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Elder Robert D. Hales Of the Quorum of the Twelve Apostles
Robert D. Hales, “President Henry B. Eyring: Called of God,” Liahona, Jul 2008,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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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베니언 아이어링은 릭스 대학(현 브리검 영 대학교-아이다호)의 총장이 되고 몇 년이 지난 후, 캘리포니아 남부에 소재한 어느 회사로부터 고액 연봉의 명성 있는 자리를 제의 받았습니다.
헨리가 그 제의와 그것의 특전에 대해 설명하자 스펜서 더블류 킴볼 회장님은“굉장한 기회 같군요. 하지만 언제든 우리가 형제님을 필요로 할 때, 형제님이 어디에 계실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헨리는 그의 고모부인 킴볼 회장님이 자신에게 릭스 대학에 계속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하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헨리와 그의 아내 캐슬린이 그들의 결정에 대해 금식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고,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일주일이 되기도 전에 영은 헨리에게 그가 릭스 대학에“좀 더”머물 특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는 당시 교회 교육 기구 교육 총감이었던 제프리 알 홀런드 형제에게 전화를 걸어 그 제의를 거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 헨리는 킴볼 회장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킴볼 회장님은“형제님이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라고 헨리가 대답했습니다.
킴볼 회장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형제님은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헨리가 대답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라고 킴볼 회장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킴볼 회장님과의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헨리 비 아이어링을 아는 사람들은 영적인 속삭임에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포기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신앙과 겸손, 순종을 지닐 때 세상의 부보다 훨씬 값진 축복을 받기에 합당해진다는 것을 터득했습니다.
2008년 1월 27일 고든 비 힝클리 회장님이 별세하신 후,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은 아이어링 회장을 제일회장단 제1보좌로 부르셨습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그전에 4개월 동안, 제임스 이 파우스트 회장의 별세로 생긴 공석을 채워 제2보좌로서 봉사했었습니다.
“할”(가족과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은 1933년 5월 31일,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헨리 아이어링과 밀드레드 베니언 아이어링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둘째로, 영적인 학문과 세상적인 학업 모두를 중요시하는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저명한 화학자였습니다. 유타 대학교의 조교수로 여성 체육교육과를 이끌던 어머니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잠시 학교를 휴직하던 중, 미래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들들에게 주님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그들의 신뢰와 신앙을 물려주었습니다.
신앙의 유산
아이어링 회장의 가족이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은 조상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의 조상들은 영의 속삼임에 귀 기울이고 신권 지도자의 가르침을 따랐던 분들이었습니다. 1853년, 열여덟 살에 독일을 떠난 그의 증조 할아버지 헨리 아이어링은 이듬 해에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관한 계시를 받고 싶어 했던 그의 소망은 꿈속에서 응답되었습니다. 한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에라스터스 스노우 장로가 꿈에 나타나 그에게 침례를 받으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그는 또한 1860년에, 지금은 오클라호마 주와 아칸소 주라 불리는 지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던 중 이와 유사한 꿈에서 브리검 영 회장님을 보기도 했습니다.1
증조부인 아이어링은 선교 사업을 마치고 유타로 돌아가던 중, 스위스에서 이민 온 메리 보멜리를 만났고 그녀가 속한 개척자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메리의 가족은 그녀가 24세였을 때 교회에 가입했습니다. 그녀는 독일 베를린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투옥된 적도 있었습니다. 체포되던 날 밤, 그녀는 자신의 사건을 맡기로 되어 있던 판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녀는 “세상 사람”인 판사에게 부활과 영의 세계에 관해 말했으며, 회개하여 그 자신과 그의 가족을“큰 슬픔”에서 구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얼마 후 그 판사는 고소를 취하했고, 메리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2 헨리와 메리는 솔트레이크 계곡에 도착한 직후 결혼했습니다.
아이어링 회장의 조상들은 유럽에서부터 유타 남부와 애리조나의 사막을 거쳐 멕시코 북부의 식민지까지 광야를 일구고, 복음을 전파하고, 핍박을 피해 다녔으며, 학교를 세우고, 자녀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아내의 영향력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아이어링 가족은 가솔린 배급 제한 때문에 17마일(27킬로미터)을 운전해야 하는 뉴브런즈윅 지부의 일요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어링 가족은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 있는 자신들의 집에서 모임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할은 그곳에서 한번도 초등회에 빠진 적이 없다는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들의 집에서 초등회가 단 한 차례 열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종종 자신의 가족들과 가끔씩 오는 방문자들로 이루어진 이 작은 지부에서 열렸던 성찬식의 아름다운 영에 대해 회상하곤 합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유일한 참석자인 것이나 자신과 형제들이 지부 아론 신권의 전체 구성원이라는 점을 괘념치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들이 청소년 시기에 이르자 후기 성도들이 더 많은 지역에서 그녀의 가족이 살기를 바랐습니다.
1946년에 할의 아버지 헨리는 프린스턴에서의 성공과 업적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수의 명예 박사 학위와 화학분야에서 주어지는 대부분의 주요 상들을 받았습니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과학자들과 함께 공들여 이룬 과학적 업적 덕분에 그는 노벨상 후보에 거론되는 훌륭한 기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에 헨리는 유타 대학교 총장인 에이 레이 올핀으로부터 그곳에서 대학원 학장이 되어 화학 분야에서의 연구를 계속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 밀드레드는 헨리에게 결정을 맡기며 몇 년 전에 그들이 했던 약속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헨리는 아들들이 더 자라면 교회 본부 가까이로 이사가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헨리가 그 제의를 거절하자, 유타에서 성장한 밀드레드는 남편에게 그 결정에 대해 기도해 볼 것을 부탁했고 연구실에 도착해서 읽을 편지 한 통을 주었습니다.
헨리는 밀드레드의 실망 어린 편지를 읽고, 기도하고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런 후, 그는 올핀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의 자연과학학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프린스턴을 떠나는 그의 명백한 희생은 그와 그의 가족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축복 중 한 가지는 오랜 세월 후, 할이 이와 비슷한 결정을 내려야 했을 때 그가 아버지 헨리의 모범을 기꺼이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래를 준비함
형을 조언자요 친구라 일컫는 아이어링 회장의 동생 하든 아이어링은“형이 십대가 되었을 때 저는 형이 다른 십대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깨달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든은 형 할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몰몬경을 다섯 번이나 읽을 만큼 경전에 몰두했다고 말합니다.
할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영성을 해칠 만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거절했습니다. 그는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이스트 고등학교 대표선수로 농구를 하기 위해 시간을 냈지만, 첫 번째 우선 순위는 공부였습니다. 하든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십대 시절에 저는 모든 사람들이 가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형은 밤에 젊은 사람들이 어울리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곳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책을 읽거나 공부를 했습니다.”
유타 대학교 화학 교수인 아이어링 회장의 형 테드는 유타 대학교 4학년 때 할과 몇 가지 수업을 같이 들었습니다. 테드는 할이 그 수업을 듣는 어느 학생들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중한다면, 할은 목표하는 그 무엇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또한 그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영적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점에서 할은 아버지와 많이 닮았죠.”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할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헨리 아이어링은 아들들이 물리학을 공부하고 과학 분야의 직업을 준비하도록 격려했습니다. 할은 충실하게 유타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헨리는 자신에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도와 달라고 부탁한 할이 거기에 열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지하실에 보관하던 칠판 앞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갑자기 멈추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할, 우리는 일주일 전에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공부했었지. 너는 그때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지 않구나. 계속 공부하지 않았니?”
할은 공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물리학은 자신이 생각해 왔던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버지는 부드러운 어조로 아들에게 가장 흥미를 느끼는 전문 분야를 추구하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도록 해라. 그것을 찾게 되면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그 일만 생각하게 될 게다.”3
그렇지만 할은 미 공군에 입대하기 전인 1955년에 물리학 학위를 받았습니다. 때는 한국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그 당시 각 와드에서 전임 선교사로 부름 받는 젊은 형제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솔트레이크시티에 있는 선교사 훈련원이 문을 닫아서 임지로 나가는 선교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할의 감독은 축복을 주며 군 복무가 그의 선교 사업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할은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 근처의 샌디아 기지에 도착하고 2주일이 지난 후, 웨스턴 주 선교부의 지방부 선교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는 군에 있는 2년 동안 저녁과 주말마다 그 부름을 수행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할은 하버드 경영 대학원에 등록하여 1959년에 경영학 석사 학위를, 1963년에는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과학자로 성공할 수 있는 지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할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고양하고, 강화하는 일에 가장 흥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에 귀 기울임
1961년 여름, 하버드에 다니는 동안 할은 캘리포니아 주 팔로 알토의 제이 시릴과 라파렐 린지 존슨의 딸인 캐슬린 존슨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보스턴에서 여름 학기를 듣는 중이었습니다. 할은 첫 눈에 그녀에게 반했습니다. 할은 그녀와 있을 때면 그 즉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고, 이 느낌은 그들이 함께 해 온 여정 동안 늘 지속되었습니다.
그 여름 동안 그들은 데이트를 했고 캐슬린이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후에는 계속해서 전화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1962년 7월, 유타 로간 성전에서 스펜서 더블류 킴볼 장로의 집행으로 결혼했습니다. 같은 해에 할은 스탠포드 경영 대학원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9년 후 할은 스탠포드에서 종신 교수로서의 삶에 만족하며 스탠포드 제1와드의 감독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처갓집 근처에서 생활하는“안정된 삶”이었다고 회상합니다. 그러나 1971년 어느 날, 캐슬린은 그를 깨워 독특한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일생동안 당신이 해야 할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나요?”
그 이상 어떻게 더 행복할 수 있을지 의아해하며 할은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캐슬린은“닐 맥스웰 형제님을 위해 연구 활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닐 에이 맥스웰은 그때 막 교회 교육 기구 교육 총감에 임명되었습니다. 할과 캐슬린은 그를 알지 못했지만, 캐슬린은 남편이 사람들의 인생을 변화시킬 무언가를 더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닐 맥스웰 형제님을 위해 연구 활동을 하다니, 지금의 내 직업으로 말이요?”할이 대답했습니다. 게다가 그는‘연구 활동은 젊은 대학원생이나 하는 일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캐슬린은“그것에 대해 기도해 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결혼 생활의 그 시점에서 할은 아내의 조언을 무시해 버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소리 내어 기도했습니다. “저는 아무 응답도 받지 못했는데 오히려 기분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다음날 감독단 모임을 하는 동안, 할이 잘 알고 있는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 들어와 아내의 영감을 가볍게 여긴 것에 대해 그를 꾸짖었습니다. 그는 “너는 네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이 어느 길인지 알지 못하나니, 만일 다른 직업 제의를 받거든 나와 상의해야 하느니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할은 그 경험에 크게 압도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캐슬린에게 말했습니다. “문제가 생겼어요.”그는 스탠포드에 있는 동안 여러 직업 제의를 거절했었는데 그러한 실수가 걱정되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제의들에 대해 기도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라고 할은 말합니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의 미래에 관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캐슬린이 한밤중에 질문을 던지고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교육 총감인 맥스웰 형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맥스웰 형제는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리는 모임에 할을 초대했습니다. 그는 다음날 비행기를 탔고, 두 사람은 할의 부모님 집에서 만났습니다. 맥스웰 형제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형제님이 릭스 대학의 총장이 되었으면 합니다.”였습니다.
아내의 영감이나 그가 받은 영의 꾸짖음도 이 놀라운 일에 그를 준비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맥스웰 형제에게 그것에 대해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어쨌든 그는 릭스 대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제일회장단을 만났습니다. 그런 후 맥스웰 형제는 그가 원한다면 총장직을 맡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할은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왔지만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너무나 희미한 음성을 들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는 회상합니다. “그 음성은‘이 학교가 내가 일할 곳이다’라는 확신을 주었습니다.”그는 맥스웰 형제에게 전화해서“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할은 스탠포드 종신 교수직을 그만 두고 아이다호 주 렉스버그에 있는 좁은 이동 주택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습니다. 1971년 12월 10일, 그는 릭스 대학 총장으로 취임했고, 몇 개월 후에 그의 가족들은 그가 건축을 도운 새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릭스에 가면서 몇 가지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 한 가지는 스탠포드에서의 대단한 위치를 놓고 봤을 때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제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보다 제 아내가 먼저 계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제 자신이 그곳에 갈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어떻게 스탠포드의 교수직을 그만 둘 수 있었지?’라고 질문 하기 보다는‘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살펴 주셨어. 그것은 결코 희생이 아니었지.’라고 말합니다.”
아이어링 회장이 렉스버그에서 보낸 6년은 그의 가족과 학교에 축복이 되었습니다. 겸손한 가정 복음 교사의 현명한 조언 덕분에 그 시간들은 더욱 기억할 만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 가정 복음 교사는 큰 신앙을 지닌 농부였는데, 아이어링 회장에게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대학 교수진과 직원 및 학생들을 만나고, 격려하며, 감사를 전하도록 권고했습니다.
할은 그 일에 대해 기도했고, 그 조언에 따르라는 영감을 받았으며, 학교 내의 충실한 학생들, 헌신적인 교수진 및 직원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교수와 함께 종교 수업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가 대학의 영적 학문적 기반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일할수록 학교와 렉스버그 주민들에 대한 그와 캐슬린의 사랑은 커 갔습니다.
가족을 우선시함
렉스버그에서 지내던 몇 년 동안 아이어링 가족은 서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그때 할과 캐슬린에게는 헨리 제이, 스튜어트, 매튜, 존 이렇게 네 아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두 딸, 엘리자베스와 메리 캐슬린을 얻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작은 시골 농가 마을일지라도 할과 캐슬린이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 중 한 가지는 아들들이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양과 질이었습니다. 큰 아들인 헨리 제이는 아이어링 가정의 정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경험을 회상합니다.
“어느 토요일 밤 자정 무렵, 저와 동생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아서는 안 될 저속한 코미디 쇼를 보고 있었습니다. 지하 방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제외하고는 캄캄했습니다. 예고도 없이 어머니가 들어오셨습니다. 매끄러운 흰색 잠옷을 입으신 어머니는 큰 가위를 들고 계셨습니다. 어머니는 소리 없이 텔레비전 뒤로 가시더니, 코드를 고리 모양으로 말아 쥐셨습니다. 그런 뒤 코드를 가위로 단번에 잘라버리셨습니다. 불꽃이 튀며 텔레비전이 꺼졌고, 어머니는 몸을 돌려 조용히 방을 나가셨습니다.”라고 헨리 제이는 말합니다.
헨리 제이는 낙담하여 침대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영리한 그의 동생은 고장난 진공 청소기의 코드를 잘라 그것을 텔레비전에 연결했습니다. 곧 아들들은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와 앉아, 그 쇼를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헨리 제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어머니셨습니다. 이튿날인 월요일에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두꺼운 유리 화면 한가운데가 크게 금이 간, 마루 중앙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즉시 어머니를 의심했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앞에 서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어머니는 정색을 하시며‘텔레비전 아래의 먼지를 닦고 있었는데, 그게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더구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아내의 소망을 존중했고, 자녀들은 어머니의 소망을 존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이 아이어링 가정의 마지막 텔레비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로 조용한 모범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영감을 받으면 두려움을 모르십니다. 어머니의 단호함은 자녀들과 손자손녀들에게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순간이나 일상 생활에서 어머니는 우리 삶의 행로를 영원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라고 헨리 제이는 평합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최선을 다하고 최고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주는 아내를 한결같이 신뢰하며, 그녀가 같은 방법으로 자녀들을 축복해 왔다는 사실에 고마워합니다. 그는 가족에 대한 그녀의 모범과 영적인 영향력을 즉각적으로 칭찬합니다. 그녀 역시, 영에 대한 남편의 민감성과 가정에서 효과적으로 복음을 가르치고 그에 따라 생활해 온 것에 찬사를 표합니다.
“할의 마음속에 누가 우선 순위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어요. 그는 스탠포드에 있는 유능한 동료들과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았지만 항상 가족을 우선 순위에 두었지요. 하루를 마치고 저녁 시간을 함께할 때면 그는 ‘우리가 통화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그러고는 영의 인도에 따라 전화기 앞으로 가서 그날 저녁 통화가 필요한 가족과 연락을 해요.”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지자 가족들은 서로를 위한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됐고, 관심 있는 일을 하고, 재능을 발전시키고, 운동 및 다른 가족 활동을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년간, 아이어링 회장은 요리 실력을 쌓았고(손수 빵을 만들 정도로), 목각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으며, 수채화를 배웠습니다. 가끔씩 그가 감사 편지나 기념 수채화를 보내올 것입니다.
오늘날 아이어링 회장의 집은 그림과 조각,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제작한 가구들로 가득합니다. 많은 작품들이 도덕적 가르침이나 영감을 반영합니다. 여기에다, 이제 그는 25명의 손자손녀가 더해진 가족들에게 매일“작은판”이라 부르는 애정 어린 이메일을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매일 이메일로 가족 일지와 사진, 자녀들로부터 온 소식들을 보내주시기 때문에 저희들은 마치 저녁 식사 때마다 함께 둘러 앉아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듭니다.”라고 헨리 제이는 말합니다.
기꺼이 봉사하고자 함
당시에는 몰랐지만, 아이어링 회장이 릭스 대학의 총장 자리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세속적인 직업을 뒤로하고 떠난 것입니다. 그는 대학 총장인 동시에 지역 대표와 주일 학교 본부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면서 교회 지도자들과 더 많이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가 지닌 재능과 영적인 은사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사이 주님께서는 기꺼이 봉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릭스 대학에서 6년을 보낸 아이어링 회장에게 중대한 부름들을 부여하면서 자신들을 그에게로 이끈 영감을 구했습니다. 그러한 부름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그는 일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응답에 귀 기울일 때, 그리고 그의 조상들처럼 영감에 따라 행할 때 영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부름이 왔을 때, 그는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1977년, 교회 교육 기구의 새로운 교육 총감이었던 제프리 알 홀런드 형제는 아이어링 회장에게 부 교육 총감으로 봉사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3년 후, 홀런드 형제가 브리검 영 대학교의 총장이 되자 할은 그를 대신하여 교회 교육 기구 교육 총감이 되었고, 1985년 4월에 감리 감독단 제1보좌로 부름 받을 때까지 그 직분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이 부름에서 관리, 시설 계획, 성전 설계, 건축 및 그 밖의 현세적인 임무에서 많은 재능들을 발휘하며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1992년 9월에 그는 교회 교육 기구 교육 총감으로 다시 한 번 지명되었고, 한 달 후에는 칠십인 제일 정원회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95년 4월 1일, 헨리 비 아이어링은 십이사도 정원회의 사도로 지지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설교와 사랑의 봉사, 그리고 구주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힘있는 간증으로 전 세계에 있는 교회 회원들을 축복하는 가운데 더 많은 주님의 영을 간구해 왔습니다.
특별한 적임자
2007년 10월 연차 대회에서 아이어링 회장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축복에 대해 간증하면서,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하나님 아버지의 역사하심을 일지에 기록하면서 간증이 커짐을 느꼈고“그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되었습니다.4
그는 이러한 응답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아는 열쇠는 듣는 귀를 발달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제 인생에서 명확한 느낌을 받지 못했거나 영의 음성을 놓친 때가 있다면 그것은 너무 바쁘거나, 너무 산만하거나, 개인적인 일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아이어링 회장은 언제나 신앙개조 제13조의 교훈에 따라 생활합니다. 그가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님과 디이터 에프 우흐트도르프 회장님의 곁에서 봉사하게 된 것은 교회 회원들에게 있어 정말 행운입니다. 흔치 않게, 재능, 신앙의 유산, 준비하는 삶, 봉사에 대한 헌신 및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결심을 두루 갖춘 그는 제일회장단에서 봉사할 특별한 적임자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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