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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예수 ·속죄

필멸의 여정과 속죄

by 높은산 언덕위 2015. 12. 23.

이비드 오 맥케이(1873~1970) 회장님은 구주의 복음이 가지는 위대한 목적을 간결하게 설명하셨습니다. '복음의 목표는 나쁜 사람을 좋게, 좋은 사람은 더 좋게 만들며, 인간의 품성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렇듯 필멸의 여정은 나쁨에서 좋음을 거쳐 더 좋음으로 진보하는 것이며, 커다란 심성의 변화를 겪음으로써 타락한 우리의 성품을 바꾸는 것입니다.(모사이야서 5:2 참조)

우리가 나쁨에서 좋음을 지나 더 좋음으로 가는 길을 여행하며 우리 마음을 바꾸고자 애쓸 때 몰몬경은 우리의 지침서가 되어 줍니다. 베냐민 왕은 필멸의 여정에 대해서, 그리고 그 여행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속죄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이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며,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라, 아담의 타락 때로부터 그러하였고 영원무궁토록 그러할 것임이니라.'(모사이야서 3:19)

 

저는 구체적으로 두 부분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 버리고'라는 부분입니다. 나쁨에서 좋음으로 가는 여정은 우리 각자가 지닌 육에 속한 남자나 육에 속한 여자를 벗어 버리는 과정입니다. 필멸의 삶에서 우리 모두는 육신의 유혹을 받습니다. 우리 몸을 만든 구성 요소 자체가 타락한 육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는 죄와 타락,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속죄를 통해' 육적인 욕망과 유혹을 극복하는 능력을 증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범법하고 죄를 저질러 실수를 범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속죄라는 구속의 권능을 통해 회개하고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성도가 되며'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좋은 사람을 더 좋게' 하는, 다시 말해 성도가 되어 가는 지속적인 인생 여정의 두 번째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좋음에서 더 좋음으로 가는 이 과정, 즉 우리 인생 여정 제2부는 우리가 충분히 가르치거나 연구하지도 않고 있으며,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많은 교회 회원들이 속죄가 지니는, 강화하고 가능하게 하는 권능보다는 구속하며 정결하게 하는 권능에 훨씬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아는 것은 중요하며, 그것은 그리스도 교리의 기본 토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위해, 속죄와 성신의 권능으로 우리 안에 살고자 하신다는 점 또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살면서 잘못을 저지르면 그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구주께서 구속의 권능으로 그 죗값을 치르심으로써 우리는 깨끗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속죄가 죄인들을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순종적이고, 합당하며, 양심적인 선한 남자와 여자 즉, 더 나아지며 더욱 충실하게 봉사하고자 애쓰는 성도들을 위해서도 속죄가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능력과 훈련, 의지와 순수한 용기라는 스스로의 힘만으로, 좋음에서 더 좋음으로 가는 여정을 헤쳐 나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구주의 복음은 단순히 우리 인생에서 악을 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거기에는 선하게 살며 선행을 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아울러 속죄는 우리가 악을 극복하고 피하며, 선하게 살고 선행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나쁨에서 좋음을 거쳐 더 좋음으로 발전하며 우리의 성품 자체를 바꾸는 필멸의 여정 내내 구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속죄의 구속 권능과 가능하게 하는 권능이 서로 별개이며 분리되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두 가지 속죄의 특질은 긴밀하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입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인생의 모든 순간마다 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아울러 이와 같은 필멸의 여정에서 필수인 두 가지 요소, 즉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 버리고 성도가 되는 것, 그리고 악을 극복하고 선하게 사는 것은 속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필멸의 여정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는 데에는 개인적 의지와 결심, 동기, 효과적인 계획과 목표 설정 모두 필요하지만, 그것들만으로는 절대적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 ?거룩하신 메시야의 공덕과 자비와 은혜?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니파이후서 2:8)

은혜와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권능

경전 안내서에 따르면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뜻을 내포하며, 우리는 이 단어가 경전에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는 신약, 특히 바울의 기록에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주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통해 주어지는 도움이나 힘을 얻는 신성한 방법입니다.

모든 사람이 무덤으로부터 일어나 영원히 사는 것, 즉 인류가 불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주 예수의 속죄 희생으로 가능해진 그분의 은혜 덕분입니다. 각 개인이 자기 힘만으로는 이루기 힘든 훌륭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신앙과 죄에 대한 회개를 통해 힘과 도움을 받아 해낼 수 있는 것 역시 주님의 은혜 덕택입니다. 이 은혜가 바로 가능하게 하는 권능입니다. 사람들은 최선의 노력을 한 이후에 그 권능을 통해 영생과 승영을 이룰 수 있습니다.?2

은혜는 우리 각자가 해의 왕국에 합당하게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늘 도움, 혹은 거룩한 도움입니다. 우리는 가능하게 하는 속죄의 권능으로

강화되어 선행을 하며 선하게 살 수 있으며, 자신의 소망이나 선천적 능력 이상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 경전 공부를 하는 동안 은혜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는 표현을 적어 넣곤 합니다. 가령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이 구절을 떠올려 봅시다.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앎이라.?(니파이후서 25:23) 우리가 경전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가능하게 하며 강화하는 힘?이라고 적어 넣는다면 이 속죄의 핵심적 특징에 대해 더 많이 깨우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례들과 그 의미

필멸의 여정은 나쁨에서 좋음을 거쳐 더 좋음으로 감으로써 우리의 품성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몰몬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제자와 선지자들은 그와 같은 여행 과정에서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을 제대로 이해했으며, 그 권능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신성한 능력을 더 잘 깨닫게 될 때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더욱 넓어지고 풍부해질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관점을 가지게 될 때 우리 자신은 확연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니파이는 구주의 가능하게 하는 힘을 제대로 알고 그에 의지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리하이의 아들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이스마엘과 그의 권속이 여행에 합류하도록 권유했던 사실을 떠올려 봅시다. 니파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다시 광야로 여행을 했던 일행 중 일부와 레이맨은 모반을 했으며, 니파이는 형제들에게 주님에 대한 신앙을 강력하게 권했습니다. 그때, 함께 여행 중이던 형제들은 끈으로 니파이를 묶고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니파이의 기도에 주목해 보십시오. ?주여 주를 믿는 나의 신앙을 좇아 나를 내 형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진정 내게 힘을 내리사 나로 하여금 나를 묶은 이 결박을 끊게 하시옵소서.?(니파이전서 7:17; 사체 추가)

만약 제가 형제들에게 묶였다면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지금 ?당장?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을 겁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니파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간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니파이가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을 이미 알고 이해했으며, 체험을 해 보았기에 그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니파이를 동여맸던 끈이 그의 두 손과 손목에서 저절로 마법처럼 풀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이 타고난 능력 이상의 끈기와 개인적 힘으로 축복을 받아 "주의 힘을 입고"(모사이야서 9:17) 애를 써서 끈을 당기고 비틀었을 때 마침내 말 그대로, 끈이 끊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화가 우리 각자에게 주는 의미는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바뀌도록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수동적인 객체보다는 행동을 하는 주체가 될 것입니다.(니파이후서 2:14 참조)

몰몬경에서 앨마와 그의 백성이 앰율론에게 핍박을 받았던 사례를 살펴봅시다. 주님의 음성이 역경에 처한 이 선한 백성에게 임하여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 어깨에 놓인 짐을 가볍게 하리니, …… 참으로 너희가 너희 등에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

이에 이제 이렇게 되었나니 앨마와 그의 형제들 위에 지워진 짐이 가벼워졌고, 참으로 주께서 그들을 강하게 하사 그들로 쉽게 그들의 짐을 지게 하시매, 그들이 주의 모든 뜻에 즐거이 인내를 가지고 복종하였더라."(모사이야서 24:14~15; 사체 추가)

이 일화에서 바뀐 것은 무엇입니까? 바뀐 것은 짐이 아니었습니다. 백성들이 받던 박해의 고난과 어려움은 금세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앨마와 그의 백성들은 강해졌습니다. 그들의 능력과 힘이 커져서 지고 있던 짐이 가벼워졌습니다. 이 선한 백성은 속죄로 힘을 받아 주체로서 행동을 하고 자신의 환경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힘을 입어" 앨마와 그의 백성은 안전한 제이라헤믈라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여러분은 필경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 앨마와 그의 백성 이야기가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의 사례가 될 수 있을까요?" 그 답변은 모사이야서 3장 19절과 모사이야서 24장

주님의 음성이 역경에 처한 앨마와 그 백성에게 임하여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또한 너희 어깨에 놓인 짐을 가볍게 하리니 …… 참으로 너희가 너희 등에 그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15절을 비교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을 벗어 버리고 주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성도가 되며,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유순, 온유, 겸손, 인내하며, 사랑이 충만하게 되어, 주께서 합당하게 여겨 그에게 내리시는 모든 것에 기꺼이 복종하고자 하기를, 아이가 참으로 그 아버지에게 복종함같이 하[며]?(모사이야서 3:19; 사체 추가)

우리는 나쁨에서 좋음을 지나 더 좋음으로 움직임으로써 필멸의 여정에서 진보하며, 우리 각자 안에 있는 육에 속한 남자나 육에 속한 여자를 벗어 버리고, 성도가 되고자 애를 쓰며

품성 자체를 바꾸고자 노력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력을 할 때 이 구절에서 말하는 속성들은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을 더욱 잘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고, 유순하고, 인내하며 더욱 기꺼이 복종하고자 할 것입니다.

이제 모사이야서 3장 19절에서 말하는 자질들을 앨마와 그의 백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품성과 비교해 봅시다. ?그들이 주의 모든 뜻에 즐거이 인내를 가지고 복종하였더라?(모사이야서 24:15; 사체 추가).

저는 그 두 구절에서 묘사하는 속성들이 서로 현저히 유사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또한 앨마의 선한 백성이 구주이신 그리스도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더 나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앨마서 14장에 담긴 앨마와 앰율레크 이야기를 떠올려 봅시다. 이 사건에서 많은 충실한 성도들이 불에 던저져 죽임을 당하며, 앨마와 앰율레크는 옥에 갇혀 매를 맞습니다. 앨마가 감옥 안에서 기도를 드릴 때 올렸던 이 간구를 살펴봅시다. ?주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앙을 좇아 우리에게 힘을 주사, 구원을 얻게 하시옵소서.?(앨마서 14:26; 사체 추가)

우리는 여기서 다시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에 대한 앨마의 믿음과 이해가 그의 간구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구의 결과에 주목합시다.

?저들[앨마와 앰율레크]을 결박한 줄을 끊으매, 무리가 이를 보고 도망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멸망의 두려움이 그들에게 임하였음이라. ……

또 앨마와 앰율레크는 옥에서 나왔으나,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들의 신앙을 좇아 저들에게 능력을 주셨음이라.?(앨마서 14:26,28; 사체 추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선한 백성이 악에 대항하여 싸우며, 더욱 나아지고자 애를 쓰고, ?주님의 힘을 입어?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고자 할 때, 가능하게 하는 힘이 분명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몰몬경에 나오는 또 다른 사례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앨마서 31장에서 앨마는 배도한 조램인들을 되돌리려고 선교 사업을 떠납니다. 그들은 ?래미움프톰?이라는 단을 세웠으며, 교만으로 가득 찬, 미리 정해진 기도를 올렸습니다.

힘을 간구하는 앨마의 개인 기도를 주목해 봅시다. ?주여, 나로 힘을 갖게 하사, 이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내게 임할 이 고난들을 인내로써 받을 수 있게 하여 주시겠나이까.?( 앨마서 31:31; 사체 추가)

앨마는 함께 선교 사업을 나간 동반자들에게도 비슷한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저희로 힘을 갖게 하사, 이 백성의 죄악으로 인하여 저희에게 임할 고난을 그들이 감당할 수 있게 하여 주시겠나이까.?(앨마서 31:33; 사체 추가)

앨마는 고난을 없애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가 주님의 일꾼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상황을 바꾸고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 예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앨마서 31장 마지막 절에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들에게 힘을 주사, 그들이 겪는 여하한 고난도 다 그리스도의 기쁨 안에 삼키우게 하셨더라. 이제 이는 앨마의 기도대로였나니, 이는 그가 신앙으로 기도한 연고였더라.?(38절; 사체 추가)

고난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앨마와 그 동반자들은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축복을 받고 강화되어 ?그들이 겪는 여하한 고난도 다 그리스도의 기쁨 안에 삼키우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 모두에게 주는 이 교훈이 그 얼마나 놀랍습니까!

가능하게 하는 힘의 사례가 경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더블유 존스는 1830년 미국 미주리 주에서 태어나 1851년에 캘리포니아에서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1856년에 그는 와이오밍의 심한 눈보라로 고립된 손수레 부대를 구조하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구조단은 재난에 처한 성도들을 찾아내 가능한 응급 처치를 했으며, 병약자들이 솔트레이크시티로 호송되도록 조치했습니다. 곧이어 다니엘과 몇몇 청년들은 자발적으로 뒤에 함께 남아 손수레 부대 소유물을 지켰습니다. 다니엘과

동료들에게 남아 있는 식량과 물자는 넉넉지 않았고, 급속히 고갈되었습니다. 다니엘 존스는 개인 일지에 그 후 일어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냥감은 금세 고갈되어 더 이상 잡을 게 없었다. 우리는 한결같이 형편 없는 고기를 먹었다. 그런 것을 먹어 봐야 배만 고플 뿐이었다. 마침내 모든 음식이 떨어졌으며, 이제 동물 가죽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조리해 보았다. 많은 양을 일체의 양념도 없이 조리하여 먹었고, 결국 모두가 배탈이 났다.……

상황은 암담했다. 주린 소에서 벗겨낸 빈약한 가죽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인도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형제들은 불평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의지했다. …… 마침내 나는 그 조리법에 대해 영감을 받아 부대원에게 알려 주었다. 즉, 털을 불로 그슬리고 나서 문질러 벗겨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가죽을 삶으면서 생긴 나쁜 맛을 없애거나 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게 털을 긁어내고서 한 시간쯤 충분한 양의 물에 넣어 끓인다. 가죽의 모든 아교질이 빠지면 그 물을 쏟아 버린다. 곧이어 가죽을 찬물에 깨끗이 씻고 문지른다. 그 다음 젤리 상태가 되도록 끓이고 나서 식힌다. 곧이어 약간의 설탕을 뿌리고서 식사를 한다. 이것은 무척 고된 일이었지만 그 밖에 다른 대안은 없었으며, 굶주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우리는 우리 위장을 축복해 주시고 우리 배가 이 음식에 적응하도록 주님께 간구했다. …… 이제 모두 이 정찬을 즐기는 것 같았다. 이 두 번째 시도가 있기 전 사흘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약 6주간 이 호사스러운 정식을 즐길 수 있었다.?3

저라면 그런 상황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무언가 다른 먹거리를 간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들소, 아니면 메추라기라도 보내 주세요.? 제 위장이 튼튼해지고, 우리가 취하는 음식에 적응하도록 기도할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더블유 존스가 알고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 그리스도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바뀌도록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강화되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바로 앨마와 그의 백성이, 앰율레크와 니파이가 강화된 것처럼 영적 통찰력이 있었던 다니엘 더블유 존스는 기도에서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으로 강화되어 스스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전자렌지와 휴대 전화, 에어컨 기능이 있는 승용차와 안락한 집이 있는 이 세상, 이 편리한 후기에 우리는 우리가 날마다 속죄의 가능하게 하는 힘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베드나 자매는 놀랄 만큼 신앙심이 깊고 유능한 여성입니다. 저는 그녀의 말없이 행하는 모범을 통해 강화하는 권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깨우쳤습니다. 저는 그녀가 지속적이고도 심한 입덧을 참으면서 견뎌 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말 그대로 3번의 임신 기간 모두, 각각 여덟 달 동안 날마다 입덧을 앓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기도하며 입덧이 나아지기를 기도했지만, 결코 우리 바람대로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녀는 강하게 되어, 스스로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실질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후기 성도 여성이 선지자 권고에 따라 자녀 양육과 가족에 최고 우선 순위를 둘 때 겪어야 하는, 일반 세상에서 던지는 비웃음과 조롱을 감당할 수 있도록 강화되는 그녀의 모습을 또한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그와 같이 값진 교훈을 깨우치도록 도와준 베드나 자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구주는 알고 계시며 이해하십니다

앨마서 7장에서 우리는 구주께서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 힘을 주실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그가 나아가사, 온갖 고통과 고난과 시험을 당하시리니,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의 고통과 질병을 짊어지리라는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또 그가 사망을 짊어지시리니, 이는 그의 백성을 결박하는 사망의 줄을 푸시려 함이요, 또 그들의 연약함을 짊어지시리니, 육체를 따라, 그의 심정을 자비로 충만하게 하사, 육체를 따라, 자기 백성을 그들의 연약함을 좇아 어떻게 도울지 아시고자 하심이니라.?(앨마서 7:11~12; 사체 추가)

구주께서는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우리를 늘 괴롭히는 정서적 환난과 고통, 불평등과 불공평을 대신 짊어지시고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필멸의 여정에서 겪게 되는 온갖 육체적 아픔이나 영혼의 곤고, 영적 번민이나 나약함을 구주께서 먼저 경험하셨습니다. 여러분이나 제가 약해졌을 때 이렇게 절규할 수 있습니다. ?그 누가 이해하랴, 어느 누가 알아줄까?? 어쩌면 그 어떤 사람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완벽하게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 앞서 우리 짐을 지시고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그분은 최후의 값을 치르고 짐을 지셨기 때문에 우리와 완벽하게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여러번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손길을 뻗어 어루만지거나 구원하며 말 그대로 우리에게 달려와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도록 해 주십니다. 아울러 그분은 우리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할 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헤쳐 나가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태복음 11:28~30)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 무궁한 희생에 대해 감사드리고, 그에 대해 간증을 전합니다. 저는 구주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구속 권능과 그분의 가능하게 하는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아울러 그러한 권능은 실존하며 우리 각자가 그 힘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간증합니다. 진실로 이 필멸의 여정을 헤쳐 나가는 동안 우리는 ?주님의 힘을 입어? 모든 것을 극복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2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