려가도록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시대에 도로는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으며 그와 같은 여행길에는 어떠한

위험이 따르는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는

그 여행이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이

평범한 장소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내려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거룩한 성전 도시의 신성함 때문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내려왔다는 개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여리고로. 여리고는 이 세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해발

250미터 아래에 위치한 여리고는 지상에서 가장 낮은 도시이다.

온화한 겨울 날씨의 이 도시는 향락적인 휴양지였으며 헤롯은

이곳에 화려한 휴양 궁전을 짓기도 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것은

비유에 나오는 여행자가 강도를 만났을 때 그는 아직 여리고에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사람은 여리고로 내려가는 가파른

길에 있었고 아직은 아래까지 내려가지 않았다.

 

만나매(fell). 이것은 타락한 필멸의 상태와 죄의 궁지에 놓인

상태를 암시하고 있음을 쉽게 알수있다.“ 참으로모두가

타락하여 잃은 바 되었으니.”(앨마서 34:9)

 

강도. 초기 기독교인 작가들은 도둑(또는 강도)들을 악마와 그의

세력, 악한 영 또는 거짓 교사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누가가

사용한“강도”라는 말의 그리스어는 평범한 강도가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이 여행자는 계획적인 공모에 따라 행동하는, 교활하고

조직적인 집단의 전문적인 도둑들로부터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그 옷을 벗기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여기서 무엇인가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오리겐과 아우구스틴은

여행자가 옷을 잃은 것에 대해 인간의 불멸과 불후성의 상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크리소스톰은“불멸의 로브(robe)”또는

“순종의 로브(robe)”의 상실에 대해 말했다. 암브로스는 그

여행자를“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은혜의

옷을 벗기는”것으로 말했다.

여행자가 소지하고 있었을 수도 있는 재물이나 물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격자들은 여행자의 옷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도들은

여행자의 옷, 즉 거룩한 곳에서 가져왔으며 그들이 부러워하고 빼앗고자 했던 이 옷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려. 이 말은 여러 가지 죄와 악으로 말미암은 생의 고통, 영혼의 아픔과 역경의

비유로 보인다. 참으로 영혼의 적들은 상처를 남긴다. (야곱서 2:8~9 참조) 범법에는

실질적인 결과가 따른다.(앨마서 41:10 참조)

 

거의 죽은. 강도들은 바로 그렇게“거의

죽은”사람을 버리고 떠났다. 우리는

여기에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상징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쓰러져 죄 가운데 놓이게 되었으며 첫째 사망에 이르는 필멸의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둘째 사망,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는

아직 피할 수 있었다. (앨마서 12:32~36참조)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마침 유대 제사장이 도착한 것은 의도적인

수색의 결과가 아닌“우연히”일어난 일이었다. 그가 그곳에

있었던 것은 그 누구의 계획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한 제사장이 …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초대 기독교

해설자들은 모두 제사장이 모세의 율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문제는 구약 시대의 신권을 가진

사람들이 넘어진 사람을 도와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이 그를 구원할 권능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모세의 율법은 완전한 효력이 없었으며, 단지 장차 있게 될 속죄의

예표이며 그림자일 뿐이었다.(모사이야서 3:15~17참조)

레위인은 구약의 선지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성취하려 오셨다.(마태복음 5:17;제3니파이 15:2~5)

낮은 계급의 제사장이었던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적어도 이 레위인은 거의 도움을

주려는 단계까지 갔다. 그는“그 곳에 이르러”보았던 것이다.

그는 돕고자 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자신의 신분이 너무

낮아서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또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권능이 없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인. 초기 기독교인 작가들은 예외 없이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보았다. 크리소스톰은 사마리아인이 그리스도를 적절히 묘사한다고 했다. 이는“사마리아인이 유대에서 온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청중들은 여기에서 구주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음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그분을 배척했다.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요한복음 8:48) 나사렛은

사마리아 북부 골짜기 건너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 두 장소는 쉽게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 받았던 것과 같이

메시야는“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 [사람들은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이사야 53:3).

 

여행하는 중.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마리아인은 목적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문에는

그가 우연히 도착했다고 나와 있지 않다. 오리겐은“그는 죽어

가는 사람을 구하고 돌보기 위해 내려갔다.”고 말했다. 구주는

“세상에 구속을 가져다주”기 (제3니파이 9:21) 위해 오셨다.

 

불쌍히 여겨(compassion). 이 중요한 말은 그리스도의 순수한

사랑에 대해 말해 준다. 이 그리스어 단어는 사마리아인이

내면에서 깊은 동정심을 느꼈음을 보여 준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신약에서 저자가 자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감정을

묘사하고자 할 때 사용된다. 이것은 악한 종의 비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비유에서 주님(하나님을 나타냄)은

“불쌍히”(마태복음 18:27) 여겼으며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버지(하나님을 상징함)가 돌아오고 있는 그의 아들을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누가복음 15:20)었다.

이와 같이 사마리아인은“육체를 따라, 그의 심정을 자비로

충만하게 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앨마서7:12)기 위해 고통 받으신, 동정심

많으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상처에 … 싸매고. 초기 기독교인 중 일부는

붕대가 사랑, 신앙, 희망 그리고“구원의 영원한

결속력”을 상징한다고 했다. 다른 이들은 끈을

우리를 의로움으로 묶어 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보았다. 후기 성도들은 구조된 사람이

성약을 통해 주님께 매어졌다고 덧붙일

것이다.(교리와 성약 35:24; 43:9 참조)

 

기름. 올리브유로 만든 약은 매우 큰 진정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

작가들은 기름을 그리스도의 위안의 말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본 반면, 크리소스톰은 몇 가지

신권 의식, 병고침(야고보서 5:14 참조), 성신의

은사(종종 올리브유로 상징됨) 또는 왕과 왕후의

기름 부음과 연관된“거룩한 기름 부음”으로

보았다.

 

포도주. 사마리아인은 또한 상처를 닦아 내기

위해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다. 후기 기독교인

작가는 이 포도주를 깨끗하게 하는 것뿐 아니라

쏘는 어떤 것,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으나,

초기 기독교인의 해석은 성찬(마태복음 26:27~29, 제3니파이 18:8~11)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피와 연관지었다. 포도주, 즉 속죄의

피는 죄를 씻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거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진정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은 물리적인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구원의 복음 원리와 의식도 베푼다.

속죄의 포도주는 처음에는 쏘는 듯 아프지만 곧 치유의 평안을 가져다준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자기 짐승에 태워. 예언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약점을 짊어지신다.(이사야

53:4; 앨마서7:11 참조) 사마리아인의 짐승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그의

짐승에 태워지는 것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주막. 초기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단연 교회를

상징하는 요소였다. “주막”은“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공의 집”이었다. 공공의 피난처는 여러

면에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비유할 수 있다. 길가에

있는 주막은 하늘의 목적지는 아니지만,

여행자들이 그들의 영원한 집에 도착하도록 돕는 필수적인 것이다.

 

돌보아 주니라. 사마리아인은 첫날 밤에

부상당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를 몸소 돌보아

주었다. 그는 부상당한 사람을 주막 주인에게

성급히 넘겨 주지 않았으며 어두운 밤 동안 그와

함께 머물렀다. 오리겐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부상당한 자를“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돌보아 주시며 부상당한 사람에게 그분의 모든 정성을 기울이신다.”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이튿날. 여기서 초기의 해설자들은 예수께서

부활의 아침에 일어나실 것이라는 개념을 알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제자들에게 친히 성역을 베풀었다. 그분은

승천하신 후 교회로부터 보살핌을 받도록 여행자를 두고 떠나셨다.

 

주막 주인. 따라서 초기 해설자들은 주막 주인을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과 그들의 후계자로 보았다.

그러나 주막이 일반적으로 교회를 나타낸다면,

주막 주인과 그의 종업원들은 치료를 원하는

구조된 영혼을 양육하고 돌보도록 주님께서 맡긴

모든 교회 지도자와 일꾼들을 상징한다.

 

내가 돌아올 때.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암시로서 공공연히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약속한다. “돌아오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신약전서 누가복음 19장 15절에서

종들이 받은 돈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돌아오실 주님의 비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구절에 또 한번 나온다. 이 두 가지

비유의 연관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암시를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갚다 또는 보상하다. 마지막으로, 주막 주인은 그가 들인 비용 모두를 갚아

주겠다는 약속을 받는다. “들인 비용이 얼마이든

모두 갚으리라.”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이 부분을

단순히 일상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현대의

해설자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요소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실상 주막 주인에게 백지 수표를 준 것이나

다름없는 약속이었을 것이다. 제정신이라면 그 누가

처음 보는 주막 주인에게 이러한 무제한의 약속을

하겠는가? 그러나 이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이해한다면 이 약속은 일리가 있다.

사마리아인(그리스도)과 그 주막 주인은 이 약속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으며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원칙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신성한 충만함을

이해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상징과 비유를 통해 말씀하신다. (모세서 5:7 참조)

상징은 우리의 제한된 이해력을 그리스도의 비할

수 없는 복음의 신비에 깊이 새겨진 성스러운

진리로 인도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한

상징적인 이해는 좋은 이웃이 되는 것에 대한

도덕적인 교훈에 영원한 관점을 더해 준다.

예수께서는 그분의 비유를 통해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의 본질을 가르치셨다.

이 계획의 모형과 그림자로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어디에서

내려왔고, 어떻게 필멸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분께서 재림하실 때 보상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살고 봉사할 때 구원의 복음 의식과 약속된

구속주의 치유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교회의 가르침이 현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구해 줄 것인가 하는 영원한 관계

속에서 이 필멸의 지상에서 베푸는 이웃에 대한 친절한 행위를 생각하게 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비유를 이해한다면 독자들은 이 이야기 속의 모든 등장 인물과

실제적으로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차원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물리적인

구조자와 시온 산의 구원자로서 행하며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중요한 대의를 품고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10:37)고 말씀하셨다.

사마리아인처럼 행함으로써 우리는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주는

일을 도우며 그분과 함께할 수 있다.

제자들 또한 부상당한 여행자들의 장기적인 영적 회복을 돕도록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위임 받은 주막 주인으로서 자신을 생각하고

싶어할 것이다.

또는 독자들은 자신을 여행자로 여길 수 있다. 비유의 첫

부분에서, 모든 사람은 외롭고 지친 여행자를 동정하고 그와

공감한다. 우리는 모두 구원받아야 한다. 이야기가 끝날 때 모든

여행자들은 이 해석에 따라“강도 만난 자의 이웃”(누가복음

10:36)은 자비로운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안전함을 느낄 수 있다. 그분은 가장 모범적인‘이웃’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율법사의 두 번째 질문, 곧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 동시에 이것은 첫 번째 질문“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영생은“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누가복음

10:27)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아들(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 구주가 행한 대로 가서 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웃을 섬길 때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사이야서 2:17 참조)

(존 더블류 웰치브리검 영 대학교 제이 루벤 클라크

법과 대학원 교수 겸 BYU Studies 편집장 20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