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lder Russell M. Nelson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Russell M. Nelson, “President Dieter F. Uchtdorf: A Family Man, a Man of Faith, a Man Foreordained,” Liahona, Jul 200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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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가족이 동독의 집을 떠나 자유를 찾아 서독으로 피난하면서, 열한 살인 디이터 우흐트도르프의 마음에 지녔을 두려움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적인 이유로, 디이터의 아버지는 목숨이 매우 위태로웠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홀로 도망가야 했습니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나머지 가족들은 함께 여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따로따로 탈출을 시도해야만 했습니다.
계획이 실행되었습니다. 디이터의 두 형들인 볼프강과 칼-하인츠는 그들의 고향인 츠비카우의 북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의 여동생인 크리스텔은 다른 두 소녀들과 함께 잠시 서독을 경유해 다시 동독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서독을 통과할 때, 소녀들은 차장을 설득해 문을 열고 기차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11세로 막내였던 디이터와 그의 용감한 어머니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음식과 제2차 세계 대전의 파괴 속에서도 지켜온 소중한 가족 사진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디이터와 어머니는 장시간을 걸었고 어머니의 무릎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디이터는 모든 짐과 소지품을 자신의 손에 들고 어머니가 자유를 향한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멈춰 간단히 식사한 뒤, 러시아 경비들을 보았을 때, 자신들이 아직도 국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식사를 끝내고 짐들을 꾸려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전보다 더 높은 언덕 길을 올라 갔습니다.
피난민인 디이터와 어머니는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그들의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 근교로 계속 여행을 했습니다. 뿔뿔이 흩어져서 여러 날 동안 많은 위험을 겪은 후에야, 마침내 가족이 다시 만났습니다. 형들이 먼저 도착했고, 아버지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 후 디이터와 어머니가 도착했으며, 마지막으로 그의 누나가 왔습니다. 그들은 이 특별한 재회로 기쁨에 넘쳤습니다.
사실상 그들이 전 재산을 남겨 두고 떠나왔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7년 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외세가 몰려오자 그들은 집을 떠나 피난했습니다. 이제 다시 피난자가 된 그들은 또 다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서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5년 전에 침례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회원이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생활했던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단칸방 아파트는 비좁았고 쥐들이 들끓었습니다. 어린 디이터에게는 돌아다니는 쥐들이 흥미로웠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대중 교통은 상대적으로 저렴했지만 매주 가족 모두가 교회로 갈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대로 교회에 나갔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이 성스러운 가족 제도에 대해 그토록 열의를 품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진심을 다해 그는 가족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을 간증합니다. 가족은 그에게 최고로 중요합니다. 강인한 신앙의 씨앗을 심고 가꾼 곳은 바로 그의 가족 안에서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교회의 신권 지도자로서 예임된 임무를 성취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가정적인 사람
디이터 프레드리히 우흐트도르프는 1940년 11월 6일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마흐리쉬오스트라우에서 훌륭한 부모, 칼 알베르트와 힐데가르트 엘세 오펠트 우흐트르도르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1944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독일의 츠비카우로 이주했습니다. 1949년부터 1990년까지 츠비카우는 동독에 속한 탄광업의 중심지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곳은 연합군 폭격기의 주요 표적이 되었습니다. 4살이었던 디이터는 겁이 났지만 한편으로 머리 위로 나는 비행기의 빛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안전을 위해 공습 방공호로 자신을 데려간 것을 기억합니다. 남편이 독일군에 징병되자 우흐트도르프 자매는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훌륭하게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디이터의 아버지는 츠비카우의 석탄 광산과 우라늄 광산에서 일했는데, 악성 질병에 걸리기 쉬운 그러한 환경때문에 그는 62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아버지를 친절하고 사랑이 많으며, 강인하고 온유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집사, 교사, 제사 그리고 장로로서의 신권 책임을 사랑했습니다.
1991년에 돌아가신 어머니, 힐데가르트는 용감했을 뿐만 아니라 진실한 개종자였고, 교회의 많은 부름에서 봉사한 헌신적인 성도였습니다.
이 부모와 그들의 자녀들은 1956년에 스위스 성전에서 인봉되었습니다. 그 후, 형들인 볼프강과 칼-하인츠는 사망했습니다. 독일에서 선교사로 봉사한 그의 누나, 크리스텔 우흐트도르프 아쉬는 현재 미국 남부의 텍사스에 살고 있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미래의 아내, 해리어트 라이히 자매를 교회의 상호 향상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해리어트는 13살 무렵에 선교사들이 집 문을 두드려서 복음을 배우게 되었으며,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해리어트의 아버지는 침례를 받기 8개월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어머니와 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라이히 가족을 가르치고 침례 준 선교사들 중 한 명이었던 게리 젠킨스 장로에게 놀라운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2008년 2월 16일, 젠킨스 장로의 손녀 크리스탈이 솔트레이크 성전에서 제일회장단의 일원인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에 의해 남편 스티븐에게 인봉되었으니, 그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해리어트와 디이터는 1962년 12월 14일에 스위스 베른 성전에서 인봉되었습니다. 그는 해리어트를 자신의 인생의 햇빛이라고 부릅니다. 그녀의 지지는 그에게 끊임없는 힘의 원천입니다. 그녀는 그의 인생에서 단 하나의 사랑입니다. 해리어트는 남편을 마음이 넓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이는 친절합니다. 선하고 인정이 많은 지도자이지요. 우리는 교회의 친구들뿐만 아니라 그이의 많은 전직 동료들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이는 언제나 저를 도울 방법을 찾는 훌륭한 남편입니다. 그이는 유머와 재치가 풍부한 사람이랍니다. 그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흐트도르프 부부에게는 두 자녀가 있습니다. 그들의 딸, 안트예는 데이비드 에이 에번즈와 결혼했습니다. 안트예와 데이비드는 19살의 쌍둥이 형제인 다니엘과 패트릭, 그리고 8살 난 에릭, 이렇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독일의 다름스타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흐트도르프 부부의 아들, 구이도는 워싱턴 디시 남 선교부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캐롤린 왈드너와 결혼하여 현재 스위스 취리히 근교에서 살고 있으며, 스위스 성 갈렌 스테이크, 베치콘 와드의 감독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7살의 자스민, 5살의 로빈, 그리고 1살 된 니클라스 이반, 이렇게 세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그의 새 부름에 관해 물었을 때, 딸 안트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훌륭하신 부모님을 축복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는 항상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주셨기 때문에 저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바쁜지 잘 몰랐습니다. 우리가 최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아버지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리고 제 자녀들은 할아버지께 어떤 질문을 해도 그분은 답을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제일회장단에 속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할 더 큰 책임을 느낍니다.”
구이도의 추억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는 몇 년 전 가족 모두가 스키 강습을 받았던 때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스키를 타는 것은 즐거운 가족 전통의 시작이었습니다. 구이도는 아버지의 직업이 항공기 조종사였기에 장기간 가정을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오시면 우리는 함께 놀고 이야기하고 웃었습니다.”구이도는“그것은 값진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구이도와 안트예는 부모로부터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여가 활동이 교육적이건 오락적이건 간에 그것은 가족 유대를 강화시켜 줍니다. 현대의 과학 기술 덕분에 우흐트도르프 가족은 이제 먼 거리에서도 부모와 조부모 역할을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메일과 전화 통화 외에 인터넷을 통한 영상물과 사진 전송이 더해졌습니다.
그러나 함께 하는 시간은 소중합니다. 구이도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시간은 2008년 4월 연차 대회에 참석해 아버지가 컨퍼런스 센터 연단에 서 있을 때 그곳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가족과의 상담에서 우흐트드로프 회장은 언제나 기본적인 원리들을 강조했습니다. 구이도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버지는 기도, 경전 연구, 계명에 대한 순종, 그리고 긍정적인 태도를 통해 오는 축복들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아버지께 이것들은 콜롭이 어디에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과 자매의 40번째 결혼 기념일에, 그들은 스위스 베른 성전에 모여 자녀들과 그들의 배우자들과, 장성한 손자손녀들과 함께 성스러운 의식을 행했습니다. 그 성전은 해리어트와 디이터에게 소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모와 그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이 모두 그곳에서 인봉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
그의 특별하고 확고한 신앙심을 알지 못하고는 누구도 이 위대한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앙,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교회에 대한 신앙, 그리고 필요할 때 하늘의 도움이 올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이터의 부모님은 그들의 자유와 신앙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위임된 신권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특별히 동독에서의 위험한 탈출 중에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어머니가 명석한 분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머니가 수학을 암산으로 할 수 있었고 자신에게도 똑같이 하도록 가르쳤다고 설명합니다. 비록 그의 가족은 전쟁 난민으로 두 번이나 무일푼이 되었지만, 그들은 십일조의 법에 따라 생활했습니다. 우흐트도르프 가족은 주님께서 충실하게 이 법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 문을 열고 복을 부으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2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서독 선교부 회장으로 봉사하셨던, 작고하신 테오도르 엠 버튼(1907~1989년) 장로님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훌륭한 독일 후기 성도들이 그들의 모국을 떠나던 시기에, 우흐트도르프 가족은 독일에 머물며 그곳에 교회를 세우라는 버튼 장로님의 권고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를 장로의 직분에 성임하고, 디이터의 마음에 정확히 새겨질 만큼 잊지 못할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버튼 장로님이었습니다. 해리어트 우흐트도르프 자매는 우흐트도르프 가족에게 주신, 유럽에 남아 그곳의 교회를 강화하라는 버튼 장로님의 권고의 중요성을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도 똑같은 권고를 따랐습니다. 현재, 자녀들은 아직 유럽에 남아 그 의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의 부모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고 자녀들은 장난삼아 이야기하곤 합니다.
물론, 우흐트도르프 회장에게 큰 영향을 준 지도자는 버튼 장로님만이 아닙니다. 디이터는 자신이 집사 정원회 회장으로 성별되었을 때의 지부 회장님을 기억합니다. 그 지부 회장님은 새로운 정원회 회장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철저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디이터는 집사 정원회에 자신과 다른 한 명의 회원만이 있다는 이유로 어린 지도자가 경시할 수도 있었을, 그 가르침의 중요성을 기억합니다.
이 가족의 신앙은 우흐트도르프 회장의 할머니의 신앙에 의해 구체화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할머니가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가족이 없는 한 연로한 독신 자매가 그녀를 성찬 모임에 초대했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 모임에 참석하여 영을 느꼈고, 회원들의 친절함에 고양되었으며, 회복의 찬송가에 감화되었습니다.3 1947년 디이터의 부모님은 츠비카우에서 침례 받았고 거의 2년이 지난 후, 8살이 된 디이터도 침례 받았습니다. 교회에 대한 가족의 헌신은 강해졌고 지속적이었습니다.
그의 신앙의 기초는 성취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강화시켰습니다. 그의 경력은 공학 교육으로 시작하였으며, 뒤이어 6년간 독일 공군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런 후, 독일과 미국 정부 간의 교환 프로그램 덕택에 그는 텍사스 주 빅스프링에 있는 조종사 양성 학교에 입학하여 미국과 독일 공군 양쪽에서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는 반에서 탁월한 학생 조종사가 되어 절실히 바라던 사령관 트로피를 받았습니다. 1970년에 29세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는 루프트한자 항공의 기장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루프트한자의 수석 조종사와 비행 운전 담당 수석 부사장이 되었습니다.
2004년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 받기 전에, 정말 우연의 일치로 우흐트도르프 장로와 저는 함께 루프트한자 비행기로 유럽을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비행기로 여행하는 승객들이 총관리 역원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것은 그다지 이례적인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때의 인사는 사뭇 달랐습니다. 사실상 모든 루프트한자 승무원들이 그들의 전직 수석 조종사에게 인사하기 위해 달려왔고 그와 악수하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그들이 그에 대해 느끼는 존경심을 저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승무원들은 자신들에 대한 그의 애정뿐만 아니라 그의 훌륭한 신앙도 알아차린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아들이면서 주님에 대한 우흐트도르프 회장의 신앙은 분명했습니다. 그는 1985년에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테이크의 회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후 지역 조정이 되면서 독일 만하임 스테이크의 회장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1994년, 그는 독일에서의 가정과 루프트한자의 직장을 유지한 채 칠십인 제이 정원회의 일원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1996년에는 칠십인 제일 정원회에서 봉사하는 전임 총관리 역원이 되었습니다. 3년 후, 우흐트도르프 장로와 자매는 그들이“해외에서의 임무”를 수행할 차례가 왔다고 여기며 유타로 이주했습니다.
2004년 우흐트도르프 장로가 거룩한 사도 직분에 부름 받았을 때, 몇몇 언론 기관에서는 그를“독일 사도”라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다른 어느 쪽도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을 대표하도록 부름 받았다고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정말로 그것은 그의 성스러운 부름입니다. 그는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간증합니다.4
데이비드 에이 베드나 장로님은 우흐트도르프 장로와 동시에 십이사도 정원회에 부름 받았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의 제일회장단 부름에 대해 베드나 장로님은“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의 옆에 앉아, 함께 봉사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것은 제 삶의 커다란 축복이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들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호의적인 태도는 제게 좀 더 부지런히 일하고 자신을 향상시키도록 영감을 줍니다. 저는 성스러운 책임을 맡으신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을 사랑하고 지지합니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임된 사람
또한 그가 지금의 중요한 책임을 위해 예임되었다는 것을 모르고서는 누구도 이 위대한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고대와 현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알려졌습니다. 앨마는 신권 지도자들이“부름 받은 것이라-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좇아 세상의 기초가 놓이던 때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비되었나니”5라고 가르쳤습니다.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님(1838~1918)은 (우흐트도르프 회장과 같은) 지도자들이“또한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다스리는 자가 되도록 태초에 택함을 받은 고귀하고 위대한 자들 가운데 있더라. 그들은 실로 태어나기 전에 다른 많은 자들과 함께 영의 세계에서 그들의 첫 교훈을 받았고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의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주께서 정하신 때에 나아오도록 예비 되었더라”6고 밝히셨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의 어머니께 막내 아들이 언젠가 교회의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있었는지 물어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어린 아들을 양육하고, 자유를 찾게 하고, 그의 목숨을 구하면서, 그 어머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녀와 그 자녀들이 공설 강당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녀는 그 건물을 즉시 떠나야 한다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 긴급한 느낌 때문에 그녀는 바퀴달린 손수레에 어린 디이터를 태우고 자녀들과 함께 가능한 한 빨리 그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그 건물은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습니다. 공설 강당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었지만, 우흐트도르프 자매와 자녀들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세대로서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폭격으로 파괴된 집들에서 놀았고 근처 숲속에 버려진 총, 탄약, 그리고 다른 무기들을 발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한 시기에 그는 항상 존재하는 전쟁의 결과와 자신의 조국이 다른 사람들에게 입힌 참담한 고통을 인식하며 살았습니다. 사실상, 그와 그의 가족들은 또한 압제적 독재정권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후에, 그가 비행기를 조종하던 중 조종 제어 장치가 고장났던 사건에서 살아남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때 수리 하지 않고 그 상태로 놓아 두면 비행기는 계속해서 좌우로 흔들리다가 추락할 것이 뻔했습니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 조종간을 풀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의 비행 교관이 되풀이해서 탈출을 명했습니다. 결국 대단히 유능한 조종사였던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는 반대를 극복하고 비상 착륙에 성공했습니다.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주님의 손길이 있었기에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7
체코슬로바키아 태생으로 그러한 위험천만한 삶에서 살아남은 개종자 가족의 자녀가 후에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하도록 부름 받을 수 있는 수학적 확률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이 특별한 사람을 아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직분에 예임되어 있었습니다.
현재 그는 그의 신성한 부름으로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 곁에 서 있습니다. 헨리 비 아이어링 회장님과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은 교회 회장님께 기꺼이 조언을 드릴 주님의 위대한 종들입니다. 이 세 분의 감리 대제사들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교회의 회원들은 그들의 영감 받은 지도력을 기꺼이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따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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