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다툼 및 미국 정부에 불순종한다는 소문은 1800년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성도들을 괴롭혔다. 예를 들면, 1857년에 후기 성도들은“몰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가 유타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몹시 놀랐다. 연방 정부는 몰몬을 좋아하지 않는 공무원들의 거짓된 보고를 받고, 브리검 영을 대체할 새로운 지사를 지명했으며, 2,500명의 군인들의 호위 속에 그를 유타로 보냈다. 미주리와 일리노이에서 박해를 겪은 교회 회원들과 지도자들은 이 군인들로부터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몰랐다. 사실, 군인들 중에는 자신들의 역할을 단순히 새로운 주지사를 호위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몰몬이즘을 종식시키기 위한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다. 브리검 영 회장과 다른 교회 지도자들은 유타 준주 내에 있는 정착민들에게 가정과 지역 사회를 방어할 준비를 시켜서 위협에 대처했다. 그들은 특공대를 보내 그들을 교란시키고 보급 마차에 불을 지름으로써 그들의 행군을 지연시켰다. 이 특공대는 피를 흘리지 말라는 엄격한 지시를 받았다. 성도들에 의한 군사 작전과 저항은“유타 전쟁”으로 알려졌다. 성도들의 전술은 군대의 행군을 성공적으로 지연시켰으며 부득이 군대는 앨버트 시드니 존스턴 대령의 지휘 아래 서부 와이오밍에서 비참한 겨울을 보내게 됐다. 겨울 동안, 교회의 친구인 토마스 케인의 도움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신임 주지사인 알프레드 커닝은 브리검 영과 협의하기 위해 군대를 대동하지 않고 솔트레이크시티로 왔다.
1858년 봄, 교회 지도자들은 북부 유타에 있는 성도들을 집에서 피신시켜 남쪽으로 이주하게 했다. 몇몇 사람은 뒤에 남아 필요할 경우 연방군이 빈집들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보다 차라리 태워버리도록 지명되었다. 솔트레이크 성전 공사장은 평평하게 흙으로 덮어 쟁기질한 밭처럼 보이게 했다. 평화 협상 결과로, 군대는 솔트레이크시티를 통과했으며, 솔트레이크시티 남서쪽으로 약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캠프 플로이드를 세웠다. 성도들은 1858년 여름에 집으로 돌아왔으며, 군대는 1861년에 철수할 때까지 캠프 플로이드에 주둔해 있었다.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전쟁을 시작한 이후, 영 회장은 1861년 10월 18일에 미국 정부 관리들에게 성도들이 아직도 국가에 충성하고 있음을 상기시킬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대륙 간 전신이 막 개통되어 브리검 영은 새로운 전신으로 서부에서 동부로 최초의 메시지를 보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가 보낸 메시지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유타는 탈퇴하지 않았으며, 이 행복한 조국의 헌법과 기타 법률을 확실히 지지합니다.”(Edward Henry Anderson, Life of Brigham Young [1893년], 140~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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